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열음 Nov 25. 2020

사랑스러운 고통

아픔도 허전함도, 사랑 같아라


사랑을 할 때 되면 난다고 해서 사랑니라고 불리는 사랑니. 어릴 적엔 그게 꽤 낭만적으로 들렸었다. 사랑니가 나면 어른이 되는 걸까, 그때가 되면 난 정말 사랑을 하고 있을까? 사랑니라는 발음도 사랑스러웠다. 사랑이라는 말이 품은 따뜻함처럼 나는 사랑니도 분명 따뜻할 거라고 생각했다.     





내 사랑니는 뜻밖의 시간에 찾아왔다. 








고등학교 3학년, 밤이 짙었던 걸 보아 가을쯤이었다. 급식을 먹을 때만 해도 그렇게 아프지는 않았다. 오른쪽 구석이 아프긴 했는데 가끔 입 안을 씹어서 붓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에 그러려니 했다. 6시 30분, 야자의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리고 나서 고통은 점점 심해졌다.     





밖에서만큼은 공부를 해야 한다는 강한 의식에 사로잡혀 야자 할 때 딴짓을 한 적이 단 하루밖에 없던 나는 욱신거림을 참고 공부에 집중했다. 정확하게는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 고요한 시간에, 가끔 연필 소리나 책 넘기는 소리만 들려오는 그 시간에, 잇몸이 아파서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결국 책을 덮어두고 울면서 책상에 엎드렸다. 왼쪽 뺨을 인형-고3의 기본 필수템은 담요, 물, 간식, 그리고 베개로 쓸 수 있는 인형이다-을 배고 누웠다. 항상 피곤했기 때문에 그래도 잘 수 있었다.



          

야자 1교시가 끝나고 나서 학년실로 향했다. 그때는 좀 바보 같았던 게 진통제를 찾았으면 될 텐데 이가탄을 찾으러 갔었다. 여기에 무슨 일로 왔냐는 물음에 이가탄은 없어요? 하고 물었다. 



선생님과 같이 간 친구가 얼마나 웃었는 줄 모른다. 네 나이에 이가탄이 왜 필요하냐며 선생님은 우리를 교실로 돌려보냈다. 친구는 그럴 줄 알았다며 웃었지만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렇게나 아픈데. 고통 때문에 입을 다무는 것도 힘들었다. 





야자를 뺄까 고민도 됐지만 선생님께 뭐라고 말할 건가. 잇몸이 아파서 야자를 못하겠어요. 집에 가서도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이 시간에 병원을 갈 것도 아니고. 그래서 그저 교실로 돌아갔다.     







집에 갈 때쯤-한 시간 반이 더 지났을 때-에는 입도 못 다물었다. 가만히 있어도 살짝 눈물이 났다. 발음도 제대로 못하는 날보고 친구들은 조금 불쌍하게 여겼다. 집에 가니 엄마는 사랑니라고 이야기했다. 그러더니 사놓은 닭강정을 먹어보라며 건넸다.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었지만 이가 부딪히는 것도 괴로워서 하나밖에 먹지 못했다. 먹고 나서는 아파서 울었다. 엄마는 우는 날보고 주말에 병원에 가보자, 하고 말았다.           












사랑니의 다른 뜻으로는 사랑을 하는 것만큼 아파서 사랑니라는 속설이 있었다. 분명 사랑을 해본 누군가가 사랑니가 났을 때 그런 이름을 붙였겠지. 그 사람도 나만큼 아팠거나 아니면 나보다 더 아팠을 것이다. 




아팠던 시간이 반나절 정도였지만, 공감이 갔다. 사랑의 아픔과 사랑니의 아픔은 꽤 비슷했다. 



아픈 곳을 만질 수가 없는데 아팠다. 

아파본 적도 없는 곳이 아팠다. 

아픔의 크기는 불규칙적이었다. 

그리고 그 아픔에는 이유가 있다는 것까지. 



그래서 사랑닌가보다. 그 커다란 사랑니를 빼고 나서 통증은 마법처럼 없어졌다. 뽑고 나서도 한동안은 아팠다. 아픔이 가시고 나서는 입 안에 허전했다. 혀로 살짝 건드렸을 때, 통증을 주던 이빨은 사라지고 휑하게 비어서 잇몸만이 남아 있었다. 이상해. 하지만 아픔도, 이상함도 금세 잊혔다.





     

그 뒤로도 나는 세 개의 사랑니가 났고 두 개를 더 뽑았다. 처음 난 사랑니만큼 아프지는 않았지만 욱신거리는 것 때문에 아픈 쪽으로는 음식을 씹을 수 없었다. 그 사랑니들이 더 아파지기 전에 병원에 가서 뽑아버렸다. 우리 오늘 장 보러 갈까, 처럼 이 뽑으러 가야겠다고 볼을 지그시 눌렀다.      




아직도 내 입 안에는 하나의 사랑니가 남아있고 이상하게 이 녀석은 자라지가 않아서, 날 아프게 하지 않아서 내버려 두고 있다. 아마 이 녀석은 꽤 오래 버틸 것 같다. 또 사랑니가 자랄까?  


매거진의 이전글 살아있지 않은 것의 온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