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를 잃어야만 그립다
학창 시절, 가장 좋아하던 시간은 국어시간이었다. 수업시간 중에 내가 좋아하는 글들도 잔뜩 읽을 수 있고, 나 혼자라면 알지 못했을 깊은 뜻들도 알게 되니 그야말로 금상첨화였다. 뜻을 모르고 읽는 것과 시인이나 작가의 삶과 가치관, 당시 시대 상황을 배우고 읽으면 이해할 수 있는 깊이가 달라졌다. 단순한 겉만 보는 게 아니라 그 안에 화자가 진정으로 말하고 싶은 것들은 담아놓았다는 건 마치, 누군가가 오래전 땅에 묻어둔 타임캡슐을 발견하는 기분이었다. 그때 남겨놓은 것들이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어져, 그 사람들과 내가 교류할 수 있다는 것도 즐거움의 한 부분이다.
나는 우리나라의 주입식 교육에 아주 철저하게 세뇌되었기에 풀은 민중이요, 바람은 억압이요, 별은 소망이라는 것에 의문을 품지 않았지만 '고향'만은 납득할 수가 없었다. 일제강점기가 아니더라도 돌아가지 못하는 곳의 고향이나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의 고향에 대해 노래하는 시들이 많았다. 나에게는 누구보다도 분명히 뿌리내린 고향이 있었지만 본래 인간이란 가까이 있을수록 소중함을 알지 못하는 법이다. 평생을 나고 자란, 지금도 발 딛고 있는 창원은 고향이 아니었다.
고향의 사전적 정의는 다음과 같다.
1. 자기가 태어나서 자란 곳
2. 조상 대대로 살아온 곳
3. 마음속에 깊이 간직한 그립고 정든 곳
조상은커녕 우리 아빠만 해도 대전에서 태어나 경상도 사투리를 쓰지 않는 충청도 사람이니 2번은 전혀 무관했다. 나에게 해당될 수 있는 건 1, 3번뿐인데 1번은 심리적이거나 주관적인 부분이 아닌 객관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기에 이미 해당되었고 3번이 관건이었다.
대부분의 이들이 부르는 고향은 or 이 아니라 and의 개념이었다. 정말 하다못해 자기가 태어나 자란 곳이 아니라면 마음속 깊이 간직한 그립고 정든 곳이었다. 1번보다는 3번이 우선시 되었다.
고향이 그리울 수가 있나. 당시 나에게 창원은 지긋지긋한 동네였다. 좋은데 지겨웠다. 집 밖을 나가면 항상 아는 사람들이 있어 편히 다닐 수 없고 집에는 언제나 가족들이 있어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없다. 아무도 나를 찾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가서 혼자 살고 싶었다.
당연했다. 고향을 그리워할 수 있는 건 고향에 반하는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고향에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거나 고향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거나. 고향의 그리움은 상실을 의미했다. 그립다는 건 무언가를 잃어서라는 말이 맞다. 우리는 고향에 슬픔을 느끼는 게 아니라 변해버린, 이제는 잃어버린 고향을 보고 슬픔을 느끼는 것이다.
지금 나는 고향이 그립다.
나에게도 완전히 대조되는 곳이 생겼다. 땅의 끝에서 끝까지, 대각선으로 반대로 위치한 서울이다. 이곳에 있으면 내 정신은 약해지고 자립심은 강해진다. 서울의 매력도 충분히 존재했다. 서울에서만 만날 수 있는 이들이 있었고 서울에서만 누릴 수 있는 혜택들이 있었다. 혼자서 의 시간도 마음껏 누릴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 모든 이점들이 없는 창원이 좋았다. 내가 나고 자라고 시간을 보낸 그곳이 좋았다.
팍팍한 창원을 맑고 아름다운 곳이라 여기게 된 것도 서울 생활에 지치게 된 이후부터였으니, 그때부터 창원은 나에게 있어 '고향'이 되었다.
나와 비슷한 처지의 친구에게 한탄을 했다. 딱 원망스러운 건 두 가지였다. 하나는 왜 우리의 부모님은 수도권에 살지 않았는지, 또 하나는 왜 우리 가족이 사이가 좋은지. 내 말에 친구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서울이 아니라도 수도권에서 나고 자랐다는 게 '축복'이라는 걸 모르는 아이들이 많았다. 서울의 땅값이나 재산이 중요한 게 아니다. 나를 이루고 있는 시간의 기반이 이곳에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워할 필요가 없는 상황이라는 게 얼마나 큰 행복인지를 왜 모를까? 가고 싶을 때 언제든지 갈 수 있다는 게, 언제라도 일이 생기면 달려올 수 있는 거리에 부모님이 있다는 게, 자신이 누리는 혜택이라는 걸 몰랐다.
이런 박탈감을 느낄 바에야 차라리 가족이 사이가 좋지 않았으면, 하고 막다른 생각을 할 때도 있었다. 부모님과 헤어지는 게 애틋하고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게 좋아 내 모든 것들을 포기하고 싶어지는 게 괴로웠다. 차라리 얼른 독립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만큼 사이가 안 좋았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것 같았다. 그래도 가족과의 사이가 좋았을 때의 따뜻함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런 생각들은 최대한 자중하려 했다.
나는 곧 고향으로 간다. 여름방학까지는 이곳에서 버티려 했는데 도저히 그러지 못하겠다. 창원에서는 온전한 나로 존재할 수 있지만 아직까지 서울에서는 나로서 존재하기 어렵다. 평생을 알아온 내가 아니다. 우리 강아지 좀 데리고 있으면 좋겠는데, 하고 몇 번이고 말하는 엄마를 뿌리칠 수 없다. 뿌리치고 싶지도 않다. 돌아오지 않을 스물셋, 21년의 여름이고, 돌아오지 못할 가족과의 시간이다. 나는 고향을 그리워하고 있다. 내가 보았던 수많은 화자들처럼 이렇게 글자로 고향을 부르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