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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하면 기꺼이 와주는 손님

기쁨과 사랑에 대하여

by 헤이미 Heyme
그가 길을 찾아 떠돈 곳은 광활했다. 언덕, 산길, 폭포, 강, 초원. 그가 본 풍경들은 그에게 온갖 생명들이 어우러져 빚어내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수많은 이야기들을 들려줬다. 그는 자신의 슬픔마저 풍경 속에 받아들여진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는 결국 '기쁨'이라는 단어를 자신에게 허락한다.
- 정혜윤, <삶의 발명> 중



슬픔과 절망 속에서도 힘주어 문을 열어 초대했더니

기꺼이 찾아와준 기쁨과 사랑에 대하여.


1.

내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자동으로 떠오르는 몇 개의 장면은 아마 죽을 때까지 잊히지 않을테다. 아무리 희석해보려고 해도. 어른이 된 내가 심리학이든 뭐든 문제 해결을 위한 타임머신이 될 만한 건 모조리 배워서 한껏 똑똑하게 접근하려 해도. 어리고 서툴렀던 과거의 그들에게 다가가 이해를 나누고, 움츠러있던 작은 나에게 다가가 안아주고 토닥여도. 그들은 내 한 평생 대표적인 그 장면들로 기억되며 끝끝내, 잔잔히, 미움받을 것이다.


하지만 어제 오랜만에 왔다고 부산스럽게 쥐어준 여러 음식들을 오늘 저녁상에서 마주하자니 그 의미가 새삼 겹겹이 쌓여 부피가 커져 있었다. 나라는 존재가 그들의 팽팽했던 손이 쪼글거리고 주름지게 될 때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만든 음식으로 길러졌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그래서 나는 반찬을 덜고 국을 데피며 그렇게 확인 받고 싶었던 말을 여러 번 되뇌게 되었다.


'나는 사랑받았다.'

'나는 사랑받았다.'


눈물이 뜨끈하게 멤돈다. 그들이 준 건 생명. 공기같아서 소중하다는 게 잘 느껴지지 않는 적당한 맛의 매 끼니와 살 집과 구성원을 한 명도 잃지 않았다는 것이 새삼 신기한. 가족.


어제 함께 모인 식사 자리에서 엄마는 말했다. 예전에 너네 키울 때는 어떻게 돈을 벌지, 학원은 어디를 보낼지, 뭘 먹일지를 생각했는데, 요즘은 죽음을 더 많이 생각하는 나이가 되었다고.
"그런 나이가 됐나봐."

올해 초 가족 중 제일 활기차고 건강하던 아빠는 암수술을 받았고 동생보다 현저히 쪼그라들었다. 90이 넘으신 외할머니는 여러 번 수술을 거쳤는데도 눈이 안보이신다. 전담으로 할머니를 돌보던 외삼촌과 외숙모 내외는 이제 곧 태어날 손주를 본다고 외할머니를 엄마에게 맡기려 한다. 이리저리 치이는 듯, 돌봄의 분업을 제안해오는 그녀에게 엄마는 적의를 느낀다. 주변에서 다방면으로, 희미하지만 언젠가 선명해질 끝이 자꾸 보이는 엄마에게, 나는 위로는 커녕 어떤 말도 건네지 못했다.


집에 와서 헤어지기 직전 동생과 함께 준비한 선물을 건넸다. 무리해서 준비했지만 사실은 좀 부족하다고 느낀 현금 백만원을 요즘 유행하는 방식으로 뽑을 수 있도록 둘둘 말아 포장한 가방이었다. 엄마와 아빠 둘이 같이 그 돈을 티슈처럼 슈루룩 뽑으며 환호하는 모습을 봤다. 싸구려지만 반짝이는 카네이션 장신구를 가슴깨에 꼽으며 쑥스러운 듯 고맙다고 미소 띄운 그네들을 보며, 부모는 너무 손해보는 장사라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2.

밥 다 먹고 트름하고도 또 밥달라고 하는 강아지가 내 옆에 와서 엉덩이를 기댄다. 우리가 닿은 면적에서 부드럽고 뜨끈한 너의 몸이 느껴지고 있다.

함께 나갔던 공원에서 풀 깎은 뒤 나는 향그러운 냄새가 났고, 몇 주 전만 하더라도 가지 끝에서만 틔운 초록들을 어느새 온 몸에 두른 나무들이 그 자리에서 우리를 맞이한다.


이렇게 닿을 수 있다는 건 사실 기적이라는 걸 오래도록 힘주어 상기하려고 한다. 어떤 것들은 영영 못 보기도 하니 기쁨과 사랑의 문이 자주 열릴 수 있게 자주 초대하려고 한다.




20250507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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