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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소리 없는 닻

by 조하나


엄마의 중력에 기대어 밤새 흘린 눈물은, 아침 햇살에 소금의 결정으로만 희미하게 남았다. 모든 것을 게워낸 속은 텅 비어 허기졌고, 감정의 과잉은 역설적으로 몸의 감각을 무디게 만들었다. 그녀는 무언가 해야만 했다. 거창한 다짐이나 계획이 아니었다. 그저 텅 빈 냉장고를 채우는, 살아있는 생명이라면 마땅히 해야 할 가장 원초적인 행위. 그것만이 지금 그녀가 붙잡을 수 있는 유일한 현실이었다.


하지만 냉장고 문을 열었을 때, 그녀는 잊고 있던 또 다른 현실과 마주했다. 코사무이 세관에서, 클로드의 도움으로 간신히 건져 온 그 거대한 상자. 열대의 공기 속에서 위태롭게 발효를 이어가던, 엄마의 맹렬하고도 서글픈 사랑.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 상자를 열고 가장 잘 익은 포기김치를 꺼내 작은 통에 옮겨 담았다. 이것은 더 이상 외면하거나 버릴 수 있는 과거가 아니었다. 그녀가 짊어지고 가야 할, 그녀 존재의 일부였다. 어쩌면, 이 낯설고도 익숙한 냄새를 그녀의 새로운 세계에 소개하는 것이, 뒤엉킨 실타래를 푸는 첫걸음이 될지도 몰랐다.


그녀는 김치가 든 통을 스쿠터 발판에 내려놓고 다이빙 센터로 향했다. 해변의 테이블에는 어김없이 클로드와 케빈, 줄리앙과 안드레가 모여 앉아 있었다. 그녀가 다가가 김치 통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자, 모두의 시선이 그 낯선 붉은 덩어리로 향했다.


“이게… 뭐야?”


안드레가 코를 킁킁거리며 물었다. 그녀는 천천히 뚜껑을 열었다. 시큼하고도 매캐한, 그러나 깊고 복합적인 발효의 냄새가 섬의 달고 비릿한 공기 속으로 단숨에 퍼져나갔다. 모두의 얼굴에 아주 미세한, 그러나 숨길 수 없는 당혹감이 스쳤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을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법이니까.


“김치야. 한국에서 온… 김치.”


주눅이 든 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져 파도 소리에 묻혀버렸다. 그녀의 설명에, 줄리앙이 포크로 김칫소에 섞인 작은 무 조각 하나를 조심스럽게 찍어 입으로 가져갔다. 그의 미간이 순간 찌푸려졌다가, 이내 오묘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오… 이건… 아주 복잡한 맛이군. 맵고, 짜고, 시고… 와인이랑 잘 어울리겠어.” 그녀는 피식, 하고 웃었다. 미식의 나라 프랑스의 자부심에서 나온 그다운 평가였다. 하지만 케빈과 안드레는 먹어 볼 생각도 않고 고개부터 저으며 질색했다.


“우리가 내세울 거라곤 피시 앤 칩스밖에 없어서 이런 복잡한 맛은 잘 모르겠네.”


클로드가 자조적인 농담을 던지며 애써 분위기를 바꾸려 했다. 그녀는 문득, 이들에게 한국의 음식 문화를 설명하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에 휩싸였다. 배고픈 사람은 결코 그냥 보내지 않는 ‘정(情)’, ‘내 밥’과 ‘네 밥’의 경계 없이 큰 냄비에 찌개를 끓여 다 함께 숟가락을 넣고 떠먹는 그 끈끈한 나눔의 분위기를. 하지만 그 모든 풍경과 감정을, 이 서툰 영어로 온전히 번역해 낼 수 없다는 무력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녀가 완벽한 영어를 구사한다고 해도 한국의 음식에 대한 그 집착과 한(恨)의 편린조차 온전히 옮기기란 힘들 것이다. 그게 괜히 서럽고 억울해 그녀는 괜히 클로드와 케빈에게 투정을 부렸다.


“아, 너희들이 한국어를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클로드와 케빈은 좋겠어. 모국어만 써도 세상 어딜 가든 사람들이 알아서 영어를 써주잖아.”


그러자 말아 쥔 담배에 불을 붙이던 클로드가, 그 특유의 건조하고 뒤틀린 유머를 담아 피식 웃으며 말했다.


“맞아. 우리가 침략을 좀 했어야지. 그래서 지금 그 업보를 치르는 중이야. 요즘 영국… 봤지?”


스스로 제국의 역사를 조롱하는 그의 냉소에, 그녀는 지지 않고 받아쳤다.


“그렇게 많은 나라를 식민지로 삼았는데, 왜 영국 음식은 피시 앤 칩스 말고는 없는 거야?”


순간, 테이블에 정적이 흘렀다. 클로드의 눈이 동그래졌고, 케빈은 박장대소했다.


“하하하! 이제야 하나도 우리 진짜 식구가 된 것처럼 말하네!”


클로드는 자신의 농담을 비슷한 냉소의 톤으로 되받아친 그녀의 응수에 말문이 막힌 듯, 그저 헛웃음을 터뜨릴 뿐이었다. 그녀는 깨달았다. 이들은 더 이상 어렵고 불편한 타인이 아니었다. 서로를 상처 내지 않으면서도 농담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이. 삐걱거리고 서툴고 성긴, 분명 새로운 형태의 가족이었다.


그날 오후, 그녀는 이 새로운 가족을 위해 무언가 해주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슈퍼마켓으로 향했다. 그녀가 나고 자란, 끔찍하게 증오하면서도 동시에 사무치게 사랑하는 그 나라의 맛을, 이들에게 온전히 선물하고 싶었다.


평소엔 꿈도 못 꾸던 한국에서 수입된 비싼 식재료를 가득 들고 계산대 앞에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던 그녀의 등 뒤로, 아주 작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하나 씨.”


‘윤아 엄마’였다. 인공적인 냉기가 목덜미를 스치는 슈퍼마켓의 실내, 아이 없이 홀로 장을 보러 나온 그녀의 얼굴은 윙윙거리는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 더 그늘져 보였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더니 주위를 살피며, 마치 비밀을 공유하듯 하나의 귓가에 나직하게 속삭였다.


“며칠 전에… 클로드가 새벽에 우리 센터에 찾아왔었어요. 형식 씨한테… 다시는 하나 씨 괴롭히지 말라고, 아주 조용히, 하지만 단호하게 말하고 갔어요.”


그녀의 심장이 쿵, 하고 바닥 없는 곳으로 떨어졌다. 냉소적인 농담과 심드렁한 표정 뒤에 가려져 있던 클로드의 진짜 얼굴이 보였다. 그녀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녀를 위해 움직여 준 소리 없는 닻 같은 사람. 그 사이 ‘윤아 엄마’가 더 이상 아무 말 없이, 작은 목례와 함께 인파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저기요! 윤아 엄마!”


그녀가 뒤를 돌아봤다.


“이름이 뭐예요? ‘윤아 엄마’ 말고, 자기 이름이요!”


그러자 그녀가 멀찌감치 떨어진 채로 외쳤다.


“서영이예요, 이서영.”


서영은 아주 오랫동안 불려보지 못한 제 이름을 그렇게 스스로 부르며 흠칫했다.


“서영, 이. 서. 영. 다음에 만날 땐 서영 씨라고 부를게요. 고마워요, 서영 씨!”


집으로 돌아온 하나는 마치 경건한 의식을 치르듯 김밥을 말기 시작했다. 고슬고슬하게 지은 밥에 소금과 참기름으로 간을 하고, 노랗게 부친 달걀지단과 불고기 양념에 재운 소고기, 아삭한 오이와 단무지, 붉은 당근을 차곡차곡 쌓아 올렸다. 굳은살이 박인 그녀의 손가락이, 익숙한 리듬으로 김발 위를 오갔다. 그녀에게 김밥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었다. 서울의 자신과 섬의 자신, 상처와 감사, 흩어진 모든 조각들을 그러모아 단단하게 말아 올리는, 그녀만의 언어이자 기도였다. 그녀가 살아온 시간의 모든 빛깔과, 그녀가 새로 얻은 가족에 대한 감사, 그리고 무엇보다 클로드의 소리 없는 옹호에 대한 그녀만의 대답이기도 했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고마움을, 그녀는 그렇게 밥알 하나하나에 눌러 담았다.


다음 날, 다이빙 센터의 테이블 위에는 수십 줄의 김밥이 먹음직스럽게 쌓여 있었다. 그녀는 센터의 동료들뿐만 아니라, 리조트에서 일하는 태국 스태프들과 마침 교육을 받으러 온 손님들에게까지 김밥을 나누어 주었다.


“와, 스시 파티다!”


한 교육생이 환호성을 질렀다. 그녀는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정정했다.


“이건 스시가 아니라 김밥이에요. 스시는 식초로 간을 한 밥이지만, 김밥은 소금과 참기름으로 맛을 내죠. 들어가는 재료도 훨씬 다채롭고요.”


그녀는 조금씩, 자신의 문화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건 내 음식’, ‘저건 네 음식’이라는 경계에 익숙한 몇몇은 선뜻 손을 내밀지 못했다. 한입 맛본 다른 이는 너무 맛있다며 얼마를 줘야 하냐고 물었다. 그녀는 웃으며 대답했다.


“제가 온 나라에서는, 돈보다 함께 나누어 먹는 기쁨이 더 중요해요. 그냥, 맛있게 먹어주면 그걸로 충분해요.”


그녀는 클로드가 형식을 만났다는 사실에 대해 아는 척하지 않았다. 그저 그가 김밥을 집어 입에 넣고는, “젠장, 피시 앤 칩스보다 백배는 낫군” 하고 퉁명스럽게 중얼거리는 모습을 지켜볼 뿐이었다. 그녀의 고마움은 이미 그 김밥 안에, 그녀가 아는 최선의, 가장 한국적인 방식으로 온전히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따스함 속에서도, 그녀의 내면에서는 차가운 역류가 일렁이고 있었다. 그녀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다. 특히 남자의 도움은, 그것이 아무리 순수한 호의일지라도 그녀를 조이고 죄는 투명한 쇠사슬처럼 느껴졌다. 그것은 그녀가 평생을 싸워온 적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잠재적인 약자로 분류되고,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그녀는 언제나 필요 이상으로 자신을 증명해야만 했다. 식사가 끝나고 계산서가 테이블 위에 놓이는 그 어색한 정적의 순간, 누구보다 먼저 지갑을 꺼내 드는 것이 그녀의 강박이었던 것처럼. ‘남자에게 얻어먹는 여자’라는 경멸 어린 시선에서 벗어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처럼. 그녀의 독립은, 세상의 모든 편견에 맞서기 위해 그녀가 스스로 두른 단단한 갑옷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갑옷이 얼마나 허술한지를 깨닫게 되는 밤들이 있었다. 어두운 골목길,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다가오는 낯선 그림자 앞에서, 그녀는 스스로를 지킬 어떤 무기도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절감하곤 했다. 그녀가 유일하게 내밀 수 있었던 방패는, 있지도 않은 ‘남자친구’라는 허깨비였다. “남자친구 있어요.” 그 말을 내뱉는 순간 느껴지는 안도감과, 이내 파도처럼 밀려오는 자기혐오. 결국 또 다른 남자의 이름 뒤에 숨어야만 안전해지는 자신의 무력함. 그럴 때마다 그녀는 스스로를 영원히 지킬 수 없다는, 서늘하고도 명백한 진실 앞에서 공포에 몸서리쳤다.


형식의 폭언 앞에서 그녀가 느꼈던 것도 바로 그 공포였다. 그리고 클로드의 ‘소리 없는 닻’은, 그 공포로부터 그녀를 건져 올려 준 구원의 밧줄인 동시에, 그녀가 결코 혼자서는 그 공포를 이겨낼 수 없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잔인한 낙인이기도 했다. 클로드에게 사무치게 고마웠지만, 그 고마움의 무게만큼이나 자기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결국 또, 남자의 폭력 앞에서 다른 남자의 보호를 받아야만 했던 나약한 여자. 그녀가 그토록 벗어나고 싶었던 그 굴레를, 이 세상 끝의 낙원에서조차 확인하고 만 것이다.


그녀는 웃고 떠드는 사람들 틈에서, 홀로 그 쓰리고도 달콤한 감정의 무게를 가만히 견디고 있었다. 이 소리 없는 닻은, 그녀가 표류하지 않게 붙잡아 주었지만, 동시에 자신이 떠 있는 바다가 얼마나 깊고 아득한지, 그리고 그 심연을 홀로 마주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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