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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장. 서울의 파도

by 조하나


소란스럽지 않게 부산한 날들이 이어졌다. 그녀는 매일, 바뀐 얼굴들과 한결같은 바다에 뛰어들었다. 그녀에게 바다는 유일하게 배신하지 않는 친구였다. 그리고 그녀는 그 친구를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일을 사랑했다.


그날의 다이빙은 유난히 평화로웠다. 조류는 부드러웠고 시야는 수정처럼 맑았다. 그녀는 또 한 번 교육생들의 경이로운 첫 숨을 안내하고, 물고기 떼의 은빛 군무를 함께 목격하며, 바다가 베푸는 관대함 속에서 하루를 온전히 보냈다. 센터로 돌아와 장비를 정리하는 그녀의 손길에는 더 이상 망설임이나 불안이 없었다. 손바닥의 굳은살이 느껴질 때마다, 그녀는 자신이 이 섬에, 이 바다에 단단히 뿌리내리고 있음을 실감했다.


태양이 저물자 모두들 약속이라도 한 듯 해변가 테이블에 둘러앉아 맥주를 꺼냈다. 클로드는 언제나 코끼리 그림이 그려진 창을 고집했고, 케빈과 안드레는 레오, 줄리앙은 타이거였다. 술을 못 마시고 좋아하지도 않는 그녀의 손엔 언제나 소다 잔이 들려있었다. 그들은 파랗던 하늘이 붉은 노을에 조금씩 자리를 내어주며 옥신각신하는 풍경을 배경으로 하루의 노동으로 얻은 기분 좋은 노곤함을 안고 저마다의 순간을 즐겼다.


그날 저녁의 공기에는 만족스러운 피로감과 소금기, 그리고 이제 막 숯불 위에서 몸을 뒤집은 생선의 고소한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클로드는 낡은 다이빙 나이프로 나무 테이블의 흠집을 무심하게 다듬고 있었고, 케빈은 아침 다이빙에서 만난 어린 거북이의 우스꽝스러운 몸짓을 흉내 내며 사람들을 웃게 했다. 각자의 맥주병에 부딪혀 차갑게 식은 물방울이 테이블 위로 흘러내리는, 지극히 평범해서 더없이 완벽한 섬의 저녁이었다. 그녀는 차가운 잔을 손에 쥔 채, 그들의 대화에 간간이 웃음으로 답하며 이 완벽한 풍경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그래, 이곳이 이제 그녀의 세상이었다.


그때였다. 그 모든 평화로운 소음들을 단번에 가르는, 그러나 그녀에게만은 천둥처럼 선명하게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테이블의 가장 어두운 구석, 빛과 어둠의 경계에서, 술기운에 벌겋게 달아오른 형식의 얼굴이 유령처럼 떠올랐다.


“조하나 씨. 얘기 좀 합시다.”


그의 목소리는 이미 잔뜩 날이 서 있었다. 테이블의 웃음소리가 순간 멎었다. 케빈과 클로드, 모두의 시선이 갑작스러운 침입자와 그녀를 번갈아 향했다. 형식이 한 걸음 더 다가서며 언성을 높이려는 찰나, 그녀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이 평화로운 공간이, 그녀가 새로 찾은 안식처가 서울의 더러운 소음으로 더럽혀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무슨 일이시죠? 여기서 말고요. 잠깐 저쪽으로 가시죠.”


그녀는 턱짓으로 바의 불빛이 닿지 않는 어두운 해변 쪽을 가리켰다.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단호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형식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녀를 따라나섰다. 등 뒤로 동료들의 의아한 시선이 따갑게 박혔다.


그들은 바에서 몇 걸음 떨어진, 파도 소리만이 대화를 엿들을 수 있는 곳에 멈춰 섰다.


“네가 뭔데 남의 밥그릇을 뺏어? 이런, 씨발. 내가 그렇게 만만해 보이는 줄 아나. 여기가 어디라고 기어 들어와서 물을 흐려?”


악의에 찬 그의 목소리가 어둠을 찢었다. 서울에서 그녀가 지겹도록 들었던, 힘 있는 자가 힘없는 자에게 내리꽂는 폭력의 언어였다. 그녀는 잠시 숨을 골랐다. 바닷속에서 그랬던 것처럼, 아주 천천히, 그리고 깊게.


“무슨 말이에요? 저는 제 일을 하는 것뿐인데. 손님들이 저를 찾아오는 걸 제가 막을 이유는 없죠.”


“네 일? 하! 웃기지 마. 서양 놈들한테 꼬리 치면서 동족 등쳐먹는 게 네 일이냐? 한국 손님은 한국 사람이 가르치는 게 이 바닥 룰이야. 몰랐어?”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씩 날카로워졌다.


“바닷속에 국경이라고 있어요?”


그들의 대화는 금세 언쟁으로 번졌다. 한국어로 오가는 날 선 단어들은 파도 소리에 실려 부서졌지만, 그 안에 담긴 분노와 경멸의 파동은 테이블에 앉은 동료들에게까지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그녀는 언쟁의 와중에도 무심코 동료들이 앉은 테이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들은 그저, 이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 누구 하나 자리에서 일어나거나, 그들의 싸움에 끼어들려는 기색이 없었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들의 문화에서, 타인의 싸움에 함부로 끼어드는 것은 무례한 일이라는 것을. 그들은 그녀가 스스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 믿고, 그 믿음으로 침묵하며 그녀의 자율성을 존중해 주고 있었다. 하지만,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마음으로 느끼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그녀 안의 ‘한국인’이, ‘우리’라는 울타리 안에서 함께 싸워주길 바라는 그 뿌리 깊은 정서가 절박하게 소리치고 있었다. ‘제발, 내 편이 되어줘. 저 사람이 틀렸고, 내가 옳다고 말해줘.’ 그 간절한 외침은 그러나, 문화라는 투명한 벽에 부딪혀 공허한 메아리가 될 뿐이었다. 그녀는 지금, 자신을 지지해 주는 친구들 한가운데서, 가장 깊은 고독을 느끼고 있었다.


“아가씨, 손님이 많으니 네가 뭐라도 되는 것 같지? 네가 잘 나가는 것 같지? 이 바닥 좁아. 내가 너 하나 여기서 다이빙 못하게 만드는 거, 일도 아니야. 알아들어?”


형식은 오른손을 들어 자신의 목에 대고 긋는 시늉을 하며 소리쳤다. 그의 마지막 협박을 끝으로 그녀는 대꾸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하고 차갑게 돌아섰다. 테이블로 돌아오는 그녀의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녀가 자리에 앉자, 모두의 걱정스러운 시선이 쏟아졌다. 케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나, 괜찮니?”


그 한마디가, 그녀가 애써 쌓아 올린 둑을 무너뜨렸다. 그녀는 대답 대신 고개를 숙였고,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케빈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다독였다. 줄리앙은 말없이 시원한 물수건을 가져다주었고, 안드레는 “그 자식, 얼굴만 봐도 재수 없게 생겼더라”라며 서툰 위로를 건넸다. 그들의 위로는 더없이 다정했다. 하지만 그들의 따뜻한 손길은, 그녀의 피부 표면에만 닿을 뿐, 문화와 언어라는 차가운 유리벽 너머, 그녀의 영혼 깊숙한 곳에서 벌어지는 진짜 폭풍에는 가닿지 못했다.


그녀는 울면서 생각했다. 형식의 저 폭력적인 언행은, 과연 그녀가 남성이었어도 똑같았을까. ‘아가씨’라는 호칭에 담긴 경멸, 제 일을 열심히 하는 여성을 ‘꼬리 치는’ 존재로 폄하하는 그 저열함. 그것은 그녀가 서울에서부터 지겹도록 마주했던,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남성 가부장제의 찌꺼기였다. 동료들의 위로 속에서 그녀는 역설적으로 깨달았다. 그들은 결코 이 분노의 근원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분노는 이내 그녀 자신을 향했다. 왜 더 당당하게 맞서지 못했나. 왜 그의 말을 조목조목 반박하며 박살 내지 못했나. 억울함과 분노가 치밀어 오르면서도, 결국 또 ‘좋은 여자’가 되지 못했다는 학습된 죄책감이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그녀는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는데, 왜 이 모든 감정의 소용돌이를 오롯이 혼자 감당해야 하는가.


이 섬에 와서 그녀는 비로소 인종과 국적의 경계를 넘어설 수 있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인간은 어디에서든 편을 가르고, ‘내 편’과 ‘네 편’을 나누며 자신들의 울타리를 친다. 그 원초적인 본능의 민낯을, 그녀는 이 낙원의 한가운데서 목격하고 말았다.


가장 아픈 아이러니는 이것이었다.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다정한 외국인들에게 둘러싸여, 자신과 같은 언어를 쓰는 한국인에게 가장 날카롭게 공격당하고 있다는 사실. 그녀는 이 세상 모든 곳에서 이방인이었다.


자신이 도망쳐 온 서울의 가장 끔찍한 얼굴이, 이 세상 끝의 낙원에서 자신을 가장 아프게 찌르는 칼날이 되고 있다는 그 절망적인 사실 앞에서, 영원히 반복되는 파도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물은 멈출 줄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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