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치의 만들기
정형외과에서 첫 번째 도수치료를 받기까지 약 2주가 걸린 탓에, 독일 병원 시스템의 심각성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독일에서 사람들이 아플 때 병원에 잘 안 가는 것이 이해가 되고, 한편으로는 만약에 갑자기 아프거나, 출근을 못해서 진단서를 제출해야 한다거나 하는 상황이 생기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시간이 있을 때 미리 Hausarzt (주치의)를 만들어놔야 한다던 다른 사람들의 조언이 떠올랐다.
집 주변에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있는 일반병원, 가정의학과 같은 개념의 General praxis, Gemeinschaftspraxis, Hausartz 등을 검색했다. 평점이 좋은 곳 위주로 3개를 추려서 전화를 걸었다. 통화 중이거나 받지 않는 경우도 많아서,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시간 간격을 두고 계속 전화해야만 했다. 어렵게 통화가 되었는데 다들 새로운 환자는 받지 않는단다. 환자를 받지 않는다는 개념이 너무 낯설어 주변에 물어봤더니 대부분 병원들이 기존에 등록이 되어있는 환자 위주로 진료를 하기 때문에, 새롭게 등록하는 게 쉽지 않단다. 그래도 사보험에 가입되어 있다고 먼저 말하면 받아주는 경우가 있다고. 독일에는 공보험과 사보험 2가지 의료보험이 있고, 공보험의 경우 나이가 들어도 비용이 많이 비싸지지 않아 좋고, 사보험의 경우에는 좀 더 보장 범위가 넓으나 나이가 들수록 보험료가 많이 올라간다고 한다. 사보험이 비싼 만큼 의사에게 돌아가는 것도 많은지 병원에서는 사보험을 선호한다고 한다. 하지만 한 번 사보험에 가입하게 되면 공보험으로 돌아오기가 어렵다고 해서 보험을 바꾸는 것은 고려하지 않았다.
이대로 포기할 수 없으니 다시 한번 병원을 추렸다. 홈페이지와 이메일 시스템이 잘 되어 있는 병원에는 전화를 하지 않고 메일을 남겼다. 주치의가 아직 없어서 새롭게 환자로 등록하고 싶다며, Impfbuch (혹은 Impfpass, Impfausweis)이라고 불리는 예방접종수첩을 만들고 싶다는 핑계를 댔다. 정말 놀랍게도 병원에서 하루 만에 메일로 답장을 보내주었고, 일주일 뒤 비어있는 시간으로 예약을 잡아주었다. 내가 만약 정말 아파서 주치의를 찾고 있는 상황이었다면 이미 다 낫고도 남을만한 기간.
어쨌든 병원에서는 친절하게 새로운 환자로 등록하는 절차를 밟아주었다. 의사가 문진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온 몸을 구석구석 살펴보고, 촉진하며 몸의 상태를 살펴보는 것은 신기한 경험이었다. 피부암에 대한 염려 때문인지 몸에 작은 반점 같은 것들이 있다면 언제부터 있었는지 일일이 확인하고, 팔을 굽혀보라거나 허리를 숙여보라는 등의 운동성도 확인했다. 독일에 와서 종종 손이나 종아리가 저리다는 것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더니 기후나 기압의 변화일 수 있다며 우선 마그네슘을 꾸준히 먹어보라고 했다. 좀 더 적극적인 방법으로는 혈액 테스트를 통해 몸 전체의 상태를 알아볼 수도 있지만, 만 35세 이상만 의료보험으로 커버가 되기 때문에 그다지 권하지는 않는다고. 예방접종수첩을 만들기 위해서는 어렸을 때 맞았던 홍역, 수두 등등의 횟수를 모두 알고 있어야만 해서 이 날은 접종을 하지 못했다. 엄마가 보관해둔 아기수첩 덕분에 일주일 뒤 다시 방문해서 예방접종 수첩을 만들고 누락된 예방접종을 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주치의가 생기니 괜히 마음의 큰 짐이 없어진 기분이었다.
그로부터 몇 달 후, 심한 감기에 걸렸다. 아마 한국에 있었다면 정상적으로 출근을 한 뒤, 점심시간에 병원에 가서 약을 받아왔겠지만, 굳이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바로 이런 날을 위해 미리 주치의를 만들어놓았으니. 감기에 걸려서 Krankmeldung (병가를 쓸 때 회사에 제출하는 일종의 진단서)가 필요하다고 병원에 전화를 걸었고, 다행히 그날 오후에 예약을 잡을 수 있었다. 독일은 아플 때 하루는 진단서 없이도 병가를 쓸 수 있는데, 감기에 걸려 병원에 가면 보통 약을 처방하는 것이 아니라 3일간 쉴 수 있는 진단서를 써준다. 나의 주치의는 3일 뒤에도 나아지지 않는다면 다시 병원에 오라며, 더 쉴 수 있도록 진단서를 써주겠다고 덧붙였다.
아플 때는 출근하지 말고 집에서 쉬어야 한다는 것, 단순 감기에는 약을 처방하지 않는 것, 긴급 상황을 제외하고는 예약 시스템으로 병원이 돌아간다는 것. 이런 다양한 측면들이 함께 상호작용 하며 독일의 의료 시스템이 돌아가고 있다. 무엇이 먼저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아프면 쉬어야 낫는다는 것은 참 당연한 진리이니. 그래도 언제든 예약 걱정 없이 병원에 갈 수 있다는 것과 아플 때는 출근을 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 중 하나만 가능하다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