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나 Feb 08. 2024

시선집 - 마흔, 사랑하는 법이 다르다.

주병률시인이 엮은 시선집.

출판 등록이 2011년인 10년이 넘은 시집이다. 중고서점 구석진 곳에서 발견하여 냉큼 집어들었다. 제목도 마음에 들었고.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해본다. 마흔이라고 사랑하는 법이 다를까? 10년전엔 마흔이 어른이었을까? 난 아직 어른이 아닌데. 나이와 세월은 나를 비껴가지 않는데, 내 안의 자아는 언젠가부터 멈춰 있는 것 같다. 심장은 아직 이렇게 뛰는데, 더 많은 것을 배우고자 하는 열망 또한 젊은 시절과 다를 바 없는 내가, 인생의 반을 살아온것이다.


길다면 긴 시간을 내 몸과 함께 보낸것 같다. 사용한 만큼 몸은 반응한다. 가끔 일어날때 무릎에서 소리가 나기도 하고, 어제는 누워서 핸드폰을 보는데 나도 모르게 조금씩 가시거리가 멀어진다. 약이 올라서 일부러 가까운곳에 핸드폰을 놓고 촛점을 맞추려 오기를 부려봤지만 허사였다.


그래서 시집을 읽기 시작했다. 다 읽고나면 나의 사랑은 좀더 나아질까, 성숙해질까 기대하는 마음으로.

혹은 나와 다른 마흔들은 마음의 파동을 어떻게 다스리고 살까 궁금하여.


# 마흔

             -권영준-

잡지를 사니

별책부록이 딸려왔다

부록은 볼것이 없어

찢어

아궁이에 넣었다

비로소 생의 윗목으로 불길이 번져간다.



# 강가에서

                - 윤제림-


처음엔 이렇게 썼다


다 잊으니까 꽃도 핀다

다 잊으니까, 강물도 저렇게

천천히 흐른다.


틀렸다. 이제 다시 쓴다


아무것도 못 잊으니까 꽃도 핀다

아무것도 못 잊으니까,

강물도 저렇게

시퍼렇게 흐른다.



# 한 잎의 여자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그만 여자, 그 한잎의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잎의 맑음, 그 한잎의 영혼, 그 한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정말로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여자만을 가진여자, 여자 아닌것은 아무것도 안 가진 여자, 여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여자, 눈물 같은  여자, 슬픔 같은 여자, 병신같은 여자, 시집 같은 여자,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여자, 그래서 불행한 여자.


그러나 누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여자, 물푸레나무 그림자 같은 슬픈 여자.



# 사랑니


푸른 빛의 진통제는 무슨 나무 열매 같습니다

통증의 뿌리가 얼마나 깊기에 이런 알약이 생겼을까요

달갑지 않아도 삼켜야하는 우울한 처방은

얼마나 오래된 자학인지요

차츰 증세가 가라앉는 사이 누렇게 달뜬 가을나무를 바라봅니다

저 나무도 통증을 견디고 있을 것만 같습니다

알게 된지 꽤 되었지만 도통 속내를 알 수 없고

한참을 올려보아도 묵묵부답인 명상을 방해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나무의 진통제는 아마도 바람이거나 달덩어리라고 짐작하지만

그래서 서늘해지거나 심킨 달을 반쯤 토해내기도 하지만

겨울로 가는 부작용은 심한 모양입니다

아픔을 지우려면 순리를 가장하여 다 내려놔야 한다고

떠나보내기 위해 모든 통각을 마비시켜야한다고

비명도 없이 마른 잎을 끊어버리는 나무는 믿고 있습니다

언제고 통증은 재발할 것입니다

어떤 곤욕을 치렀는지에 대한 기억이 생생하므로

진통제는 눈에 잘 띄는 곳에 모셔두었습니다

이맘때는 늘 바람이 불고 달이 밝습니다

아직은 느껴지지 않습니다.



# 당나귀


터덕터덕 걸었을 뿐이다

모래바람 따라 그랫던 건 아니다

보리가 살갗에 닿는 쓰라림 같은 것

그렇게 하늘 끝을 향해 걸어갔다

차도르를 걸친 채 외줄을 탔다

그때부터 귀향지를 생각했다

도랑창에서 잠을 자다 일어나면

귓구멍에 개미가 한가득 기어 다녔다

우주의 날씨는 늘 맑은 것처럼

무더위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나는 뒤채는 모래처럼

한알의 몸, 한 숨의 잠이었을까

사랑을 배운 죄로

이 넓은 광야를 걷고 있는 것일까

이슬의 영롱함과 풀잎의 생명이

더 맑다고 얘기하고 싶은데

자꾸 과거만 투명하게 보인다

뼈와 살이 풍화되는 겨울 저녁

아무도 나의 고향을 말해주지 않았다

아무도 나의 노래를 들어주지 않았다

어느 마구간 구유에 입을 넣고

소리없이 여물만 삼켰다

나는 원래 들판의 아들이었지

아름다운 황혼은 뱃속에 숨겨두고

퀭한 눈으로 터벅터벅 걸었다

이제는 도식의 골목을 기웃거리며

킁킁 냄새나 맡으며

예술을 아는 척 피카소전엘 간다

어깨 구부정한 늙은 포유류가 저기 보인다



# 갈대로 사는 법


그와의

이별은 가벼움으로 격해지는 것

비밀을 묻을 데 없어

가릴 것 없는 갈대로 사는 것

고요에도 뼈가 있다면

뼈처럼 사는 것


그해

습지 모퉁이에서 피를 다 쏟았다

꿇을까봐 아예 무릎을 없앴다

더 줄일 수 없는

가느다란 비밀만 남겼다

가끔

이별할 듯한 연이들이 찾아와 허옇게 피를 말리고 갈 때

아홉번쯤 일어나 이빨없는 치를 떨었다

갈대속에서 세상이 흔들렸다


# 이별뒤에 남는 것이 사랑이다. 역설이다. 수많은 밤을 뒤척이면서 고통과 좌절을 통해 알아가는 것도 사랑이다. 이 또한 역설이다. 이별은 습지 모퉁이에서 피를 다 쏟을 만큼 처절하고 이빨없이 치를 떨 만큼 아프고 고통스러운 일이다. 이별의 아픔은 또한 무릎을 꿇을까봐 아예 무릎까지도 없애야 겠다는 다짐을 하게도 한다. 갈대속에서 세상이 흔들리는 일이다. 그러나 이별이 없이 어떻게 사랑을 알것이며, 고통이 없이 어떻게 아름다움을 알까. 바닥에서 처절하게 흔들려본 사람만이 고요한 정적의 평화로움도 안다.

매거진의 이전글 조지오웰 -1984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