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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함승민 Mar 30. 2020

질문으로 평가 받은 적이 있는가

"기자 하면 뭐가 좋아?"


기자생활을 하는 동안 주위로부터 가장 많은 질문 중 하나다. 아무래도 일반적인 직장인에 비해 하는 일이나 업무의 방식이 다르다보니 생기는 궁금함일 것이다. 심지어 나도 다른 기자들한테 많이 물어봤다. 


들어보면, 기자들도 다 저마다 '기자가 좋은 점'에 대해 다르게 생각한다. '세상을 바꿀 수 있어서'나 '나쁜놈들을 혼내줄 수 있다'는 사명감형부터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인맥을 넓힐 수 있다'거나 '기자생활에 이후에 다른 일을 할 때도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커리어 관리형, 혹은 '단순 반복 업무가 아니다' '업무에 자율성이 있다' 같은 자유정신형도 있다. 


시기에 따라 조금씩 바뀌긴 했지만, 사실 내 대답 역시 이런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처음엔 쉽게 만나기 어려운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 특히 각 분야에서 그래도 일가를 이룬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생각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은 기자가 아니면 얻을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이었다. 


어느 정도 지난 뒤엔 기사를 통해 불합리한 점을 꼬집고, 그것이 반영돼 제도나 인식이 바뀌는 것에 희열을 느꼈다. 그러나 이런 장점들은 언론계의 환경 변화와 개인적인 동기 저하로 갈수록 희석됐다. 그때쯤 기자 생활의 새로운 매력으로 다가온 게 있었다. 바로 '질문'이다. 


기자는 답이 아니라 질문을 고민할 때가 많다. 그게 일이다. 누군가를 만나 인터뷰 기사를 써야 한다고 치자. 당연히 인터뷰 전에 무엇을 물을지 생각한다. 여기에는 '나는, 그리고 독자는 이 사람의 입에서 듣고 싶어 하는 게 뭘까' '나는 왜 이 인터뷰를 하는가' 등이 반영된다. 더 좋은 대답을 얻거나 다른 기사에 나오지 않은 내용을 끄집어 내기 위해 과정이다. 


어떻게 질문할 지도 따진다. 질문의 순서에 따라 인터뷰의 흐름이 달라질 수 있다. 기사를 쓸 때도, 독자가 읽기에도 좋은 흐름을 만드는 게 좋다. 질문의 어조와 태도도 고려 대상이다. 강하게 직접적으로 물어볼 것인가, 에둘러서 완곡하게 물어볼 것인가. 원하는 답을 듣기 위해서, 아니면 조금 더 많은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질문의 기술이 필요하다. 


인터뷰 뿐만이 아니다. 현장에서 누군가를 만나거나 전화로 취재를 할 때도 마찬가지다. 이때는 무엇을, 어떻게 물어볼지 뿐만 아니라 누구에게 물어볼지도 알아봐야 한다. 어떤 사안에 대해 알아봐야 할 때 누구한테 물어봐야 할지 알고, 그런 사람에게 바로 접촉할 수 있고, 또 그런 사람의 수가 많다는 것 자체가 기자의 경쟁력이기도 하다. 


이처럼 기자들이 질문을 치열하게 고민하는 건 그게 일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정확히 말하면 그것을 직간접적으로 평가 받기 때문이다. 당장 눈 앞에 있는 인터뷰이, 또는 취재원으로부터 '뭘 이런걸 물어보지?'라는 반응을 얻을 수도 있고, '와, 질문 좋은데'라는 평가를 받을 수도 있다. 멍청한 기자로 보이기 싫어서, 또는 앞으로 취재원과의 관계를 돈독하게 하기 위해서 좋은 질문을 던져야 한다. 


내가 작성한 기사를 확인하는 데스크로부터도 평가를 받는다. 데스크가 내가 제안한 기획을 받아들이거나 지시하는 데는 의도와 이유가 있다. 데스크 입장에서 물어봤어야 하고 들어가야 내용이 있다. 기사에서 드러나는 질문에 따라 상사로부터 쓸만한 놈인지 아닌지가 평가되는 것이다. 


끝으로 독자도 기자의 질문을 평가한다. 기사를 읽고 자신이 알고자 하는 내용이 들어갔는지, 그것을 물어봤는지, 단순히 까거나(?) 빨아주기(?) 위한 질문을 한 건지 판단한다. 그러지 못하면 '기레기'라는 댓글이 달리기 십상이다. 


이런 과정 때문에 기자는 자연스럽게 질문을 훈련한다. 직접 질문을 할 기회도, 질문을 고민할 기회도 많다. 물론 멍청한 질문을 할 때도 많고 실수도 많지만, 취재원은 비교적(적어도 면전에 대고는) 기자의 질문에 너그럽게 반응해준다. 다른 일을 했다면 쉽게 할 수 없는 경험일 것이다. 


돌아보면 나는, 그리고 우리는 학창시절 질문을 고민하거나, 연습하거나, 질문으로 평가를 받아본 기억이 없다. 항상 대답을 연습했고, 대답으로 평가 받았다. 그나마 세상이 바뀌면서 '정답은 아니어도 돼, 자유롭게 말해봐'라는 식의 교육이 퍼졌지만, 이 역시 대답을 강조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학생은 항상 물음의 객체지, 주체가 아니었다. 


아, "질문해도 괜찮다"고 하기는 했다. 그러나 "괜찮다"는 말은 어디까지나 "부적절하거나 불편하지만 봐주겠다"의 의미다. 많이 봐줘도 질문은 '할 수 있는' 일이지, '해야 하는' 일은 아니다. 그에 비해 대답은 항상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해야 하는' 일이었다. 성적은 답으로 매겨지는 것이지, 질문으로 매겨지는 것이 아니다. 질문이 아니라 대답에 따라 우리의 순위가, 나의 가치가 정해진다. 


무언가로 평가받지 않는다면, 그 무언가는 우리에게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머릿속의 수많은 고민거리 중에서 우선순위가 뒤로 밀리고, 거기에 쏟는 에너지도 줄어든다. 그래서 질문 자체도 줄고, 질문을 낯설어하게 되고, 사회는 질문을 꺼려하게 되고, 좋은 질문이 사라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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