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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상처가 다른 이를 찌르는 무기가 될 때

by 조하나





얼마 전, 한 후배가 내가 사는 숲속 마을로 찾아왔다. 오랜만에 만난 우리는 해가 저무는 줄도 모르고 숲길을 걸으며 두서없는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그러다 후배가 얼마 전 겪었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자신과 아주 가까운 레즈비언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가 TV에 나온, 데뷔한 지 오래된 한 걸그룹을 보며 혐오가 섞인 말을 내뱉더라는 것이다. “어떻게 같은 여성으로서, 그것도 성소수자로서 다른 여성을 그렇게 쉽게 조롱할 수 있을까?” 후배의 목소리에는 실망과 함께 풀리지 않는 의문이 담겨 있었다.


나는 그때, 영화 <에밀리아 페레즈>로 칸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은 트랜스젠더 배우, 카를라 소피아 가스콘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오랜 무명 생활 끝에 세상의 가장 높은 곳에 선 그녀에게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지자, 과거 그녀가 SNS에 남겼던 혐오 발언들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대부분 아시안이나 아프리카계 배우, 그리고 그들의 작품을 향한 비하나 조롱이었다. 그중에는 <기생충>의 오스카 수상을 비웃고, 배우 윤여정의 수상을 폄하하는 내용도 있었다.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줄 때 봤다는 히잡을 쓴 무슬림, 팬데믹 시기의 중국인 등 그녀의 혐오 대상은 다양했지만, 그중 백인은 없었다. 대부분 그녀처럼 ‘소수자’ 커뮤니티였다.


나는 생각했다. 그녀 또한 성소수자로서 얼마나 많은 혐오의 시선을 견뎌왔을까. 그런데 왜 그녀는 그 분노의 칼날을 자신을 억압하는 거대한 시스템이나 기득권을 향해 겨누는 대신, 자신처럼 또 다른 ‘소수자’이자 ‘약자’인 다른 커뮤니티를 향해 휘두르는 것일까?


상처와 결핍이 많은 사람들은, 때로 그것을 명분 삼아 다른 이를 공격한다. 그런데 그 공격은 기이하게도 자신보다 강한 자가 아닌, 자신만큼, 혹은 자신보다 더 약하고 만만해 보이는 이들을 향할 때가 많다. 왜 우리는 연대하는 대신, 서로의 상처를 확인하며 더 깊은 상처를 내는 것일까.


성소수자인 그녀가 어떻게 또 다른 소수자를 공격할 수 있는가? 혐오를 당한 자가 어떻게 또 다른 이를 혐오할 수 있는가? 이런 일은 우리 주위에 넘친다. 백인은 흑인을 공격하고, 흑인은 아시안을 공격한다. 기득권은 장막 뒤에서 가면을 쓰고 샴페인을 홀짝거리며, 자기보다 약하고 만만한 약자와 소수자를 혐오하며 죽이는 걸 게임처럼 즐긴다.


혐오는 언제나 아래로만 흐른다. 절대 위를 향하지 않는다. 자신의 상처와 고통을 다른 이를 찌르는 명분과 무기로 이용할 수 있는가? 나에겐 가스콘의 모순이 없는가? 돌아본다.


나 역시 비슷한 경험이 있다. 서울에서 잡지사를 다닐 때는 내가 ‘노동자’라는 인식이나 ‘소수자’라는 인식을 잘 못했다. 내가 20대, 30대를 보낸 대한민국엔 ‘페미니즘’이나 ‘여성 인권’ 같은 건 아무도 귀 기울이지조차 않았으니까. 그저 여자로서 사회생활을 하기 위해 나름의 생존력을 발휘할 뿐이었다.


그러다 해외에 나가 사는 그 즉시, 나는 ‘소수자’가 되었다. 말 그대로 ‘외국인’이자 ‘여성’, 그리고 ‘노동자’가 된 것이다. 내가 아무리 잘났든, 능력이 있든, 이 세계는 분명 인종만으로 인간의 등급을 나누는 견고한 시스템이 있었다. 오죽하면 “다음 생엔 백인 남자로 태어나고 싶다”고 탄식한 적까지 있을까.


코로나-19 팬데믹 때, 나는 케이브 다이빙을 하러 멕시코에 갔다가 발이 묶였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가 모두 끊겨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된 것이다. 당시 윗동네 깡패 트럼프는 매일 아침 TV에서 ‘차이나 바이러스’를 외쳤고, 멕시코 대통령 역시 ‘코로나는 감기나 다름없다’고 외치며,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우습게 여겼다. 당시 멕시코의 코로나 사망자는 미국 다음으로 치솟았다.


평범한 사람들은 갈 곳 없는 분노를 ‘아시안 헤이트’로 풀었다. 전 세계 곳곳에서 아시안의 생김새를 가진 사람들이 이유도 없이 린치를 당했다. 그때 나는 겁에 질려 생필품을 사러 마트에 가는 것조차, 죄지은 것도 없이 벌벌 떨며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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