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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장. 오직 한 사람을 위한 바다

by 조하나


그녀의 시간은 더 이상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서울에서 온, 저마다 다른 상처와 기대를 품은 얼굴들의 것이 되었다. 그녀의 하루는 그들의 불안을 잠재우는 주문으로 시작해 그들의 경이로움을 기록하는 증언으로 끝났다. 그녀의 블로그 댓글 창과 이메일 수신함은 ‘구원’을 갈망하는 영혼들의 독백으로 빼곡히 채워져 갔고, 그녀는 그 모든 목소리에 성실하게 답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잠식당하고 있었다. ‘열심히 하는 병’은 섬의 느긋한 공기 속에서 더욱 교묘한 형태로 변이하여 그녀의 영혼에 또다시 가까이 다가섰다.


어느 날 아침, 그녀는 빽빽한 스케줄표 위에서 기적처럼 비어 있는 오후 한나절의 공백을 발견했다. 예약 손님도, 이론 수업도, 장비 점검 일정조차 없는 완벽한 여백. 그녀는 잠시 숨을 멈추고 그 여백을 응시했다. 마치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한 것처럼 아득했다. 바로 어젯밤에도 수많은 상담 메일에 답장을 쓰다 새벽녘에야 잠들었던 터였다. 그녀는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꿀 힘이 없었다. 그녀 자신이 아직 자신의 인생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중이었으니까. 그 작은 틈새를 보는 순간, 그녀의 심장에서 잊고 지냈던, 혹은 애써 외면했던 야생의 충동이 고개를 들었다. 도망쳐야 했다. 이 모든 선량한 기대와 진심 어린 의존으로부터.


그녀는 마치 반역을 꾀하는 비밀 요원처럼 조용히 자신만의 다이빙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아니, 계획이라기보다 탈출에 가까웠다. 다른 강사들의 눈을 피해, 장비실의 익숙한 냄새 속으로 들어섰다. 젖은 네오프렌과 바닷물의 짭조름함, 희미한 금속 냄새가 뒤섞인 그 공간은 그녀에게 성소와도 같았다. 그녀는 교육생들에게 내어주던 대여용 장비가 아닌, 자신의 몸에 길들여진 자신의 낡은 장비들을 하나씩 신중하게 골랐다. 그것은 타인을 위한 봉사의 도구가 아니라 오롯이 그녀 자신을 위한 생존의 도구였다.


보트에 올라 장비를 결합하고 탱크 밸브를 열자 ‘프슉-’ 하는, 압축 공기가 터져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마치, 억눌렸던 그녀 자신의 숨이 터져 나오는 소리처럼 들렸다. 이것은 관광 상품이 아니었다. 교육도, 봉사도 아니었다. 오직 그녀 자신을 위한, 가장 이기적이고 순수한 형태의 다이빙이어야만 했다. 그녀는 캡틴에게 말해 다이버들의 트레이닝을 위한 다이브 사이트로 가는 길, 바다 한가운데에 자신을 내려달라고 부탁했다. 캡틴 피 리는 그녀의 부탁이라면 언제든 “오케이”였다. 뺀질거리는 서양인 강사들에 비해 늘 바지런히 움직이고 거의 매일 보트에 오르며 일하는 그녀에게 캡틴은 언제나 엄지를 치켜들며 자랑스러워했다.


보트 위에서 양쪽에 공기 탱크를 장착하는 사이드 마운트로 다이빙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자 줄리앙의 교육생 다이버 중 하나가 그녀를 가리키며 묻는다. “다이빙은 무조건 둘 이상, 버디와 함께 하는 거 아닌가요? 오픈워터 코스에서 그렇게 배웠는데.” 그러자 줄리앙이 웃으며 말했다. “버디 없이 혼자 다이빙할 수 있는 자격이 있어요. 자격 요건이 까다로운데 하나는 그게 있는 거고. 그녀는 끝내주는 다이버거든요.” 그리고 그녀를 향해 씽긋 웃으며 다정하게 한쪽 눈을 찡긋, 했다.


생각해 보니 보트 캡틴부터 함께 일하는 동료들까지 어느덧 하루하루 시간이 쌓인 만큼의 신뢰와 애정이 생겼다. 그녀가 이 섬에서 보내는 시간을 감지하는 달력은 햇볕에 그을린 피부와 손바닥의 굳은살이 새겨진 그녀 자신의 몸이었고, 그 시간을 함께 하는 증인은 매일 다른 얼굴로 그녀를 맞이하던 바다였다.


그 익숙한 탱크의 무게감이 오히려 위안처럼 느껴졌다. 이것이 지금 그녀가 짊어져야 할 삶의 유일한 무게였다. 타인의 기대도, 자신의 불안도 아닌, 오직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무게. 그녀는 입수 절차를 서두르지 않았다. 호흡기를 물고, 마스크를 쓰고, BCD에 공기를 채우는 모든 과정을 하나의 성스러운 의식처럼, 아주 천천히 음미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는 입수했다.


수면의 경계를 넘는 순간, 세상의 모든 소음이 거짓말처럼 지워졌다. 보트의 엔진 소리도, 갈매기의 울음소리도,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의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수많은 목소리들도. 그곳에는 오직 그녀가 내쉬는 숨이 만들어내는 물거품 소리, ‘후우-’ 하고 길게 이어지는 그녀 자신의 생명의 소리만이 존재했다.


그녀는 서두르지 않고 아주 천천히 하강했다. 형형색색의 산호초 군락도, 화려한 열대어 떼도 없었다. 그녀가 마주한 것은 채워진 풍경이 아니라, 비어 있는 심연, ‘블루’ 그 자체였다. 위로는 수면에서 부서져 내리는 햇빛의 아득한 커튼이, 아래로는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검푸른 어둠이 펼쳐진 그 경계에서 그녀는 유영했다. 온몸을 감싸는 균일한 수압은 위협이 아닌, 존재의 윤곽을 부드럽게 지워주는 거대한 포옹과도 같았다. 어디가 위이고 어디가 아래인지, 시간은 흐르는지 멈췄는지조차 희미해지는 절대적인 공간. 아무것도 볼 것이 없었기에, 그녀는 비로소 모든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깨달았다. 자신이 사람들에게 팔고 있던 것은 진짜 바다가 아니었다는 것을. 그것은 바다에 대한 ‘번역’이자 ‘해설’일 뿐이었다. 그녀는 바다의 가장 안전하고 아름다운 단면만을 잘라내어, 그들의 불안을 잠재울 수 있도록 친절하게 포장해서 건네고 있었다. 하지만 진짜 바다는, 지금 그녀가 마주한 이 거대하고 무심한 침묵이었다. 아름답지만 때로는 위협적이고, 평화롭지만 때로는 한없이 고독한, 인간의 언어로는 결코 온전히 번역될 수 없는 원초적인 공간.


그녀의 역할은 그들의 짐을 대신 져주는 구원자가 아니었다. 그저 문을 열어주고, 그 안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자신의 숨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곁에서 지켜보는 문지기. 그뿐이면 족했다. 그녀는 그들에게 바다를 ‘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바다를 ‘만나도록’ 해야 했다. 그 깨달음은, 지난 몇 주간 그녀의 어깨를 짓누르던 모든 무게를 한순간에 흩어버리는, 눈부신 해방감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다이브 컴퓨터가 정해진 시간을 알렸을 때, 그녀는 아쉬움 없이 상승을 시작했다. 수면으로 올라가는 길, 그녀는 자신이 내뿜는 은빛 물거품들이 햇빛에 부서지며 수많은 무지개를 만들어 내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마치 그녀 안에서 부서지고 다시 태어나는 수많은 생각의 파편들처럼 느껴졌다.


보트 위로 올라와 마스크를 벗었을 때,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클로드에게, 혹은 내일 찾아올 교육생에게 이 경험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하지 않았다. 그저 눈을 감고, 따가운 햇살이 젖은 피부 위로 소금의 결정체를 새기는 감각에 온전히 자신을 맡겼다. 아주 오랜만에, 그녀는 오직 단 하나의 숨, 바로 그녀 자신의 숨소리만을 듣고 있었다. 그녀는 센터로 돌아가서도 습관처럼 손에 쥐었을 스마트폰을 가방 깊숙이 넣어두었다. 쏟아지는 메시지들은 내일의 그녀에게 맡기기로 했다. 오늘의 그녀는, 그저 이 소금기 어린 바람과 식어가는 햇살을 온전히 누릴 자격이 있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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