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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가다 우연히 스치는 인연이었을까

그날 아침에는 일부러 적시려고 의도하지 않으면 젖기 힘든 약한 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우산도 없었는지 츄리닝에 린 모자를 눌러쓰고 반바지 차림으로 내가 좌회전 신호대기로 멈춰 있던 횡단보도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건너가고 있었다.

순간 그녀에게서 뭔가 비에 자신의 몸을 맞기는 듯한 느낌, 비가 오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듯한 표정을 느꼈다.

그렇더라도 그게 다였다면 그냥 지나쳐가며 기억에서 금방 지웠을 것이다.

나는 다른 아침의 출근 때와 다름없이 자동차 안에서 음악을 들으며 평온한 출근길을 즐겼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좌회전 신호를 받아서 출발하려는데 좀 전에 왼쪽으로 건너갔던 그녀가 어느새 내가 좌회전하려는 방향의 대각선 쪽으로 건너가서 그녀가 맨 처음 건너왔던 오른쪽으로 다시 건너가려고 보행신호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갔았다.

지나친 과대망상이었을까!

그녀는 내게 무슨 할 말이 있어 하늘에서 내 앞에 떨어진 듯했다.

무슨 사연이 있는지 반드시 만나봐야 할 것 같았다.

그녀를 만나 무슨 사연인지 고 그 사연을 해결해줘야 하는 것이 나의 거룩한 사명처럼 느껴졌다.


약 500미터쯤 정도의 거리를 다급하게 운전해 가서 피턴 하듯이 되돌아왔다.

못해도 몇 분은 지났을 텐데 그녀는 신기하게도 내가 피턴 하여 돌아온 그 자리의 반대편 쪽으로 건너가서 마을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반대편 쪽 차선에 있어서 그녀가 있는 쪽으로 자동차를 돌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내가 맨 처음 그녀를 본 사거리 쪽으로 건너간 후 유턴해서 돌아오려고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짧은 시간은 생각보다 길었다.

내가 그녀를 처음 본 사거리 쪽으로 건너가고 있을 때 마을버스 한 대가 그녀가 버스를 기다리는 정거장 쪽으로 건너가고 있었는데 '아마 그걸 타고 갔겠지'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래도 그 자리에 있었으면'하는 혹시나 하는 마음이 더 앞섰다.

우연인지 필연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녀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스마트폰을 바라보며 머리를 매만지고 있었다.

바보, 그때 바로 조수석 쪽 창문을 열고 말을 걸,

난 쓸데없이 많은 생각들을 했다.

운전석 쪽 창문을 열어 그녀에게 나의 몸을 숨기지 않고 다 보여주며(조수석 쪽 창문을 열면 자동차 안에 앉아 있는 나의 몸은 숨기고 얼굴만 빼꼼히 보여주는 것 같아서) 말을 기 위해 다시 좁은 길로 들어가서 되돌아 나오는 사이에 다음 마을버스가 그녀 앞에 멈춰 서더니 그녀가 올라탄다.

난 멍하니 넋을 잃고 출발하는 버스만 바라보고 있었다.

아! 내가 너무 머뭇거린 탓일까!

버스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훌쩍 지나가 버린다.

버스 안에 손님은 아무도 없고 그녀 혼자만 타고 있었다.

출근하지 말고 그녀를 따라 버스를 쫓아갈까 했는데,

'아서라 이 남자야, 이제 출근해야지'라고 누군가 말을 하는 것 같았다.

아! 내가 너무 망설였나 보다.

내 앞에 도움을 청하러 하늘에서 내려온 그녀에게 아무 말도 못 해 채 그냥 우주로 내몰아 보낸 것이다.

무슨 사연이 있는지도 모르고 무책임하게 돌려보낸 것이다.


우리는 수많은 우연과 필연 속에서 누군가를 만나고, 헤어지고, 스치고, 잊고, 기억하고, 아쉬워하며 순간순간을 지나쳐 보낸다.

그녀를 다시 만날 있을까!

어쩌면 나는 다른 지구인들의 눈을 너무 의식해서 그렇게 망설였는지도 모른다.

그녀를 다시 만난다면 그녀를 따라 우주 끝까지라도 함께 갈 용기가 있는가?


그날처럼 일부러 적시려고 의도하지 않으면 젖기 힘든 부슬비가 내렸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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