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소음은 희미한 이명처럼 귓가에 남았지만, 꼬따오의 부두에 발을 내딛는 순간, 그녀는 비로소 다시 숨을 쉬는 것 같았다. 며칠간 폐부를 찔렀던 인공적인 냉기 대신, 훅 끼쳐오는 짙푸른 바다 냄새와 흙먼지, 잘 익은 열대 과일의 달큰함이 뒤섞인 섬의 공기. 그것은 단순한 공기가 아니라, 그녀가 돌아온 세계의 명백한 증거였다. 그녀의 존재를 인정해주는 세상이었다. 적어도 그때까지 그녀는 그렇게 믿었다.
섬의 유일한 항구에서 내리니 손님을 픽업 택시에 태우러 온 사람들이 각 리조트 푯말을 들고 열을 맞춰 늘어서 있다. 이제 그들의 얼굴과 이름을 제법 익힌 그녀는 씨익 웃으며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그들에게 몰래 뒤에서 다가가 놀래키거나 간지럼을 태운다. 그녀는 택시 대신 항구 근처에 세워둔 낡은 스쿠터에 몸을 싣고, 익숙한 해변 도로를 달렸다. 맨살에 부딪히는 바람의 감촉이 거칠지만 다정했다. 서울에서의 시간은 마치 다른 생의 기억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센터는 여느 때와 같았다. 아침 다이빙을 마친 다이버들이 젖은 몸으로 왁자지껄 떠들며 장비를 씻고 있었고, 케빈은 특유의 사람 좋은 웃음으로 그들 사이를 오가며 농담을 건네고 있었다. 그녀가 나타나자, 케빈이 가장 먼저 발견하고 달려와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
“하나! 돌아왔구나! 오, 세상에!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몰라! 서울은 어땠어?”
그의 과장된 환영에 그녀는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늘 똑같지, 뭐. 내가 없어도 서울은 잘만 돌아가던데?” 그녀의 짧은 대답 안에 그녀가 서울에서 겪었던 모든 감정의 소용돌이가 함축되어 있었다. 줄리앙과 안드레도 다가와 반가움을 표했다. 그들의 스스럼없는 환대 속에서, 그녀는 자신이 이 섬의 일부임을, 돌아올 곳이 있는 사람임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하지만 테이블 한쪽에 홀로 앉아 담배 연기만 뿜어내고 있는 클로드를 보자, 그녀의 마음 한구석이 얼음물을 뒤집어쓴 듯 찌릿했다. 그는 그녀의 귀환에 눈길 한번 주지 않고, 그저 잿빛 연기 너머의 수평선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침묵은 평소의 냉소와는 다른 종류의 무게를 지니고 있었다. 마치 아주 깊은 곳에 홀로 잠겨 있는 듯한, 다가갈 수 없는 거리감. 그녀는 애써 그 불편함을 외면하며 동료들과 서울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후가 되자, 그녀는 다시 강사로서의 일상으로 복귀했다. 서울에서 겪었던 흔들림과 죄책감은, 오히려 그녀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더 이상 ‘하루살이’처럼 부유하는 자신을 탓하지 않았다. ‘한 번에 하루씩’, 그것이 그녀가 선택한 삶의 방식임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리고 그 하루를 온전히 살아내기 위해, 그녀는 다시 바다로 향해야 했다.
마침 반가운 소식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몇 달 전, 그녀에게 오픈워터 코스를 배웠던 한국인 대학생 두 명이 다시 섬을 찾아온 것이다. 바다가 무섭다며 연신 물을 먹으면서도, 끝내 마지막 다이빙을 마치고 물 위로 올라와 환하게 웃던 그 얼굴들. 그들이 이번에는 어드밴스드 오픈워터, 레스큐 다이버 코스, 그리고 다이브마스터 과정까지 도전하고 싶다며, 오직 그녀에게 배우고 싶다는 메일을 보내왔다.
그녀의 블로그를 통해 찾아오는 손님들과는 또 다른 종류의 감동이었다. 그녀가 뿌린 작은 씨앗이, 마침내 싹을 틔우고 다시 그녀에게 돌아온 것이다. 그들은 그녀처럼, 이 바다에서 자신만의 길을 찾고 싶어 했다. 그녀는 그들의 용기가 고마웠고, 동시에 어깨가 무거워짐을 느꼈다.
레스큐 코스는 다이빙 기술을 넘어, 타인의 생명을 책임지는 무게를 배우는 과정이었다. 지금까지의 강습 경험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낀 그녀는 클로드에게 도움을 청했다. 아니, 이를 핑계로 그의 수십 년 경험과 깊이를 곁에서 배우고 싶었다. 또한, 그와 함께 가르친다는 행위 자체가, 서울에서 돌아온 그녀가 이 섬에, 이 센터에 온전히 다시 뿌리내렸음을 증명하는 의식이 될 것 같았다.
늦은 오후, 마지막 다이빙 보트가 돌아오고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센터. 그녀는 여전히 테이블에 홀로 앉아있는 클로드에게 다가갔다. 해 질 녘의 붉은 빛이 그의 옆얼굴에 길게 드리워져, 평소보다 더 깊은 음영을 만들고 있었다.
“클로드.”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푸르고 투명한 눈동자는 저물어 가는 바다처럼 깊고 고요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공허해 보였다.
“내일 시작하는 레스큐 코스 말인데… 혹시, 나랑 같이 팀 티칭 해줄 수 있을까? 나 혼자선 아직 좀 부족한 것 같아서.”
그녀의 제안에 클로드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는 담배를 입에서 떼어 재를 털어내고는, 그녀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의 시선은 평소보다 더 깊어 읽기가 어려웠다.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을 때, 그의 목소리에는 익숙한 냉소가 섞여 있었지만, 그 밑바닥에는 아주 희미한, 그러나 분명한 피로감이 배어 있었다.
“레스큐라… 구하는 건가, 구해지는 건가. 네 손님들이잖아. 하나 넌 언제까지 내 뒤에 숨어 있을 거야?”
평소와는 다른 반응에 그녀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언제나 세상은 그에게 불평불만 투성이었지만, 이번엔 이상하게도 분노보다는 깊은 지침이 느껴졌다.
“아니, 그게 아니라… 그냥 같이 하면 더 좋을 것 같아서….”
그녀의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그제야 클로드는 피식 웃었다. 입꼬리만 살짝 비트는, 공허한 소리였다.
“하나, 넌 이제 더 이상 애송이가 아니라고. 바닷속에서, 학생들 가르칠 때 너 날아다니는 거 내가 다 봤는데 뭘. 그리고 네가 무슨… 그 한국식 어설픈 겸손 같은 거, 여기선 안 해도 돼.”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녀의 어깨를 툭, 쳤다. 평소보다 조금 더 힘없는 접촉이었다. “알았어, 해보자고. 스케줄은 네가 알아서 짜. 꼬맹이들 잘 가르쳐서, 쓸 만한 다이버들로 만들어 보자고.” 그의 말투는 평소처럼 가벼운 듯했지만, 그녀는 그 이면에 숨겨진 어떤 위화감을 떨칠 수 없었다. 마치 억지로 웃음 짓는 사람처럼, 그의 농담은 공허하게 울렸다.
“내일 아침 8시까지 센터로 모이라고 할게. 늦지 마, 클로드. 늦게까지 맥주 너무 많이 마시지 말고!”
그녀는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분명 거절은 아니었지만, 함께 하자는 제안에 대한 회피이자, 그녀를 완전히 밀어내는 듯한 인상을 떨칠 수 없었다. ‘왜일까. 내가 뭘 또 잘못했나.’ 불안감과 서운함이 동시에 파도처럼 밀려왔다. 서울에서 돌아와, 이 섬에서의 존재의 정당성을 확인하고 싶었던 그녀의 기대는 식어버렸다. ‘그래, 클로드는 원래 무심하고 쌀쌀맞은 사람이었지.’ 타인에게 기대하지 않는 것. 그것이 그가 평생 살아온 방식이었고, 어쩌면 그게 맞는지도 모른다.
클로드는 뒤돌아보지 않고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의 뒷모습은 유난히 작고 위태로워 보였다. 그녀는 그 자리에 남아, 그가 사라진 방향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심장을 차갑게 감쌌지만, 그녀는 애써 고개를 저었다. 내일이면 또 언제 그랬냐는 듯 냉소적인 농담을 던지며 나타날 터였다. 어쩌면 그저, 서울에서 물 먹고 온 자신을 놀리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녀는 다시 돌아온 학생들과의 만남과, 클로드와 함께할 첫 공식 팀 티칭에 대한 기대로 마음을 채우려 애썼다. 붉게 타들어 가는 노을을 바라보며, 그녀는 서울에서 확인했던 자신의 단단함을 떠올렸다. 그래, 이제 괜찮을 것이다. 그녀는 이곳에 뿌리내렸고, 그녀의 섬은 이제 안전할 터였다.
밤이 깊어지고, 섬은 고요 속에 잠겼다. 그녀는 내일 있을 레스큐 코스 교재를 뒤적였다. 클로드가 주도할 테지만 그녀는 마치 자기 혼자 코스를 진행하는 것처럼 시나리오를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그가 없어도 그녀 혼자 그 가르치기 까다롭다는 레스큐 코스를 잘 가르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피곤함에 눈이 감겼다. 창밖의 파도 소리가 평소보다 더 가깝게, 혹은 더 멀게, 기이한 거리감으로 들려오는 듯했다. 잠들기 직전, 문득 클로드의 공허한 눈빛과 힘없이 어깨를 치던 손길이 떠올랐지만, 그녀는 이내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내일 아침이면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와 있을 터였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평범한, 섬의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될 것이라고, 그녀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