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바람이 좋아 저녁 산책을 나갔다. 한여름 더위를 핑계로 한동안 잊고 지냈던 길이었다. 석양의 금가루가 숲 안을 가득 채우고, 솔솔 불어오는 바람에 기분이 너무 좋았다. 그래, 오늘은 이 기분 그대로, 숲길을 따라 끝까지 걸어보자. 그 길의 끝은 내가 아는 마을로 이어지는 대로일 테니. 발걸음은 자신만만했다. 내가 아는 길이고, 이미 여러 번 다녀본 길이고, 나는 그 길의 끝을 안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갑자기, 넓고 잘 닦인 숲속 산책로 옆으로 난 샛길 하나가 반짝거렸다. 그 빛에 홀린 듯, 잠깐만 들어갔다 오자는 생각으로 샛길에 발을 들였다. 그러다 정신을 차렸을 땐, 사방이 온통 비슷한 모양의 나무들뿐이었다. 어디가 어딘지 방향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 덜컥 겁이 났다. 해는 뉘엿뉘엿 저물어 갔다. 숲속의 해는 금방 떨어진다. 조금 전까지 그토록 황홀하던 석양은 마치 지옥으로 안내하는 문지기처럼 서늘하게 느껴졌다. 식은땀이 난다. 발은 이미 마음과 따로 놀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동동거리며 길을 찾기 바쁘다.
“멈춰.”
그때, 10년 가까이 다이빙을 하며 수백 명의 교육생에게 외쳤던 구호가 떠올랐다. 땅 위와는 달리 바닷속은 인간을 둘러싼 모든 방향이 열려 있다. 그래서 시야가 너무 깨끗한 심해에 있거나, 반대로 시야가 지독하게 안 좋을 때 인간은 방향 감각을 잃는다. 그런 상황이 오면, 다이버는 무작정 허둥대지 말고 일단 “멈추고, 생각하고, 행동하라”고 훈련받는다. 나는 그걸 오랫동안 가르쳤다.
그리고 다이빙을 하며 레퍼런스, 바로 기준점이나 참고물을 언제나 살피라고 가르친다. 정작 내가 비상 상황이 되니 그걸 못 하고 있었다. 머리로는 아는데 마음이 조급해지니 그걸 살필 겨를이 없었다.
‘지금 해가 지고 있고, 산책을 시작할 때 해는 내 왼편에 있었어. 그것만 기억하자.’ 나는 샛길에서 빠져나와, 이번에는 해를 내 오른편에 두고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 덤불을 헤치며 걷다 보니, 마침내 익숙한 큰길이 나타났다.
이미 해는 다 졌고 어둠이 깔렸지만, 안도감이 밀려왔다. 30분을 예상했던 산책은 2시간을 훌쩍 넘겼다. 땀범벅에 머리는 산발을 한 채, 땅거미가 진 깊은 숲속에 선 내 모습을 드론 카메라로 찍는다면 어떤 모습일까, 잠시 생각했다. 혼자 헛웃음이 났다.
해가 떨어진 숲속에서는, 낮 동안 뜨거운 햇빛에 짓눌렸던 온갖 향기들이 보슬보슬 피어오르고 있었다. 수풀 사이 숨어 낮잠을 자고 깨어난 별의별 곤충들과 새소리가 들려왔다. 길을 잃지 않았다면 영영 맡지 못했을 냄새와 감각,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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