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로 쉬는 법을 배우지 못한 우리들.
그리 넉넉한 환경이 아니었던 우리 집,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조금이라도 생활비를 벌기 위해 맞벌이를 시작했던 엄마에게 나는 ‘잠재적 생산자’였다. 고등학교 때 IMF를 겪었고, 그때는 우리 집뿐 아니라 사회 전체가 ‘돈’이라는 압력의 공포에 휩싸였다. 이후, 배우 김정은이 빨간색 스웨터를 입고 하얀 눈을 배경으로 “부자되세요”라고 외치는 CF가 세상을 뒤덮었다. 나는 대학에 입학하기도 전에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벌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1년 이상을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거나 어학연수를 가거나 유학을 가는 건 내 옵션에 없었다. ‘언론 고시’라 불리는 방송사나 신문사 입사 시험 준비마저도 사치였다. 나는 대학을 다니는 내내 일하고, 대학 졸업 후에도 쉬지 않고 일해야 할 운명이었다.
운 좋게 대학 졸업 직전 취업이 됐다. 부장이 신입사원 환영 회식 3차로 우리를 몰아넣은 곳은 거대한 관광 나이트의 룸이었다. “나는 코요태를 좋아해”라는 부장의 말 한마디가 떨어지기 무섭게 과장과 대리들은 노래방 기기에 코요태 노래를 줄줄이 예약했다. 그 방에서 유일한 여자였던 나는, 밤새 하이힐을 신고 선 채로 탬버린을 치며 그 노래들을 다 불러야 했다. 이건 아니었다. 버티고 견뎌서 내가 얻을 게 무엇인가. 회식을 마치고 찜질방에 갔다가 올이 나간 스타킹을 벗어버리고 퉁퉁 부은 맨다리로 힐을 꺾어 신고 회사로 향하는 테헤란로를 걸으며 생각했다. 나는 회사로 돌아가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언제나 나는, 무언가를 증명하기 위해 살았다. 내가 이 ‘사회’라는 시스템에 쓸모 있는 ‘부품’이라는 것을, 이 경쟁에서 낙오되지 않을 만큼 충분히 강하다는 것을. 대학 내내 아르바이트를 했던 홍대 클럽으로 돌아갔다가 당시 유행이었던 온라인 쇼핑몰을 연 것도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 잠 못 자고 밥 못 먹으며 건강을 해치면서까지 일했다. 잘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억지로 꾸역꾸역 밀고 나갔다. ‘내 그럴 줄 알았지.’ 누가 하지도 않은 말이 내 귓가에 맴돌았다.
그렇게 나는 쉴 줄 모르는 사람이 되었다. 오랜 방황 끝에 마침내 내가 좋아하는 일을 찾아 서울에서 잡지사 에디터가 되었지만, 마감의 광풍이 지나간 뒤 찾아오는 탈진의 순간에도 나의 뇌는 결코 멈추지 않았다. 소파에 쓰러져 있으면서도 머릿속으로는 다음 기사 아이템을 구상했고, 모처럼 얻은 휴가 중에도 끊임없이 이메일을 확인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나태함이었고, 뒤처짐이었으며, 깊은 불안의 원천이었다. 쉬면서도 쉬지 못하는, 혹은 쉬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는 이 기이한 병은 비단 나만의 것이 아니었다. 어쩌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앓고 있는, 이름 없는 전염병일지도 모른다.
대한민국은 명실상부한 ‘번아웃 사회’다. 끊임없는 노력을 미덕으로 삼고, 잠시의 멈춤도 뒤처짐으로 여기는 ‘허슬 컬처’ 속에서, 수많은 이들이 극심한 소진과 무기력에 시달린다. 세계보건기구(WHO)는 번아웃의 핵심 증상을 세 가지로 정의한다.
첫째, 에너지 고갈 및 소진이다. 이는 정서적, 신체적 에너지가 모두 바닥난 상태를 의미한다. 아침에 눈을 뜨는 것부터가 고욕이며, 업무에 필요한 최소한의 정신적, 육체적 자원마저 고갈되어 극심한 무기력감을 느낀다.
둘째, 직업에 대한 정신적 거리감이 증가하고 냉소주의가 짙어진다. 이는 자신의 일에 대한 부정적이고 냉소적인 태도가 만연해지는 상태를 말한다. 과거에는 열정과 의미를 부여했던 업무가 이제는 무의미하게 느껴지며, 직장 동료나 고객과의 관계에서도 정서적으로 분리되고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다. 이는 일종의 자기 보호 기제이지만, 결과적으로는 개인을 직업적 환경으로부터 고립시킨다.
셋째, 직업적 효능감이 감소한다. 이는 자신의 업무 수행 능력에 대한 자신감이 떨어지고, 성취감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제대로 된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고 느끼며, 스스로가 무능하고 비효율적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결국 자존감의 붕괴나 자기 비하가 자기혐오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
이러한 번아웃은 갑자기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개인을 잠식한다. 에델비히(Edelwich)와 브로드스키(Brodsky)가 제시한 모델에 따르면, 개인은 초기의 ‘열성(Enthusiasm)’ 단계를 거쳐, 점차 흥미를 잃고 근무 조건 등 외적 보상에 집착하는 ‘침체(Stagnation)’ 단계로 들어선다. 이후 업무에 대한 회의감과 무력감이 커지는 ‘좌절(Frustration)’ 단계를 지나, 결국 모든 감정적 관여를 차단하고 기계적으로 버티거나 이직을 모색하는 ‘무관심(Apathy)’ 단계에 이르게 된다. 이 과정은 의욕적인 한 개인이 어떻게 환경적 요인에 의해 체계적으로 마모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번아웃은 피로감, 의욕 상실 등 우울증과 유사한 증상을 공유하지만,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번아웃은 주로 직업적 맥락에 국한되어 발생하는 반면, 우울증은 삶의 모든 영역에 걸쳐 전반적인 부정적 감정과 무가치함을 동반한다. 하지만 만성적인 번아웃을 방치할 경우, 이는 임상적 우울증이나 불안장애로 발전할 수 있는 중요한 위험 요인이 된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더 심각한 문제는, 마침내 주어진 휴식의 시간마저 온전한 회복이 아닌, 또 다른 불안의 원천이 된다는 점이다. 휴식 시간에 느끼는 불안은 심리학적으로 ‘미래 지향적 염려 상태’로 정의할 수 있다. 이는 명확하고 즉각적인 위협에 대한 반응인 ‘공포’와는 구별된다. 불안은 잠재적인 위협이나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걱정으로, 인지적, 정서적, 신체적 요소를 모두 포함한다. 인지적으로는 ‘쉬는 동안 뒤처지고 있어’, ‘이 시간을 낭비하고 있어’와 같은 걱정과 반추적 사고가 나타나고, 정서적으로는 초조함, 짜증, 막연한 두려움을 느끼며, 신체적으로는 심장 박동 증가, 근육 긴장, 소화 불량과 같은 반응이 동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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