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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뮤하뮤 Jun 04. 2024

인도짜이 그거 맛있습니까(1)

누가 그랬는가 이십 대에는 인도에 가야 한다고

 나는 아직도 가끔 그때 꿈을 꾼다. 꿈과 현실에 은하수처럼 흐르던 환상적인 음악 소리

높낮이가 다른 리드미컬한 타악기 소리와 펑펑 터지던 폭죽 소리(혹시 총성인 걸까?)에 소스라치게 놀라 눈을 떴다. 맞은편 침대에는 모르는 여자애가 누워 코를 골며 자고 있다.

잠시 어리둥절했다가 곧 황홀해졌다. 아 맞다. 여기 인도였지. 나지막하게 웃으면서 다시 잠으로 들어갔다.

2007년 1월의 델리는 아주 서늘하고 개가 많고, 지저분하고 사랑스러웠다.


 해가 넘어간 저녁 8시, 어두운 거리는 작고 알록달록한 차들이 매연을 내뿜으며 희미한 불을 밝힌다. 길바닥에는 찌그러진 짜이잔 들과 과자봉지 같은 것들이 바람에 부스럭대며 나뒹군다.

20대에는 인도에 가는 게 맞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나는 어리숙한 여행자의 모습으로 델리 공항에 멀뚱히 서 있다가 내 또래의 여자애 J를 만났다. 우리는 델리에서 방을 셰어하고 일정은 따로 움직이기로 했다. 긴 비행에 지쳐 간신히 통성명만 하고 차가운 침대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나는 일찍 일어나 델리 기차역으로 갔다. 니자무딘이라는 역에서 우다이푸르로 가는 표를 사고 짜이를 한잔 마시는 것이 오늘의 목표다.


 허리가 굽은 사람은 싸리나무 같은 걸 엉성하게 끈으로 묶은 도구로 흙바닥을 연신 비질하고 있다. 도구는 많이 사용했는지 한쪽 면으로 경사가 져 있다.

소똥 냄새와 자동차 매연 냄새, 무언가를 태워대는 매캐한 연기 속에서도 우유와 홍차를 끓이는 구수하고 향긋한 냄새가 코를 찔러온다. 짜이를 파는 리어카 노점에 작은 체구에 콧수염을 기른 세 명의 사람이 짜이를 마시며 일제히 나를 쳐다본다.

“짜이 하나 주세요.”

짜이 장수는 커다란 통에서 마녀 수프처럼 걸쭉하게 끓고 있는 짜이를 얇은 플라스틱 잔에 담아주었다.

힘 조절을 못 했는지 얇은 잔을 받다가 짜이가 3분의 1 가량 손에 흘러내렸다. 뜨겁다. 플라스틱이 짜이에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짜이가 아니라 용암같이 흘러내리는 플라스틱과 우유를 마시고 있는 걸까.

콧수염 삼총사는 내가 어설프게 손과 혀를 데면서 겨우 짜이를 마시고 골목을 떠나갈 때까지 나를 응시한다. 내가 점이 되어 사라질 때까지 끈질기게 따라붙는 시선들, 인도에선 이 시선에 익숙해져야 했다.


 잔디밭이 앉아 잠시 휴식을 취한다. 거리의 소란함과는 다른 세상이다. 간디 기념 박물관에서 잠시 평화를 느끼려고 했지만 왜인지 그곳에서 평화를 찾기는 어려웠다. Jama masjid라는 모스크에 들렀다. 목 뒤쪽이 분홍색과 은빛으로 빛나던 비둘기 떼는 엄청난 군락을 이루며 모스크를 자기네들 안방으로 사용했다.

 

 별 기대 없이 Chandni chowk으로 가봤다. 엄청나게 혼란스러운 광경 속에서 그래도 맛있는 탈리를 먹었다(탈리는 밥과 로티플을 기본으로 달, 카레, 다히 등으로 구성된 인도의 백반정식 같은 거다). 배불리 먹고 숙소로 돌아와 씻고 티브이를 보았다. 길에서는 여자를 별로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춤추고 노래하는 여자들이 다 티브이에 있었다. 길에서 만났던 소년들이 생각났다. 수줍지만 호기심으로 빛나는 눈으로 웃음 짓는 소년들, 공원에서 크리켓 하기, 자주색 스웨터로 된 교복을 입고 하교하기, 소녀들은 어디에 있을까?


 델리에서의 세 번째 밤이 지났다. 나는 J에게 인사를 하고 짐을 꾸려 아침에 릭샤(단거리 교통수단)를 타고 니자무딘역으로 갔다. 기차 출발시간까지 시간이 많이 있기에 후마윤의 묘를 방문했다. 여학생들이 어디 있나 했더니 여기에 다 있었네.

재기 발랄한 여학생들이 호기심 가득한 눈초리로 바라보더니 용감한 몇 명은 같이 사진을 찍자고 졸랐다.

말 없는 여행자는 우주 대스타가 되어 잠시 인생에 없는 인기를 누렸다. 여학생들과 헤어져 이리저리 걸었다. 시계가 없는 탓에 내 안의 시간 감각만을 믿고 다시 역으로 돌아왔다. 아직 4시이다. 기차는 7시에 떠난다.

별로 하고 싶은 것도 없어서 3시간을 배낭에 앉아서 암소를 바라봤다. 흙바닥에는 뽀얗게 먼지가 피어오르는데 거대하고 하얀 암소는 길 한가운데 앉아서 턱을 움직이며 되새김질하고 있다. 소가 되새김질하는 소리가 생각보다 너무 커서 깜짝 놀랐다(다른 위에서 음식을 가지고 올 때 나는 소리 같은데 그 소리가 진짜 크다).


 드디어 기차에 탈 수 있었다. 기차 안도 추운 건 마찬가지였다. 옷을 왜 이렇게 조금만 가져왔을까 자책하며 답답한 공기를 들이쉬며 잠을 청했다. 일어나 보니 우다이푸르에 아침 9시경에 도착했다.

역에서 비슷한 또래의 남자애들을 만났다. 자기들이 봐둔 숙소가 있다길래 쭐레쭐레 릭샤를 타고 같이 왔다. 한 명이 숙소 가격을 흥정하고 있는데 갑자기 한국말이 갑갑하게 느껴진다. 나는 뒤로 돌아 다른 숙소로 갔다. (미안하다. 그때 내가 릭샤 나눠 탄 값 14루피 떼먹어버렸다.)

우다이푸르는 정신없던 델리와는 사뭇 다르다. 조용하다. 공기도 조금 더 맑다. 여자와 아이들은 웃으면서 다람쥐와 원숭이에게 먹이를 줬다. 숙소를 잡자마자 그 집 옥상에 올라가 동네를 굽어봤다. 그리고 티셔츠와 바지를 대충 물로 조물조물한 다음 빨랫줄에 널었다.


 우다이푸르에서 첫날밤이 지났다. 침낭 속에서 덜덜 떨며 잤지만, 아침 즈음에는 내 체온으로 데워진 침낭에서 오줌보가 터질 때까지 누워서 버텼다. 느지막이 일어나 옥상에 올라와 동네를 감상한다. 호수를 낀 도시라 아침에는 제법 안개가 낀다. 소나 염소들이 개와 몸을 붙이고 잠을 자는 모습과 돗자리에 앉아 긴 머리를 풀어헤치고 해를 쬐는 두 여인네를 봤다.

해는 참 공평하게도 내리쬔다고 생각한다. 멍하니 서 있는 당나귀에게, 머리로 문을 밀고 집으로 들어가는 소에게, 그림처럼 누워만 있는 개에게, 맨발로 돌아다니는 사람들에게, 죽은 강아지에게, 귀찮게 따라붙는 파리에게, 그리고 나에게도


다음날 짜이 한잔을 마시며 사과를 먹고 오늘 일정을 시작한다. 오늘의 일정은 상당히 빡빡하다. 릭샤를 타고 나가 영화관에서 발리우드 영화를 보고 호숫가에서 엽서를 쓰는 것. 나는 길치인 데다 GPS가 없으니

조리를 신고 길을 헤매느라 엄지발가락과 검지발가락이 떨어져 나갈 것 같다. 성공적으로 두 가지 미션을 마쳤다.

 

 며칠을 혼자 있으니 심심해졌다. 3~4시면 컴컴해지는 이곳에는 밤이 없다. 밤은 있는데 밤에 뭘 할 수가 없으니, 밤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요즘 한국에는 밤은 있으나 아주 훤한 가로등과 각종 조명 때문에 밤이 없지 않은가. 6시 이후에는 정말 길이 하나도 안 보이니 숙소에 틀어박혀 어딜 나갈 수가 없다. 하도 말을 안 해서 입에 사막이 생긴 것 같다(괜히 도망쳤네!)

저녁에 할 일이 없으면 거실에서 민박집주인 어머니랑 흑백 티브이(무려 흑백!)를 봤다.

티브이에서 흘러나오는 흑백 영상을 보면서

 ‘세상에, 저건 며느리가 잘못했네, 저런, 김치(카레) 싸대기 날아가나요?‘

라며 아침드라마용 추임새를 넣으면 민박집주인 어머니는 웃는 얼굴로 고개를 좌우로 흔들거렸다(인도에서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면 예스라는 뜻이다).

옆에서는 애들이 떠들면서 뛰어다녔다. 손주가 딸 둘, 아들 둘로 4명인데 나만 보면 놀아달라, 펜을 달라 떼를 썼다. 8학년인 큰딸은 쑥스러워하며 자기 수학 교과서를 보여줬는데 상당히 어려웠다. 나는 이 집에서 집밥을 먹으면서 편안하게 쉬었지만, 화장실이 공용이라는 단점을 견디기가 점점 어려워졌다.


 다음날 근처에 있는 숙소로 옮겼다. 오늘의 스케줄은 어제 쓴 엽서를 한국으로 부치고, 시티팰리스와 보트 투어를 하는 것이다. 점심은 빵과 짜이로 때웠다. 리조트 호텔에서 진행하는 보트 투어는 나 빼고 다 부자처럼 보였다. 배가 별로 흔들리지도 않는 것 같은데 아까 마신 짜이가 올라오는 느낌이다 (뱃멀미인가 싶었지만, 그 후 10년이 넘게 지나서야 알게 된 사실은 나는 유당불내증이 있다는 것이다. 어쩐지 짜이를 먹을 때마다 울렁거리고 머리가 어지러워지더라.)

저그먼디르 아일랜드에 잠시 들러 호수를 바라봤지만 이제 벌써 경치에 감흥이 사라진다.


 나는 ‘퀸스헤븐’이라는 숙소 겸 식당에 가서 저녁을 먹을까 했다.(나오면서는 후회했지만).

마늘과 생강 비리야니(향신료와 식재료를 쌀과 함께 찐 인도 요리), 라이스 푸딩을 주문했는데 기대와 달리 내가 먹기 힘든 맛이었다. 잔뜩 실망한 채 밖으로 나왔는데 7시쯤인데도 동네가 이미 깜깜해졌다.

사람들은 끼익 소리를 내며 문을 닫고 집으로 들어가서 헛기침을 한다. 굴뚝에서는 저녁 요리를 마치는 연기가 났으며, 종일 동네를 신나게 돌아다닌 개들이 처마 밑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아까 말했듯이 나는 길치다. GPS도 없다(사실 지도도 엄청 못 본다). 이 식당과 내가 묵는 숙소의 거리는 아마 3분 내외일 텐데 어딘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는다. 하늘을 보니 벌써 별이 하얗게 쏟아진다. 나는 그때 엄청난 외로움을 느꼈다. 이 지구상에서 내가 문을 닫고 들어가야 하는 내 집은 어디일까?


(아니 그보다는 오늘 밤 숙소를 찾아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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