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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뒤처지는 것 같고, 불안하고 흔들리고 조급할 때

“늦게 피는 꽃에 시간을 주어라” 하던 어른을 떠올린다

by 조하나







영영 끝날 것 같지 않던 열병 같던 여름이 지나고 온 세상이 알록달록하고 풍성한 가을이다. 가을은 언제나 온 것을 알아채는 순간 서둘러 사라진다. 눈 깜빡하면, 이제 곧 눈이 올 것이다.


나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뜻대로 일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거나, 많은 게 정체되거나,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이 송두리째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결핍’을 느끼고 있을 거라 생각한다.


코로나-19 팬데믹을 떠올려 본다. 나는 팬데믹 직전까지 태국 외딴섬 깊은 바닷속과 멕시코 세노테 수중동굴을 오가며 세상이 어찌 되는지도 모르고 다이빙을 하고 있었다. 팬데믹으로 모든 게 멈췄을 때 나는 뭍에 나와 있는 시간이 하도 길어져 아가미가 다 말라가는 심정이었다.



96818165_1917649191710107_5633491345537499136_n.jpg ⓒ 조하나




예전엔 ‘시간이 없어서 못 한다’고 했던 핑계가 무색해질 만큼 시간도 여유도 많아졌는데, 원치 않아 생긴 시간과 여유는 오히려 나의 마음을 좀먹기 시작했다.


한 영화 제목처럼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지금 이 상태가 앞으로 한 달이 될지 일 년이 될지 알 길이 없을 때, 미래를 알 수 없고 계획하는 것조차 사치일 때 우리는 무력해진다. 속수무책이다.


팬데믹 시기 이 숲속으로 도망쳐 들어왔는데, 제아무리 무릉도원이라 해도 제 발로 들어온 게 아니다 보니 주변에 새들이 가득 지저귀고 황금빛 들판이 바람에 춤을 춰도 나는 그 아름다움을 온전히 바라보지 못했다.


그때 문득, 장사익 선생님이 생각났다. ‘봄비’와 ‘찔레꽃’을 부른, 바로 그 소리꾼 장사익.


내가 <F.OUND>라는 인디 컬처 매거진에서 에디터로 일할 때였다. 서른이 넘어 뒤늦게 잡지사 에디터 일을 시작했고, 프로로 글을 써본 경험도 이력도 없던 나를 그저 가능성만 보고 덜컥 뽑아준 편집장님 덕에 나는 당시 잡지 바닥에서 ‘열정 페이’라 불리던, 어시스턴트와 인턴으로 보내야 했을 2-3년의 시간 없이 정기자로 바로 일을 시작했다.


그 당시 인터뷰 섭외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기획안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는 물론이고, 인터뷰 자체를 어떻게 하는지도 몰랐다. 그렇게 2010년 에디터 일을 시작해 말 그대로 ‘맨땅에 헤딩하듯’ 이리저리 깨지고 부딪히며 일을 하는데 너무 재밌었다. 음악하고, 연기하고, 미술하고, 무언가 멋진 걸 만들어내는 사람들 중에서도 내가 개인적으로 관심 있고 궁금한 사람들만 콕 집어 인터뷰를 했는데, 사실 잡지보다 나 자신을 위해 일했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내 인터뷰이들은 사적이었다.


그때 당시 내가 세상을 살아가며 궁금한 것들, 방황하던 것들, 그 끝없는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으러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인터뷰했다.







어느 가인의 부드러운 호통


2011년 5월, 처음 장사익 선생님 공연을 봤다. 그때 당시 음악하는 친구를 만나고 있었는데 그 친구가 하도 보채서 못 이긴 듯 따라나선 공연이었다. 선생님 노래도, 배경도 잘 몰랐다. 선생님 공연 티켓이 그리 구하기 힘든지도, 공연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오는지도 몰랐다. 아니, 관심이 없었다고 하는 게 맞겠다. 선생님 노래는 나이 든 분들만 듣는 거란 편견이 강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지만, 당시에 나름 인디 컬처의 수호자처럼 희한한 자부심 같은 것도 있었고, 여기저기서 “조하나 에디터, 뮤지션 인터뷰 정말 잘 한다”라는 칭찬도 쏠쏠히 듣던 때라 어깨가 좀 단단해져 있던 터였다. 문화를 다루는 피처 에디터가 그러면 안 되는데, 내가 아주 오만한 길로 빠질 뻔 했을 때 장사익 선생님 공연을 계기로 정신을 확 차렸다.


그때 억지로 끌려간 장사익 선생님 공연에서 나는 눈물, 콧물을 다 빼고 나왔다. 선생님이 울 때 같이 울고, 웃을 때 같이 웃고, 난리도 아니었다. 노래 한 곡이 끝날 때마다 아이처럼 천진한 웃음을 가득 품고, 깊이 고개 숙여 천천히 인사하는, 환갑을 넘은 가인의 모습에서 내가 얼마나 우습게도 음악을 안다고 까불었는지, 아주 뒤통수를 호되게 맞았다. 내가 처음 본 장사익 선생님의 공연은 부드러운 호통 같았다. 겸손해지라고, 너는 아직 멀었으니 천천히 가라는 가르침이었다.


공연장을 빠져나오며 그때 나는, 음악 좀 안다고 기고만장했다가 납작해진 코를 다시 세우고 괜히 머쓱해져서는 남자친구에게 “나 장사익 선생님 인터뷰 할 거야”라고 선언했다. 편집팀에선 모두 의아해했다. 젊은 이들이 주로 보는, 그것도 대중 잡지도 아니고 인디 매거진에서 ‘왜?’ 하고 물었다. 하지만 나는 확신이 있었다. 지금, 이 시대의 젊은이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귀 기울여야 할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거라고. 앞으로 10년이 흘러도 여전히 세상에 유효한 질문을 던질 거라고. 그리고 나는, 그런 거대한 이야기를 품을 수 있는 그릇의 에디터가 되고 싶다고.


그러고는 선생님 인터뷰 섭외를 하려는데 다른 뮤지션처럼 소속사나 매니저가 없어 연락처를 구하는데 애를 많이 먹었다. 선배나 사수 없이 혼자 배운 에디터 일이다 보니 그래서 나는 또 맨땅에 헤딩을 했다. 선생님 홈페이지에 나온 주소로 무작정 내가 인터뷰했던 기사들이 실린 과월호 몇 권을 챙겨 인터뷰를 정중히 요청하는 손편지와 함께 보냈다. 그리고 마음을 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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