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수면 위로 붉은 사막이 꿈처럼 떠 있는 곳에 가면
이끼께는 사막과 바다가 동시에 존재하는 곳이다. 파란 바탕에 은빛으로 빛나는 수면 위로 붉은 사막이 꿈처럼 떠 있다. 거기에 일찍 뜬 달이 창백한 모습으로 하늘에 걸려있기라도 하면 상당히 초현실적인 그림이 된다. 바다와 사막이 같이 있다는 개념이 신기하기도 하고 서핑 장소도 있다고 해서 칠레 여행 일정에 이끼께를 넣었다. 나는 토레스 델 파이네 도보 여행을 끝내고 이끼께로 이동하여 호스텔 백 패커스에서 일주일 정도를 별일 없이 보냈다.
외국인인 나의 눈으로는 칠레인과 아르헨티나인들의 외모는 구별이 안 되는데 서로는 잘 알아보는 특징이 있는 모양으로, 혹시라도 아르헨티나인에게 칠레인이냐고 물었다가는 10분 동안 잔소리를 듣게 될지도 모른다. 사이가 안 좋은가 싶다가도 또 젊은이답게 칠레인 아르헨티나인 할 것 없이 어울렁더울렁 해변으로 몰려가서 일광욕을 하면서 맥주를 마시고 밤에는 파티한다.
이끼께에 도착한 첫날 샤워를 하고 야외 식탁으로 나와 굶주렸던 와이파이를 즐기던 중이다. 도보 여행을 하며 운동화 속에 죄수처럼 갇혀있던 발가락을 꼼지락대고 있자니 한 무리의 여행자들이 올라(안녕)! 하며 씩씩하게 인사한다. 그쪽을 바라보며 올라!라고 대답하니 바다에 와서 지금 핸드폰만 볼 셈이냐며 고개를 왼쪽으로 꺾으며 바모스(가자)! 하는 거다.
음, 그래 일단 바다로…? 아, 지금 엄청 더울 텐데
나는 핸드폰을 반바지 뒤쪽 호주머니에 넣으면서 따라나선다. 바다 위 저 멀리 떠 있는 사막에서 불어오는 모래바람과 해변의 모래가 섞여서 머리카락 사이사이 모래가 앉아 머리카락이 뻣뻣해진다.
해변에 하나둘씩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나는 뜨거운 열기를 온몸으로 받아내며 오른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실눈을 떴다. 발가락을 꿈적대며 뜨거운 모래 속에 파묻었다. 여행자들은 스페인어로 왁자지껄 떠들다가 나한테 스페인어로 뭐라 물었는데 (스페인어는 올라, 바모스, 마냐냐 밖에 모른다) 못 알아들으니 짙은 갈색 고수머리 남자가 영어로 말한다.
" 칠레에 오면서 스페인어를 하나도 못 한다고? 놀랄 노 자다. ㅋㅋㅋㅋㅋ"
그러면서 자기네들은 윗도리 아랫도리를 훌훌 벗더니 수영복 차림이 되는 게 아닌가. '치사하군 나는 반바지인데. 질 수 없다.' 생각하며 윗도리를 벗어젖혔다. 운동할 때도 입는 브라탑인데 뭐 어떠랴
브라탑만 입고 희멀건 등을 태우려는 나에게 아까의 짙은 갈색 고수머리가 또 말한다.
"바다에 오면서 수영복도 안 가져왔다고? 놀랄 노 자다. ㅋㅋㅋㅋㅋ"
(이쯤 되면 싸우자는 거지, 바다를 배경으로 씩 웃는 얼굴이 밉상은 아니라 봐줬다)
나는 발가락을 좀 더 모래에 깊숙이 넣으며 ‘내가 준비 안 하고 여행 다니는 게 한두 번이 아니여, 이것은 나의 스타일……’이라며 중얼거렸다. 모래는 아까보다 더 뜨거웠다. 이들은 가방에서 비치볼을 꺼내서 가지고 놀기 시작했다. 나는 속으로 스페인어를 꼭 배워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그 후 6년이 지나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여행을 갔을 때도 똑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 나는 너무 더워서 나중에 보자며 일어서서 숙소로 왔다.
까무룩 잠이 들었는데 밤이 되었나 보다. 성대한 (술) 파티를 마치고 온 여행자들이 슬리퍼를 찍찍대며 왁자지껄 들어왔다. 내가 체크인 한 날 방이 없어서 4인 혼성 도미토리에 묵게 되었는데 내 침대는 2층이었다. 술에 취한 남자애가 자기 침대인 줄 알고 사다리를 타고 올라오는 거다. 나는 올라오는 술에 취한 좀비를 발로 밀면서 "여기 내 침대야 꺼져."라고 말했다. 좀비는 "어? 아닌가 그럼 내 침대는 어디야?"라고 하면서 밖으로 나간다. 잠이 확 깬다. 시계를 보니 새벽 2시 40분, 술을 얼마나 쳐드신 건가요. 나는 일어나 앉아 음악을 들으면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밤을 꼬박 새우고 리셉션이 열리자마자 사또에게 이 사실을 고했다. 긴 단발머리에 커다란 투명 안경테를 쓴 직원이 여자방이 오늘 새로 나왔다며 방을 바꿔주겠다고 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이끼께 방문 때문에 여행자, 로컬 할 것 없이 어딘가 붕 떠 있는 느낌이었다. 아침으로 빵에 잼을 바르고 커피를 한잔 만들어 먹고 있자니 어제 해변에서 봤던 무리가 옆 테이블에 앉아 인사를 한다. 이분들도 어제 파티를 거하게 하셨나 보다. 아르헨티나인들은 마테차를 어찌나 사랑하는지 보온병과 마테잎, 금속으로 만든 빨대는 어딜 가나 들고 다닌다. 어제 해변에서 자신을 마리나라고, 소개했던 여자는 오늘 또 바뀐 헤어스타일로 이게 숙취에 좋다며 마테차를 계속 마셔댔다.
마리나는 나를 볼 때마다 윙크하거나 손으로 키스를 날렸다.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남미 사람은 저렇게 인사하나 보다 하며 익숙해지는 나를 본다. 그가 가장 자주 하는 말은 1) 바모스, 2) 파티, 3) 미 마테! 다.
작고 영리해 보이는 눈에는 늘 마스카라가 번져있고 처음 보는 사람은 친해져야 하는 사람, 자기 파티에 데려갈 사람으로 생각하는 파티걸이다.
마리나의 종교에 대한 의견은 다음과 같다.
"흥, 종교는 사람의 정신을 식민화한다고! "매일 새롭게 바뀌는 그 머리 스타일을 만지며 말했다.
마테차를 엄청나게 마셔대던 또 다른 여자가 말을 걸어왔다. 해변에서 만났던 무리는 아니고 긴 갈색 머리에 차분하고 조용한 느낌으로 이름은 에리카이다. 교황 방문에 대한 그의 의견은 이렇다.
"나는 종교는 안 믿는데 (교황 방문이 이 동네에서) 워낙 큰 이벤트라 미사에 가봤어. 미사가 너무 근사하고 마음이 평온해지긴 하더라. "
그리고 질문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너의 한국 생활은 어떠냐부터 북한과의 관계, 한국인의 평균 교육 수준 등 궁금한 게 많은 사람이었다. 잘 못하는 영어로 대화하는데도 말이 잘 통하는 느낌이라 우리는 저녁에 같이 어울리기로 했다.
저녁은 각자 먹고 숙소 라운지에서 만나서 시원한 콜라 한 병을 손에 들고 거리를 걸었다. 마침, 길에서 마임과 즉흥극 공연이 열렸는데 그는 집중해서 공연을 보고 정성스럽게 손뼉을 치면서 자기도 배우가 꿈이라고 말했다. 에리카의 직업은 드라마 클래스 선생님이고, 그동안 오디션을 많이 봤는데 오디션을 볼 때마다 비싼 돈을 내야 돼서 힘들다고 얘기했다. 저번에 맡은 역할이 우주인이라 천체관측 프로그램을 체험하는 여행을 하고 있다고 했다. 왜 궁금한 게 많을까 했는데 배우가 꿈이라 타인의 생각과 동기에 관심이 많았나 보다. 다음날 에리카는 자신의 소중한 마테차 금속 빨대를 나에게 선물했다.
저녁 10시, 검게 드리운 야자수 그림자 위로 커다란 부리를 가진 거대한 새들이 둥지를 틀고 앉아 부리 싸움을 하는 모습을 지켜본다. 매일 12시를 못 넘기고 잠에 들어 오늘은 큰맘 먹고 마리나의 파티에 참여하기로 했다. 여자 4명, 남자 3명 정도 모인 것 같다. 우리는 일단 피자를 사 와서 맥주를 마시고, 과자와 싸구려 위스키로 2차를 하고, 3차로 근처 클럽을 가서 춤을 추기로 했다. 마리나의 파티게스트 중에는 긴 곱슬머리에 딱 달라붙는 스포티한 원피스에 힙색을 메고 모자를 쓴 바텐더가 있었다. 그가 이 동네에서 핫한 클럽으로 데려가 준다고 해서 일행들은 굉장히 신이 났다.
술이 어느 정도 오른 뒤 우리의 바텐더 리더를 따라 클럽에 갔다. 숙소에서의 거리는 짧은 것 같은데 골목이 꼬불꼬불해 나 같은 길치는 절대로 못 찾아갈 것 같았다. 술을 한잔 마시면서 스피커와 귀에서 왕왕 울려대는 EDM을 들으며 흔들거리다 보니 어느덧 새벽 3시, 취기도 오르고 급 피곤이 밀려온다. 애들은 더 놀 생각인 것 같아서 나 혼자 택시를 타던지 구글맵 보면서 숙소로 가겠다고 하니 바텐더 언니가(물론 당연히 내 나이가 더 많기는 했을 터) 자기가 데려다주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여자는 여자가 도와야지!"라는 구호를 파이팅 넘치게 외치질 않나, 자기 말대로 하라며 명령하길래 그만 알겠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둘이 숙소로 돌아오는 길은 말없이 상당히 어색했다. 나를 데려다준
'타고난 알파피메일' 바텐더 언니는 다시 클럽으로 돌아갔고 다음 날 나는 숙취로 제대로 고생했다. 나의 이끼께 나이트 라이프도 그날로 끝이었다.
생각해 보니 이끼께에서 퍼져있던 그 시간 동안 상호작용을 한 사람들은 칠레인이 아니라 아르헨티나 사람들이었다. 마리나가 자기 팔로우하라며 강제로 적어준 인스타를 보니 직업은 케이크와 쿠키를 만드는 사람이고 아이 두 명을 키우는 싱글맘이었다. 에리카는 트위터 주소를 줬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소셜 미디어를 잘 안 하는 사람이라 인스타와 트위터 계정과 비번을 까먹어서 팔로우를 못 했다. 팔로우한다고 해도 여행 중 만난 사람들은 서로 자연스럽게 잊힌다. 이 글을 쓰면서 지구 반대편에 살고 있는 그때 만났던 여자들은 자신이 원하던 모습대로 현재를 살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우리가 여행지에서 만나 주고받았던 별 시답잖던 대화들이 서로에게 약간의 영감을 줬을까, 나는 칠레 여행 자체를 거의 까먹고 있다가 이 글을 쓰기 위해 여행지에서 쓴 수첩을 찾아보다가 그들의 이름과 메모를 봤다. 사막과 바다가 동시에 있던 이상한 동네, 이끼께에 대한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나와 그들에게 모두 비일상이었던 이끼께에서의 시간이 그들의 세포 어딘가에 남아 힘이 되기를 바라본다. 나는 거친 질감을 뽐내며 검게 드리운 야자수가 있던 그 밤들을 생각하며 얇은 여행 메모 수첩을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