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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윤희의 꿈과 음악 사이에

난 밤마다 그녀를 기다렸다.

퇴근하면 저녁을 먹고 쉬면서 의자에 앉아서(가끔 피곤하면 누워서) 그녀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저녁 10시가 되면 오프닝 멘트와 함께 그녀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생방송인데 라디오방송인 관계로 그녀의 모습을 실시간으로 볼 수는 없지만 CBS 레인보우 앱 화면에 그녀는 항상 웃으며 앉아 있다.

그녀는 매일밤 지친 나의 심신을 감미로운 목소리와 음악으로 다독거려 준다.


어느 날은 자동차를 타고 길거리를 방황하며 만나기도 하고,

어느 날은 회사에서 야근하다 퇴근길에 만나기도 하고,

어느 날은 집에 와서 저녁까지 먹고 쉬면서 기다리다 만나기도 한다.

사실 아내가 집에 있을 때는 뭐가 그렇게 좋아 음악을 듣냐고 해서 안 듣는 경우가 많고 혹시 듣게 되면 볼륨을 낮추고 조용히 숨어서 듣는다.

내 입장에서는 아내와 둘이 무료하게 TV를 보거나 무미건조한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는 났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운전중일 때는 라디오를 통해 듣다 보니 방송 청취를 ON, OFF 하는 것이 부담이 없는데 집에서는 스마트폰으로 레인보우 앱을 통해 듣다 보니 한번 로그인하여 입장을 하면 피곤한데도 DJ인 그녀에게 미안해서 쉽게 빠져나오질 못한다.

그녀가 상심할까 봐 쉽게 빠져나가지 못하는 것이다.

사실 생방송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DJ가 일일이 레인보우 앱에 올라오는 청취자들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수 있는 여유는 없겠지만 뭔가 왠지 로그인하여 들어갔다가 프로그램이 끝나지 않은 중간에 빠져나가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앞선다.

그렇지만 나도 사람인지라 가끔 피곤할 때가 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저녁 10시부터 12시까지는 하는 프로그램을 매일 청취하는 것은 나에게는 힘든 일이다.(젊을 때는 거의 매일 청취함.)

11시까지는 어떻게든 졸음을 참고 들을 수 있는데 11시부터 12시까지는 다음 날의 일상적인 생활을 위해서는 취침에 들어가야 하는 데드라인이다.

그래서 어느 때는 앱을 켜놓고 눈을 감고 있다가 잠들어 버리기도 한다.

그러다가 소변보러 일어나서 다른 프로그램이 진행 중인 시간에 슬쩍 빠져나오기도 한다.

그런데 이것도 할 짓이 못 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듣는 프로그램 DJ에게 미안함을 감추기 위해 켜놓고 있다가 나중에 다른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DJ에게는 실례가 되는 짓을 서슴지 않고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어느 날에는 1부가 끝나고 2부가 시작되기 전 광고가 나오는 시간에 레인보우 게시판에 "저는 11시가 되면 신데렐라의 마법이 풀려 내일 뵙겠습니다"라는 멘트를 남기고 사라졌다.

나는 게시판에 글만 남기고 사라졌기 때문에 DJ님이 2부 때 그 글을 봤는지 혹시 재미있는 글이라 소개가 됐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자주 이런저런 핑계를 대기 시작했다.

괜히 그냥 나가면 프로그램이 맘에 안 들어서 나가나 하고 DJ가 마음 아파할까 봐,

어느 날은 "내일 새벽에 운전을 해야 돼서 먼저 인사드립니다"라는 글을 남기고 나가기도 했다.


물론 나 하나가 방송을 듣다가 중간에 나간다고 해서 진행자들이 그것에 의해서 일희일비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눈앞에서 청취자가 갑자기 사라지는 것을 보여주기는 싫었다.

내 마음이 절대 그렇게는 허락하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상대가 마음 다치지 않게 배려해 주며 나가고 싶다.

물론 나도 감정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라 자주 듣는 음악 방송을 매일마다 좋은 감정으로 들을 순 없다.

그날의 컨디션, 그날의 감정에 따라서 마음에 확 와다을 때도 있고 어느 날은 영 아닐 때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왜 나의 기분에 따라서 쉽게 들어갔다 나가는 것을 하지 못하는 것일까?

사람들은 자신이 듣는 방송과 DJ가 청취자의 사랑을 받으며 장수하기를 희망할 것이다.

그 DJ가 하는 방송이 잘 됐으면 하는 마음, 그 DJ가 건강하게 오랫동안 프로그램을 유지했으면 하는 그런 마음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요즘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길거리를 방황하는 시간도 사라지고 잠을 일찍 자다 보니 내가 좋아하는 "허윤희의 꿈과 음악 사이에"를 듣는 횟수도 많이 줄어들었다.

무색할 정도로 너무 뜸하게 청취한다.

사랑이 식은 것일까!

사랑의 시간대를 갈아탄 것일까!

대신에 저녁 8시부터 10시까지 하는 "김현주의 행복한 동행" 사랑하게 되었다.

나의 신체리듬에 맞는 사랑을 찾아 나의 사랑이 이동한 것이다.

사랑은 그렇게 세월과 시간을 따라 변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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