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쟁이는 아닙니다?
낯선 장소에서의 하루는 매우 길다.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서 조식을 먹고 여행 준비를 시작한다.(나는 아침을 꼭 먹어야 하는 종류의 사람이다.) 아침부터 부지런히 돌아다니고 사진을 찍는다. 근처 맛집을 찾아가 점심을 먹고 예쁜 카페도 들린다. 카페에 쉬면서 인스타에 여행 사진을 올린다. 쉬고 나면 다시 부지런히 다음 일정에 나선다. 마사지를 받기도 하고, 물놀이를 하기도 하고, 관광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하루 여행이 끝날 때쯤, 저녁과 함께 맥주를 한잔 마신다. 혹은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편의점에서 맥주와 간단한 안주를 사서 숙소에서 맥주를 한잔 마신다. 맥주를 들이켜면서 생각한다. 아 이 맛에 여행을 하지!
언제부터인가 하루 여행의 마무리는 술이 담당했다. 국내여행, 해외여행 할 것 없이 여행의 완성은 술로 마무리되었다. 과음을 한 것은 아니지만, 여행 기간 내내 음주가 지속되긴 했다. 3박 이면 3일, 4박 이면 4일 거의 매일을 최소 맥주 한 캔 정도를 마시게 된다. 마치 내가 술쟁이처럼 느껴지는 부분이지만, 여행은 마치 모든 일정이 주말과 같은 느낌이 들어서 음주를 포기하기 어렵다.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술맛을 아는 어른이 되었던가.
여행지에서 가장 접하기 쉬우면서 손이 가는 주종은 아무래도 맥주이다. 맥주는 술이지만 뭔가 시원한 음료 같은 역할도 하기 때문이다. 특히 그 특유의 시원한 탄산감에 하루의 피로를 풀어준다. 게다가 대부분의 나라에는 자신들 나라의 맥주가 있을 만큼 맥주는 대중적인 주류이다. 일본에 가면 일본 맥주가 있고, 유럽에 가면 각 나라마다 양조장에서 만든 맥주들이 있다. 동남아 태국, 베트남에 가도 대표적인 맥주가 있다. 그래서인지 어느 나라를 가도 쉽게 구하고 쉽게 마실 수 있다. 게다가 여행지에서 그 나라의 맥주를 먹으면 왜 이 맛이 우리나라에 없지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맛있다.
베트남 다낭에 가족 여행 갔을 때 하루의 마무리는 언제나 타이거 맥주였다. 사실 마무리뿐만 아니라 점심부터 우리의 식탁을 책임졌다. 다른 동남아처럼 이곳에서도 얼음이 담긴 컵에 맥주를 따라 마신다. 타이거맥주는 우리나라에서 쉽게 접하는 라거의 일종인데, 쓴 맛도 없고 가볍기에 얼음에 따라 마시면 더욱더 시원하게 즐길 수 있다. 이 시원함이 더운 나라에서 고생했던 힘듦을 해소시켜 준다. 사실 얼음에 탄 맥주를 한국에서 마신다면 밍밍하다고 먹지 않았을 것이다.
여행 중 만난 맥주 중 가장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맥주라 하면, 프라하에서 만난 흑맥주 일 것이다. 잊을 수 없다고 하기에는 그 브랜드며 맥주명도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의 충격을 잊지 못한다. 한국에서 맥주라고는 라거밖에 먹어보지 못한 우리에게는 이렇게 맛있는 맥주가 있구나 하는 충격을 주었다.(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편의점에서 세계 다양한 맥주가 대중화되기 전이었다.) 게하 사장님이 추천한 식당에서 슈티첼과 함께 추천받은 흑맥주를 시켰다. 맛있는 고기와 함께 곁들이는 흑맥주. 맥주는 단지 시원한 무엇인가로만 여겼는데, 맥주의 맛이란 게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고 나서 마트에서 사 와서 숙소에서 즐긴 캔맥주까지, 아직까지도 우리에게 프라하는 맥주가 맛있는 도시로 기억된다. 그 맥주가 어떤 것인지 기억은 안 나지만.
국내여행에서의 주종은 대부분 소주로 귀결된다. 맥주로 시작하여도, 혹은 맥주로 마무리해도 음주의 중심에는 소주가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국내 여행에서 만나는 음식들이 대부분 소주와 어울린다. 제주도만 가더라도 흑돼지에 회까지, 누가 봐도 소주 안주이다. 특히 가족들이랑 간다면 저녁에는 무조건 소주를 먹게 된다.
어릴 적에는 소주를 왜 먹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맥주처럼 시원하지도 않고, 달달한 맛도 없고 그저 쓰기만 하는데 무슨 맛으로 먹는지 의문이었다. 하지만 삶이 깊어질수록 소주는 달아진다고 했던가. 게다가 한국의 음식들은 죄다 소주랑 어울리는 음식뿐이다.(그렇게 느껴지는 걸 보니 술쟁이인가?) 예전에는 부모님이 마시면 한두 잔 마시던 것이 어느새 혼자 여행을 가더라도 회에 소주 한잔을 걸치고 있다. 이제는 해외여행을 갈 때 팩 소주를 챙겨가는 어른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다음 해외여행지에 나도 챙겨갈 예정이다. 컵라면과 소주 한잔!) 맥주로 마무리한 여행과 다르게 소주로 마무리한 여행은 헤롱헤롱 한 채 하루를 마무리하게 된다.
최근에 먹기 시작한 주종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위스키이다. 갑자기 국내에 위스키와 하이볼이 유행하게 되면서, 위스키는 예전에 비해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그럼에도 바 같은 곳에서 위스키를 마음껏 먹기에는 가성비가 떨어진다. 그래서 여행을 갈 때 코스트코 같은 마트에서 위스키를 한 병 사 가져간다.
위스키를 즐긴다고 하지만 주로 내가 마시는 방법은 하이볼이다. 가족들과 여행을 갔을 때는 보통 동생이 위스키를 가져와서 하이볼을 만들어 줬다. 나는 그냥 만들어 주는 것만 홀짝홀짝 마시고 즐겼다. 그러다가 친구들과 제주도 여행을 갔을 때 내 스스로 하이볼을 만들어 먹게 되었다. 동생이 만들어 줄 때는 소주잔 등으로 개량해서 만들어 줬지만 나는 귀찮아서 개량을 무시하고 컵에다가 콸콸 위스키를 부어서 하이볼을 만들었다. 아무 생각 없이 하이볼을 만들다 보니 위스키와 토닉워터가 거의 1:1로 섞였다. 숙소에서 하루를 마무리하는 시간이라 긴장감도 없었고, 심지어 맛도 좋아서 하이볼을 마치 맥주 마시듯이 마셨다. 결국 나에게 온 것은 엄청난 숙취. 다음날 차를 타고 식당에 갔지만 음식은 하나도 먹지 못하고 숙취해소제만 먹어야 했다. 그 이후의 여행을 진행하는데 너무 힘들었다. 그때 여행에서의 음주에 대해 처음으로 후회했다. 적당히 마시지 못하면 여행을 망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어야 했는데. 음주는 적당히 하자는 교훈을 준 여행으로 강렬하게 기억되었다.
그렇지만 역시나 가벼운 음주는 여행을 즐겁게 해주는 요소이다. 특히 해외를 갔을 때 그 나라의 주류를 먹어보는 것은 하나의 재미이다. 앞선 여행에서 안 나온 주종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와인이다. 와인은 앞으로의 여행에서 먹어볼 예정이다. 올해 계획된 여행의 목적지가 유럽이니까! 우리나라보다 훨씬 저렴하고 다양한 와인을 매 식사마다 즐겨야지! 적당한 음주로 취하지 않을 정도로만. 물처럼 와인을 마시는 여행이 기다려진다.(저는 지금 취한 게 아닙니다. 술에 관한 이야기를 썼더니 술 냄새가 나는 글이 되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