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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뮤하뮤 May 14. 2024

꼬말라 투투의 정원

발리에서의 추-엌

나는 맨발로 머리카락에서 뚝뚝 떨어지는 소금물을 훔치며 뜨거운 아스팔트를 밟아 숙소로 돌아왔다. 배가 고프다. 숙소 주인이 방금 호수로 물을 줬는지 키가 크고 잎사귀가 넓은 열대식물에 맺힌 물방울이 싱그럽다. 정원 한구석에 높게 달린 샤워기 손잡이 레버를 내려 소금물과 모래를 씻어냈다. 시원하게 쏟아져 내려오는 물이 여기저기 튀고 입술에 닿은 물맛이 싱겁다. 맨발에 닿은 잔디의 감촉이 뻣뻣하면서도 부드럽다. 이국적인 향냄새가 나는 걸 보니 공양하는 시간인가 보다. 향을 피우고 꽃을 바치느라 분주하게 자전거를 타고 넓은 숙소를 돌아다니는 주인이 보인다. 만원이면 하룻밤을 묵을 수 있는 이곳, 발리 꾸따해변이 걸어서 7분인 꼬말라 투투에서 2015년 여름을 보냈다.


“발등까지 자외선 차단제를 꼼꼼하게 바르지 않으면 큰일 납니다. 여기 태양은 무시무시하거든요.” 스틱형 자외선 차단제를 사러 들른 가게에서 점원이 참견한다. ‘네. 끝내주게 태양이 쨍쨍하네요.’ 속으로 대답하며 나무 그늘에 앉아 자외선 차단제를 바르고 끈질기게 달라붙는 택시를 피해 해변에 나가 하릴없이 해질 때까지 앉아있다.

밤에도 딱히 할 일이 없어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지만, 잠자리가 바뀌니 잠이 잘 안 온다. 겨우 잠들었나 싶었는데 수탉이 폭죽 같은 소리를 내며 운다. 새벽 네 시다. 다섯 시가 되자 정원에 새들과 닭들이 몸단장하고 먹이를 먹고 노래하느라 분주하다. 나는 이 정원이 마음에 든다.


 보드를 들고 바다에 나가 스트레칭을 했다. 코끝에서 날고 있는 박쥐들 때문에 어지러워하면서 해변을 따라 조깅하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해변 가까이에서 거세게 깨지는 흰 파도에 귀싸대기를 맞고 검은 모래에 처박히면서 강사가 밀어주는 보드 위에서 서보려고 애쓴다. 만신창이가 되어 숙소 식당으로 가니 긴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은 식당 직원이 다정하게 웃으며 “살라맛 빠기" 하며 아침 인사를 건넨다. 아침으로는 식빵에 치즈를 끼운 것과 파파야 세 조각이랑 커피가 나왔다. 입으로 식빵과 과일을 바삐 욱여넣으며 눈으로는 구구구 가슴을 부풀리며 돌아다니는 새들을 쫓는다. 하얗고 커다랗게 피어있는 이름 모를 꽃들에서 나는 향기가 왠지 설렌다.


 낮은 너무 더워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방으로 들어가 책을 몇 페이지 뒤적거렸다. 깜빡 잠이 들었다가 허기가 몹시 져서 일어났다. 창을 보니 뜨겁게 작열하던 태양이 한풀 꺾인 것 같다. 나는 조리를 신고 먹이활동을 하러 나간다.

 검은 눈동자의 키 작은 남자가 그릴에 연신 부채질하면서 가지를 야무지게 굽는다. 매캐하면서 마늘 향이 첨가된 연기가 좁은 골목이 가득 찬다. 숙소에서 해변으로 나가는 길에 있는 이 작은 음식점에서는 뭘 매일 그렇게 구워대는지, 오늘은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잔뜩 기대하며 오징어볶음을 주문했다. 잠시 뒤 빨간 기름이 흐르는 구운 가지와 오징어를 기다란 풋콩과 함께 기름종이를 받친 종이상자에 담아준다.


 숙소 라운지에 앉아서(라운지라 해봤자 하얀색 타일이 깔린 바닥에 좌식 탁자와 오래된 티브이와 방석이 몇 개 놓여있다.) 선풍기로 더운 바람을 쐬며 그나마 시원한 타일의 감촉을 느낀다. 봉지를 부스럭대며 음식을 꺼내 오동통한 오징어 하나를 집어서 입에 넣고 있는데 서핑을 마친 서퍼들이 하나둘씩 돌아온다. 이 숙소에 머문 지 일주일이 넘어가니 제법 익숙한 얼굴들이 보인다. 오징어와 가지를 거의 집어 먹고 풋콩을 씹고 있는데 다카시라는 일본 친구가 젖은 머리를 대충 털어 말리고 발리 전통주 아락과 치킨 꼬치를 가지고 와 옆에 앉는다.


 서로의 먹을거리에 대해서 몇 마디 주고받은 후 오늘 각자의 서핑에 관해 이야기한다.

“오늘 서핑은 어땠냐?”

“서핑? 오전 내내 파도와 힘겹게 싸우느라 지쳤다. 소금물과 모래를 옷 사이사이에 가득 담고 숙소로 돌아온 게 다다. 이것도 서핑이라 말할 수 있을까?”

“당연히 서핑이다.”

“너의 서핑은 어땠냐?”

“바람이 많이 불고 파도가 지저분했다. 좋은 파도를 기다리느라 추웠으며 몇 개 괜찮은 걸 잡아타고 오늘 서핑을 끝냈다.”


 콧수염이 희끗희끗하고 키가 상당히 큰 레오라는 프랑스 친구는 정강이에 붕대를 엉성하게 감고 방석에 누워 티브이를 보다 우리 대화에 슬쩍 끼어든다.

“내일 파도는 클 거야. 아마 몇 피트 이상? (정확한 수치가 기억 안 난다. 아무튼 큰 파도)”

“오, 내일 기대되는군”, “오, 내일은 서핑 못하겠군.” 상반된 반응으로 동시에 대답한다.


 검게 그을린 노란 옥수수구이를 하나 사서 해변으로 가 낙조를 감상한다. 주말이라 그런지 선셋을 보러 온 로컬들과 관광객이 뒤섞여 북적북적한다. 하늘하늘한 이브닝드레스를 입고 기다란 머플러를 하늘로 날리며 포즈를 잡는 진한 화장의 여자들을 본다. 아이들은 모래성을 쌓으며 모래밭을 뒹굴고 엄마는 아이들의 어린 시절을 기록하느라 여념이 없다. 간질간질한 긴장감이 느껴지는 커플들이 손에 깍지를 끼고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씩 웃는다. 빨간 해가 거의 바다 끝으로 넘어가고 어둠이 조금씩 내린다. 친구들은 거의 매달리다시피 서로 어깨를 걸고 모래를 발로 차며 소리를 지른다. 머리카락이 흰 모래알처럼 하얗고 등이 구부정한 노부부도 양말에 샌들을 신고 노을이 지는 바다를 바라본다.


 벌써 이 숙소에 머문 지 3주가 되어간다. 이제 떠날 때가 됐다. 한없이 늘어지는 몸을 추스르고 그동안 늘어놨던 자잘한 짐을 꾸리고 트라왕간으로 가는 차를 예약했다. 다음 날 아침 약속한 시각에 여행사 직원이 픽업을 나왔다. 정들었던 꼬말라 투투의 정원을 한번 둘러보고 봉고에 타려고 하는데 오토바이가 한 대가 내 앞에 섰다. 다카시다. 작별 인사를 건네는데 레오도 오토바이를 타고 들어와 오른쪽으로 조금 비켜선다. 우리는 뜨거운 발리의 태양 아래 잠시 삼각형으로 대형을 이루고 서있는다. 더운 바람이 불어와 소금물에 탈색된 머리카락이 벌겋게 그은 세 명의 얼굴에 아무렇게나 흔들거린다. 여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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