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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뮤하뮤 May 21. 2024

파타고니아에서 파타고니아를

토레스 델 파이네 서킷 트레일에 가기 위한 험난한 여정

 운동과 안 친하던 시절, 갑자기 친구 한 명이 백두대간종주(지리산 천왕봉에서 진부령까지 약 734km)를 하자고 하는 거다. 동네 뒷산에 있는 산도 가본 적이 없는데 도대체 왜? 어쩌다 보니 백두대간을 백패킹으로 다니게 되고(비록 나는 완주는 못했지만) 걷는 것에 자신이 좀 생겼다. 국내 명산도 좀 다녀보고 해외로 여행을 가게 되면 근처에 산을 한번 찍고 내려오기도 했다. 말하자면 그때 여행의 테마는 '걷기'였던 거다.

 백패킹이나 트레킹을 하다 보면 플리스 소재의 옷을 입게 되는데 가볍고 습기에 강해 보온에 아주 좋기 때문이다. 플리스에는 파타고니아라는 로고가 붙어있었고 여러 이유로 나는 그 브랜드를 좋아하게 됐다. 이후에 파타고니아의 창립자인 이본 쉬나드가 쓴 '파도가 칠 때는 서핑을'(Let my people go surfing)이라는 책을 읽고 나니 파타고니아에 가보고 싶어졌다.


 2018년 새해, 파타고니아 토레스 델 파이네 서킷트레일을 하기 위해 칠레로 갔다.

이 어이없는 비행스케줄을 보자. 새해 첫날과 둘째 날을 하늘에서 보내야 한다.


2018년 1월 1일 인천 13:25 출발-17:20분 프랑크푸르트암마인 도착-19:05분 이베리아 타고 출발-마드리드 터미널 도착 21:45 도착-Lan 에어라인 타고 마드리드에서 23:55분 출발

2018년 1월 2일 09:40 칠레 산티아고아투로메리노베니테스 도착 다시 SKY 칠레 비행기를 타고 푼타아레나스에 오후 3:10분에 도착


 이코노미 좌석에 붙박이 가구처럼 갇혀있어 다리와 허리가 끊어질 것 같다. 프랑크프루트공항에서 3유로짜리 물을 사서 마시고, 마드리드공항에서 5유로짜리 물을 사 마셨다. 이베리아항공사의 직원은 일처리도 늦으면서 눈치를 엄청나게 보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한참을 기다리다가 '익스큐즈미' 한마디 했다고 혼났다. 나는 항상 복도 쪽에 앉는데 자기 멋대로 창가 좌석을 끊어서 불친절하게 내민다.


 다행히 비행기 안에서 부녀가 내 자리를 원해서 복도좌석에 앉게 되었다. LAN 항공승무원들은 새해축하 모자와 안경을 쓰고 밝고 건강한 에너지를 내뿜으며 비좁은 비행기 좌석을 누볐다. 나는 비행기 안에서 시간이 지날수록 수분부족과 수면부족으로 건포도처럼 쪼그라들고 있는데, 비행기 안에서 업무를 수행하는 승무원들이 새삼 존경스러웠다.


 아직도 비행이 한번 더 남았다니 미칠 노릇이다. 하지만 견디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앞 좌석에 붙어있는 트레이를 펴니 벽이 앞으로 다가오는 착각이 든다. 숨이 막혀오지만 먹기는 먹어야지. 어디서 들었는데 기내식은 무슨 일이 있어도 다 먹으라며 조난을 당했을 때 먹어둔 칼로리가 도움이 된다는 말이 생각났다.


 승무원은 사무적인 친절함으로 기내식을 건네준다.

훈제연어에 리코타치즈랑 올리브오일과 빵이 나왔다. 그래도 메뉴는 마음에 들었다.

빵에 올리브 오일을 찍어 먹으며 <밴드에이드, 덩케르크, 뮬랑루주, patty cakes, home agian, los nadie, 지옥에서 온 고양이>를 빠질 것 같은 눈을 손으로 눌러가며 봤다. 너무 건조한 탓인가. 갑자기 감기증상이 온다. 콧물, 근육통, 다리에 감각이 없다.


이틀 동안 잠을 못 자고 있다. 아침 아홉 시 근처에 칠레에 떨어졌다. 입국심사 후 탐색견들이 코를 킁킁대는 모습이 늠름하여 입을 벌리며 쳐다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국내선 출발하는 곳을 찾았다.

"오! 엔텔이다."

심카드를 사고 충전했더니 갑자기 든든하다.

역시 21세기 사람은 밥심도 그렇지만 데이터심이 있어야 한다. 데이터가 생기니 허기를 깨닫게 된다. 치즈 크루아상과 오렌지주스를 사 먹고 소파에 뻗어있다가 후식으로 머핀과 물을 하나 샀다. 타이레놀을 하나 먹고 국내선에 올라탔다. 갑자기 이틀 치 잠이 마구 쏟아져 내려온다. 미친 듯 졸다 깨니 어깨랑 팔이 이상하게 접혀있었는지 부러질 것 같은 통증을 안고 푼타아레나스에 도착했다.


 이 춥고 황량한 느낌, 내가 생각하던 파타고니아의 모습 그대로다. 우왕좌왕하다 택시를 잡아타고 예약해 둔 숙소에 왔다. 조그맣고 아늑한 것이 마음에 든다. 창가너머로 바다가 슬쩍슬쩍 보인다. 잠깐 숙소 근처 슈퍼로 가서 토마토, 계란, 아보카도, 컵라면을 사서 달랑달랑 들고 돌아왔다. 잠깐 졸다 보니 새벽이다. 일어나 거실에 나와 콘프레이크를 주워 먹으며 아침식사시간까지 버티면서 나탈레스 가는 버스를 예약했다.

 

 비가 천장을 때리며 억수로 내린다. 더 추운 지방에 가서 버틸 수 있을지 또 당장 환전하러 시내 나가야 하는데 비가 이렇게 와서 어쩐다냐 생각하면서도 침대 옆에 있는 창을 티브이처럼 재미있게 시청했다. 지나가는 사람과 개와 차와 비와 해를 보다 보니 즐거워서 숙소를 하루 더 연장했다. 누워 있다 한숨 자고 일어났더니 해가 나 있었다 아침에 꿍쳐둔 계란하나와 그레놀라바와 사과를 점심으로 먹고 산책하러 나갔다. 막 걷다 보니 우니마크라는 마트가 있어 이것 저거 사니 11847 페소가 나왔다.


 돌아와서 좀 쉬다가 아까 사둔 샐러드 먹고 다시 밖으로 걸으러 나갔다. 해변 따라 죽 걷다가 들어와서 인스턴트 스프랑 파스타를 해 먹으니 몸이 따뜻해져서 기분이 좋아진다. 공용 부엌에는 소스 종류가 많았는데 각국에서 온 젊은이들이 신나게 요리를 하고 가성비 와인을 하나둘씩 식탁에 올려둔다. 여자들은 와인을 마시다 몰래 립스틱을 바른다. 몸이 안 좋아서 11시쯤 들어와서 잠을 청한다.


 4일 8시쯤 일어나서 아침 먹으러 갔더니 트레킹과 사랑에 빠진 재외 동포를 만났다. 한 시간 동안 두유에 말은 오트밀을 숟가락으로 찌르며 수다를 떨었다. 대화주제는 아무래도 '걷는 것에 대한 사랑'과 '서킷 트레일 정보', '다른 나라의 좋다고 소문난 트레킹 코스'가 되겠다. 이제 방으로 돌아와서 짐 싸고 로션 바르고 11시에 체크아웃을 하고 걸어서 bus sur로 갔다.

12:30차를 타고 나탈레스로 향하게 되는데 가서 환전, 장비대여, 버스를 예약해야 한다. 출발까지 한 시간 남았는데 좀 심심하던 차에 버스정거장에서 세계를 여행하고 있다는 우리나라 60대 중년 아저씨를 만났다. 본인은 이제 은퇴하고 여행을 다니는데, 관절이 조금이라도 좋을 때 많이 다녀야 한다며 후련하기도 하고 시원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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