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내린 비는 섬의 모든 상처를 씻어내지 못했다. 오히려 눅눅한 슬픔의 포자를 공기 중에 흩뿌려 놓은 듯했다. 그녀는 잠을 설쳤다. 형식의 그 경멸 어린 시선과 동료들의 다정하지만 끝내 가닿지 못했던 위로, 그리고 그 모든 것의 근원을 이해받지 못하는 이방인의 고독이 뒤섞여 밤새도록 그녀의 의식을 희미한 열병처럼 떠다녔다.
아침이 왔지만, 그녀는 다이빙 센터로 향할 기운이 없었다. 애써 몸을 일으켜 발코니에 나갔지만, 눈부신 아침 햇살은 오히려 그녀의 상처를 날카롭게 찌르는 것 같았다. 클로드에게 오늘 몸이 안 좋아 센터에 나갈 수 없을 거라는 짧은 메시지를 남겼다. 그녀가 이 섬에 들어와 다이빙 트레이닝을 받고 강사가 되어 수개월 간 일하면서 그녀는 어떤 이유로든 단 한 번도 출근을 미룬 적이 없었다. 독한 감기몸살에 시달려도 그녀는 센터에 나가 다이빙을 가르쳤다. 그녀는 클로드나 케빈, 줄리앙, 안드레가 전날밤의 숙취로 아침 다이빙을 빠지면 군말없이 그들을 대신했으면서도 자신이 빠진 자리를 누군가 메운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처럼 여겼다. 그러나 오늘은 아니었다.
그녀는 다시 침대로 돌아와, 세상의 모든 빛과 소리로부터 자신을 격리하듯 얇은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이 작은 섬에서조차 그녀는 안전하지 않았다. 그녀가 도망쳐 온 괴물은 결국 그녀 안에, 그리고 그녀와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들 안에 있었다. 형식에게 화가 난 건지, 더 적극적이지 않았던 동료들에게 서운한 건지, 그런 상황에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자신에게 실망한 건지, 그녀는 자신을 지나고 있는 감정들에 어떤 이름을 붙일지 몰라 혼란스러웠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이불 속의 축축한 어둠 속에서, 그녀는 저도 모르게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열어보지 않았던 엄마와의 대화창을 열었다. 마지막 대화는 몇 주 전, 그녀가 잘 도착했다는 짧은 안부 인사가 전부였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 꾹꾹, 자판을 눌렀다.
‘엄마, 잘 지내지? 별일 없지?’
그녀는 메시지를 보내고는, 마치 수류탄이라도 던진 사람처럼 휴대폰을 멀리 던져두었다. 엄마는 그녀의 아킬레스건이었다. 엄마의 사랑은 늘 분노와 뒤섞여 있었고, 그 사랑을 받는 것은 날카로운 유리 조각을 삼키는 것과 같았다. 그럼에도, 이 모든 것을 내던지고 돌아가고 싶다는 유혹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이 순간, 그녀가 기댈 곳은 역설적으로 엄마뿐이었다.
잠시 후, 휴대폰이 짧게 울렸다. 엄마의 답장은 늘 그랬듯, 짧고 무심했다.
‘늘 똑같지, 뭐. 무슨 일 있니?’
그녀는 그 마지막 문장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엄마는 언제나 그랬다. 살가운 말 한마디 없었지만, 짐승 같은 직감으로 딸의 위기를 알아채곤 했다. 말은 무심하고 건조하게 해도 그녀는 엄마가 자신을 얼마나 걱정하는지, 만약 자신이 힘들다고 말한다면 당장 “다 때려치우고 돌아와!”라고 소리칠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그래서 그녀는 엄마에게 말할 수 없었다. 그녀는 돌아갈 수 없었다. 만약 그녀가 돌아간다면, 엄마는 결국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제멋대로 사는 딸을 원망하고 조롱하는 원래의 모습을 얼마 안 가 드러낼 것이 뻔했다. 그녀는 엄마의 뜻대로 그렇게 두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녀는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다시 짧게 답장을 보냈다.
‘아니. 나는 아주 잘 지내. 엄마가 별일 없으면 됐어.’
거짓말이었다. 그녀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쌓아 올린 마지막 방파제였다. 그녀는 휴대폰을 뒤집어 놓고 눈을 감았다. 엄마와의 짧은 대화는 위로가 아닌, 그래도 최악의 상황에서 자신이 돌아갈 곳이 있다는 사실을, 그래서 이곳에서 버텨야 할 이유가 더욱 명확해졌다는 무미건조한 자각만을 남겼다.
그때였다. ‘달달달-’ 하는 스쿠터 엔진 소리가 그녀의 방갈로 앞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 잠시 후,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아주 조심스럽고, 예의 바른 노크였다. 케빈일까. 혹은 걱정이 된 줄리앙일까.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인기척이 없으면, 곧 돌아갈 터였다. 잠시 후 문틈으로 작은 쪽지 하나가 스르륵 밀려 들어왔다.
그녀는 마지못해 침대에서 내려와 쪽지를 집어 들었다. 그 위에는, 그녀가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클로드의, 놀라울 정도로 유려하고 단정한 필체의 글씨가 적혀 있었다.
‘하나. 그냥 숨 쉬어(Just breathe), 알지? 푹 쉬고, 언제든 네가 괜찮을 때 나와.’
그 짧고 건조한 문장이, 어젯밤 그 어떤 다정한 위로보다 깊게 그녀의 마음을 흔들었다. 그는 무슨 일이냐고, 묻지 않았다. 그저, 그녀가 그녀 자신의 속도로 다시 숨 쉴 때까지 기다려주겠다는, 그만의 방식으로 전하는 묵묵한 지지였다.
하나의 집 문틈 사이로 쪽지를 밀어 넣기 전, 클로드는 해가 채 떠오르기도 전의 푸른 어둠 속에서, 자신의 낡은 스쿠터를 몰고 형식의 다이빙 센터 앞에 멈춰 섰다. 이제 막 가게 문을 열고 나온 형식은, 어둠 속에서 유령처럼 나타난 클로드를 보고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클로드는 스쿠터에서 내리지 않은 채, 영어로, 아주 낮고 명료하게 말했다.
“좋은 아침, 형식. 우리 얘기 좀 하지.”
형식이 허세를 부리며 한국어로 대꾸하려던 찰나, 클로드의 차가운 시선이 그의 말을 막았다.
“나는 이 섬에서 15년 넘게 지냈어.” 클로드의 목소리는 파도 소리에 섞여 낮게 깔렸다. “이 섬에 사는 사람들 대부분은 무언가로부터 도망치려고 여기 오지. 위대해지고 싶은 쪼잔한 놈들이 만든 규칙 따위에서 벗어나려고 말이야.”
그리고 그는 스쿠터에서 내려, 형식에게 아주 천천히 다가갔다. “그런데 너는… 추잡하고 더러운 것들을 여기까지 가져왔더군.”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형식이 미간에 인상을 찌푸리며 위협적인 눈빛으로 클로드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그러자 다부진 체격과 구릿빛 피부의 형식을 내려다보는, 키가 크고 마르고 볕에 잘 타지 않는 피부의 클로드의 입가에 냉소가 번졌다.
“하나 말이야. 네놈보다 잘났다는 이유로 사람을 괴롭히는 거? 내세울 게 없으니 국적 뒤에 숨는 거? 그건 한국인 문제가 아니야, 친구. 그건 그냥… 슬프고, 한심하고, 쪼잔한 놈들이나 하는 짓이지.”
클로드는 형식의 어깨를 손으로 툭, 하고 쳤다. 힘은 들어가지 않았지만, 그 가벼운 접촉에 형식의 온몸이 경직되었다.
“경고하는데….” 클로드의 목소리는 이제 거의 속삭임에 가까웠지만, 그 안에는 얼음 같은 위협이 담겨 있었다. “이 섬은 네 것이 아니야. 그러니 네 더러운 짓거리를 여기에 끌어들이지 마. 하나는 우리 다이빙 센터에서 일하는 동료이자 내가 고용한 사람이야. 그녀가 한국인을 가르치든 외국인을 가르치든 그건 고객들이 선택할 일이지, 네가 으름장을 놓을 일이 아니란 말이야. 내 말, 알아듣겠나?”
클로드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스쿠터에 올라, 새벽의 푸른 어둠 속으로 조용히 사라졌다. 형식은 그 자리에 못 박힌 채, 클로드의 멀어지는 뒤통수에 대고 한국어 욕을 뱉어냈지만, 아무도 듣는 사람은 없었다.
섬의 태양이 반 바퀴를 돌아 방안에 금빛 그림자가 반짝이기 시작할 무렵, 하루 종일 이불 속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벌이라도 받는 것처럼 시간을 버티던 그녀가 쪼그라들었던 몸을 펴고 문을 열었다. 그리고 발코니에 앉아 식어버린 세상의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클로드의 쪽지는 테이블 위에 놓여, 이슬에 살짝 젖어 눅눅해져 있었다.
그녀는 방 한구석에 무심하게 세워져 있는 다이빙 장비로 시선을 옮겼다. 소금기에 절어 희끗한 자국이 남은 BCD, 그녀의 얼굴 윤곽을 기억하는 낡은 마스크, 수없이 바위를 스치고 지나갔을 핀의 상처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마치 오래된 친구의 어깨를 만지듯, 장비들을 아주 천천히 쓸어보았다.
손바닥에, 익숙하고 단단한 감촉이 와 닿았다. 무거운 공기탱크를 수백 번 들어 올리고, 거친 밸브를 여닫으며 생긴 그녀의 굳은살. 서울에서는 결코 얻을 수 없었던, 오직 그녀의 몸이 이 섬의 중력과 맞서 싸우며 얻어낸 정직한 언어였다. 그 거친 감촉이, 밤새도록 그녀를 괴롭혔던 모든 추상적인 모멸감과 무력감을 현실의 땅으로 끌어내리는 닻이 되어주었다. 이 굳은살은 서울에서 그녀가 펜대와 키보드를 쥐며 얻었던 그 어떤 명성이나 지식보다 정직했다. 그것은 타인의 평가나 시선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녀의 몸이 이 섬의 중력과 맞서 싸우며 얻어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그녀만의 역사였다.
그녀는 형식의 폭언이나 동료들의 침묵을 떠올리지 않았다. 대신, 탱크를 어깨에 짊어질 때 등뼈를 짓누르던 그 육중한 무게와, 그 무게를 이겨내고 한 걸음씩 내디딜 때 허벅지에 차오르던 단단한 열감을 기억해 냈다. 그것은 누구의 평가도, 어떤 언어의 폭력도 침범할 수 없는, 오직 그녀만이 아는 노동의 실체였다.
그녀는 더 이상 위로받기 위해 바다로 가는 것이 아니었다. 도망치기 위해 가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녀는 일하러 가는 것이었다. 자신의 몸에 새겨진 이 굳은살의 언어를, 유일하게 알아들을 수 있는 세계로 돌아가, 오늘 하루치만큼의 정직한 노동을 수행하기 위해. 그것만이, 이 모든 관념의 소음으로부터 그녀를 구원할 유일한 길이었다.
“오늘, 나이트 다이빙 보트 있지?”
센터에 들어서는 그녀의 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케빈과 줄리앙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서려 했지만, 그녀는 그들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짧게, 그러나 단단하게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나는 괜찮다’는 뜻이자, ‘지금은 아무것도 묻지 말라’는 무언의 경고였다. 그들은 더 이상 다가오지 않고, 그저 멀리서 그녀의 움직임을 지켜볼 뿐이었다.
그녀의 등 뒤로, 마당 한구석 기둥에 기댄 채 담배를 피우고 있던 클로드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그를 향해 아주 작게, 그러나 분명하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아침에 받은 쪽지에 대한, 말없는 감사 인사였다. 클로드는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그녀의 굳은 표정과 단호한 걸음걸이를 말없이 지켜보았다. 그의 시선은 평소보다 더 깊고 어두웠다. 그녀가 자신의 탱크를 들어 BCD에 결속시키려는 순간, 그가 툭, 하고 말을 던졌다. 그의 목소리는 잿빛 담배 연기처럼 건조했다.
“일주일은 동굴에 처박혀 있을 줄 알았는데.”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어둠이 짙게 깔린 바다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이건 뭔가? 네 안의 악마와 어둠 속에서 싸워보기로 한 건가?”
클로드의 목소리에는 특유의 냉소가 섞여 있었지만, 그 이면에는 그녀의 속을 꿰뚫어 보는 듯한 예리함이 있었다. 하나는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다이빙 장비가 든 가방 지퍼를 단단히 밀어 올리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그녀는 그가 자신의 상처를, 그저 ‘기분이 좋지 않은 상태’ 정도로 여기고 던지는 냉소적인 농담이라 생각했다.
그녀는 수면 위에 흩뿌려진 석양의 금가루를 배경으로 보트 위에 앉아, 능숙하고 경건하게 장비를 체결했다. 탱크를 BCD에 결속시키는 버클이 ‘철컥’ 하고 맞물리는 금속성 파열음이 명료하게 울렸다. 그녀는 압력을 미세하게 조절하며 공기 탱크 밸브를 부드럽게 열어 ‘스으으’ 하는, 길고 낮은 숨소리 같은 소리를 만들어냈다. 그것은 기계와 그녀의 몸이 나누는, 오직 둘만이 아는 대화였다.
모든 준비를 마친 그녀는 보트의 가장 끝, 입수 지점에 섰다. 그녀는 어둠이 깔린 검은 바다의 심연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섰다. 그곳은 그녀의 일터이자, 그녀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유일한 무대였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거대한 한 걸음을 내디뎌 수면을 깨고 자신만의 세계로 몸을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