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뮤하뮤 Aug 16. 2024

곰돌이빙수와 망빙과 팥빙이 있는 여름

  ‘이제 빙수를 먹을 날도 얼마 안 남았군.'이라며 짐짓 아쉬운 척 희망사항을 말해본다. 사실은 앞으로도 먹을 날이 무수히 많다. 쉽게 더위가 가시지는 않을 것 같으니까.


  어릴 적 집 찬장에는 작은 곰돌이 제빙기가 있었다. 핸들을 돌려 수동으로 얼음을 갈아내는 도구다. 귀여운 곰돌이 얼굴이 전면에 있었으므로 나와 동생은 그것을 곰돌이라 불렀다. 엄마가 언제 저걸 꺼내서 빙수를 해주려나 기대하며 여름방학을 보냈던 것 같다. 까치발을 해도 손에 닿지 않던 곰돌이 제빙기, 어른이 되면 하루에 네 번씩 마음대로 빙수를 해 먹어야지 생각했다.

  

  어른이 돼보니 집에서 빙수를 해 먹는다는 건 그야말로 난센스라는 걸 알게 됐다. 물론 손이 야무지지 않은 내 기준에서 말이다. 라면을 끓여놓고 끓인 냄비를 식탁으로 옮기는 순간에 라면 냄비를 뒤집어 버리거나 전자레인지 그릇에 담아둔 냉동볶음밥을 뒤엎는다라든가 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한 친구는 나를 보고 '너에게는 장난스러운 수호신이 있다.'라고 말했다. 다 끓인 라면을 엎는다던가 먹던 과자를 와르르, 소스를 와장창 옷에 흘리는 경우는 있어도 크게 데거나 다친 경우는 없지 않냐며. 생각해 보니 맞는 말이다. 하지만 내가 수호신이라면 다 된 라면을 그렇게 바닥으로 와장창 해버리게 두지는 않을 것 같은데, 이런 장난꾸러기 같으니라고.


  엄마는 곱게 간 얼음을 투명하고 예쁜 그릇에 담고 팥과 알록달록한 젤리, 찹쌀떡 같은 것을 고명으로 올려주었다. 어떤 날에는 길쭉한 과자를 꽂아 장식하기도 했다. 보기만 해도 시원하고 달콤해 보이는 알록달록한 색감, 빙수와 아이스크림 먹을 때만 사용하는 동그란 숟가락을 써서 한입 입에 넣으면 지루한 시간들이 싸악 날아가는 것 같았다. 빙수 위에 몇 개 안 되는 알록달록한 젤리처럼 호기심과 발견으로 반짝거리는 순간은 찰나일 뿐  정말이지 시간이 안 갔다. 빙수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어른이 될 것 같지 않던 그 시간들에 방점을 찍어주었다.


  최근 몇 년 동안 여름마다 홀릭되어 있는 건 ‘망빙(망고빙수)‘이다. 좋아하는 집은 두 집이 있다. 한집은 우유를 얼려 곱게 간 후 아이스애플망고를 깍둑 썰어 얹어준다. 먹기 전 바로 연유를 부어먹는다. 한집은 두유를 얼린 후 곱게 간 빙수 위에 망고를 얇게 포 떠서 가지런히 얹어준다. 먹기 전 코코넛 밀크를 살짝 뿌려서 마무리한다. 둘 다 나무랄 데가 없이 시원하고 달다. 망고의 향은 이미 열대지방이 되어가고 있는 한반도를 망고 열매가 주렁주렁 달리는 앞마당으로 데려가준다. 이 빙수들의 가격이 웬만한 식사 가격만큼 비싸지만 더운 여름 망빙의 사치는 포기할 수가 없다. 어린 시절 상상한 것처럼 하루에 빙수를 네 번 먹는 어른은 못됐지만 그래도 일주일에 한 번은 먹고 싶다.


  어제는 인사동 일대에 파는 놋그릇에 담긴 옛날 팥빙수가 무척 먹고 싶었다. 곱게 간 얼음에 설탕에 조린 통팥을 얹고 그 위에 말린 대추칩이나 잣이나 호두 같은 견과류로 장식한다. 단팥이 든 흰 찹쌀떡을 얹어주거나 겨울에 만들어둔 곶감 같은 것을 곁들여 먹는다면

정말 좋을 것 같다. 작고 동그란 놋수저를 사용해서 아래쪽부터 공략한다. 모래 뺏기 게임을 하듯이 찹쌀떡이 쓰러지지 않도록 한쪽부터 야금야금 먹을 것이다. 아니면 그날 가장 맛있어 보이는 재료를 먼저 날름 먹고 나머지 재료를 맛볼 것이다.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는 팥빙수 생각이 완전히 사라졌지만 말이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의 하루가 젤리 망고 찹쌀떡 같이 반짝반짝 빛나길 바라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