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엔 세상 시간을 다 내가 가진 것만 같았다. 그래서 불안하고 방황하고 흔들리면서도, 동시에 권태롭고 지루했다. 그때 내가 가진 시간은 너무나 크고 위대하고 무한해서 도무지 뭘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겁을 너무 많이 먹었다.
그렇게 이십 대를 있는 대로 탕진하고 삼십 대에도 방황했던 시작했던 나는, 한국 사회에서 전형적으로 잡지 기자가 되는 법과 가장 먼 방식으로 일을 시작했다. 대형 상업 패션지 공개 채용보다는 내부적으로 인맥을 통해 인턴 생활을 오래 한 친구들이 정기자 자리가 나면 올라가는 식이었다. 대부분 대학 졸업 직후 인턴 생활을 짧게는 1년, 길게는 3년을 하며 정기자 자리가 나길 바랄 수밖에 없다. 서른이 넘은 나에게 그런 자리는 나보다 나이 어린 선배들에게 부담이 되는 일이었다. 실제로 패션지 인턴 자리에 면접까지 봤지만, 같은 말이 돌아왔다. 나는 괜찮다는데 자기들이 안 괜찮단다.
그때 창간 예정이라는 신생 잡지사에서 기자를 뽑는다는 공고가 났다. 내가 나를 인터뷰하는 형식의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정성스레 만들어 냈다. 당시 편집장은 크라잉넛, 노브레인과 홍대 뒷골목에 청춘을 바친 인디 문화를 사랑하는 분이었다. 그 덕에 내 이력서를 가득 채운 홍대 클럽 경험을 통해 내가 좋은 기자가 될 거라 판단한 분이었다. 내가 탕진했다고 여겼던 이십 대의 경험이 결국 삼십 대에 늦깎이 기자가 되는 발판이 된 것이다.
환경은 열악했다. 자본이 넉넉지 않은 신생 잡지에다 한국의 인디 문화를 다루기에 돈이 많은 광고주도 없었다. 기자가 달랑 둘 뿐이라 기사를 어떻게 쓰는지, 인터뷰는 어떻게 하는지 배울 시간도 여력도 안 됐다. 처음 인터뷰이 섭외 땐 신생 잡지라고 하도 거절을 당해 손 편지를 보낸 적도 있었다. 어떤 인터뷰이는 일 년 동안 매달 한 번씩 전화해 조른 적도 있었다.
맨땅에 헤딩하며 이리저리 시도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나만의 인터뷰 스타일이 만들어졌고, 점점 우리 잡지도 알려졌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내 기사를 잘 봤다는 사람들도 생기기 시작했다. 매체 이름이 아닌 내 이름만 듣고도 흔쾌히 인터뷰를 수락하는 아티스트들도 많아졌고, “조하나와의 인터뷰는 뭔가 다르다”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결국 작은 인디 잡지 출신으로 인턴 경험도 전무했던 나는 역으로 대형 상업 패션지에서 러브콜을 받게 됐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 잘하고 싶고, 잘하게 되면 결국 누군가는 알아준다. 설령 알아주지 않는다 해도 좋아하는 일을 하며 단련되는 자존감의 근육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
지금도 나는 후배 친구들이 고민 상담을 할 때 20대는 그냥 멋있게 낭비하라고 말한다. 낭비라고 생각했던 20대의 방황과 경험이 30대에 들어선다고 하루아침에 끝나는 건 아니지만, 맷집은 좀 더 세진다. 그럼 더 대담해진다. 20대 실수도 많이 하고 사고도 많이 쳐보면 두려움이 조금 줄어든다. 그리고 멘탈이 바닥까지 무너지지 않거나, 바닥을 쳐도 다시 올라올 수 있는 회복탄력성이 생긴다.
내가 좋아하는 일로 밥을 벌어먹고산다는 것만큼 행복한 건 없었다. 끼니 걱정 않고, 커피 한 잔에 살 떨리는 정도는 아니고, 시즌마다 새로 나오는 화장품이나 옷가지를 살 정도. 그렇게 기자 일을 한다는 게 난 너무 신났다. 다이빙을 시작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내가 좋아하던 일보다 더 좋은 게 생길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래서 더 겁을 먹었다. 20대에 그렇게 기우제 지내듯 바라고 찾아 헤맸던 ‘내가 좋아서 미치겠는 일’이 또 생길 줄은 몰랐다. 기자일과 다이빙, 둘 다 하면 오죽 좋겠냐마는, 선택을 해야만 했다. 한국에서 직장을 다니면서 다이빙을 지속적으로 하긴 힘들었다. 뭐 하나 하면 또 제대로 해야 하는 성격이라, 다이빙을 정말 잘하고 싶었는데 시간적으로 그러질 못한다는 게 큰 고민이었다.
나는 강남에 사무실을 둔 대형 패션 잡지사에 다니고 있었다. 마침 ‘한국’에서 ‘싱글’ ‘여자’로 일을 하며 정신적으로 쓸데없이 쏟아야 하는 에너지에 지쳐있을 때였다. 폼나는 곳이었지만 나는, 그곳에서 한강의 너비만큼이나 큰 괴리감을 느꼈다. 위성도시에서 출퇴근으로 하루 4시간을 보내며 시시각각 바뀌는 전철 밖 풍경은 내게 말을 걸어왔다. 한강변을 수놓은 빼곡한 아파트 불빛들은 나에게 욕망과 자격지심을 부추겼고, ‘왜 너는 남들처럼 이 불빛 하나를 얻기 위해 더 열심히 하지 않느냐’고 채근했다.
그때 나에게는 서울의 유혹을 뿌리칠 용기도, 그렇다고 서울로 들어갈 용기도 없었다. 괜히 정치를 탓하고, 가식적인 사회를 탓하고, 무표정한 사람들을 탓했지만, 정작 나 스스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하루하루 심드렁해져만 갔다. 사회가 나에게 요구하는 다음 관문은 ‘결혼’과 ‘가정’이었고,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원하지 않는 그것 때문에 얼마나 더 세상에 대드는 기분으로 싸우며 살아야 하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출구 없는 우울감과 무기력함은 나도 모르는 사이 겹겹이 쌓여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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