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침묵의 방언

by 조하나


이시가키 바다의 시야는 가혹할 정도로 투명했다. 시신경을 베어낼 듯 날카롭고 폭력적인 선명함이었다.


수심 20미터. 지상의 소란스러운 빛이 닿지 못해 오직 서늘하고 외로운 쪽빛만이 존재하는 곳. 이곳은 색채라기보다 거대한, 영원히 숨을 멈춘 ‘정지(停止)’의 세계였다. 먼지 한 톨, 미세한 부유물 하나 없이 완벽하게 제련된 이 끔찍한 무결함이 두려워 그녀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마치 발가벗겨진 채로 차갑고 거대한 수술대 위에 올려진 기분이었다. 지상의 시선과 소음이 싫어 바다로 도망쳐 왔건만 이제 이 바닷속은 뭍보다 더 잔인해졌다. 꼬따오의 흐리고 몽환적인 초록빛 물속은 적당히 숨을 수 있는 은신처였으나 이시가키의 투명한 블루는 숨을 곳을 단 한 뼘도 허락하지 않는 독방과도 같았다. 바다가 그녀의 영혼을 강제로 헤집어 샅샅이 해부하고 있었다. ‘너는 무엇을 숨기고 있지? 너는 누구를 버리고 왔지?’


그녀는 갑자기 핀을 차던 다리를 멈추고 허공에 몸을 뉘었다. 중력이 소거된 우주. 위도 아래도 없는 절대적인 고요 속에서 불현듯 코끝에 비릿한 냄새가 스치는 듯했다. 바다 냄새가 아니었다. 그것은 소독약 냄새였고, 식어버린 살 냄새였으며, 영원히 감기지 않을 것 같았던 누군가의 눈동자 냄새였다. 지독하게 깨끗한 이 공간에서는 사라진 것들이 오히려 더 선명한 윤곽을 드러냈다. 시야의 사각지대에서 검푸른 잉크 같은 잔상이 일렁였다. 클로드였다. 아니, 클로드가 남기고 간 죽음의 질량이었다. 그는 꼬따오의 눅눅한 초록빛 물속에서 사라졌지만, 그의 부재는 이토록 투명한 이시가키의 바다에서 비로소 완성되었다. 저 멀리 하얗게 드러난 모래 바닥, 산호 틈새의 어둠, 그리고 발목을 휘감는 차가운 수류 속에 죽음이 시퍼렇게 눈을 뜨고 있었다. 그녀의 폐가 서늘해졌다. 물의 온도가 아니라 기억의 온도였다. 호흡이 빨라지려던 찰나, 시야 한구석에서 빛이 반짝였다. 벤이었다. 그녀의 곁, 팔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서 벤이 천천히 유영하고 있었다.


그는 물을 가르는 것이 아니라 물결의 틈새로 부드럽게 스며들고 있었다. 살갗 위로 미끄러지는 물살, 마스크 끈에 눌린 금빛 머리카락의 하늘하늘한 움직임, 핀 끝에서 부서지는 미세한 물방울까지, 모든 것이 비현실적으로 또렷했다. 그리고 아름다웠다. 벤은 아무것도 몰랐다. 그녀가 뭍에서, 그리고 꼬따오에서 무엇을 보고 겪었는지. 어떤 비겁한 마음으로 도망쳤는지. 그의 푸른 눈에는 그저 인간에게 금기시된 물속 세상을 유영하는 육체만이 비치고 있었다.


그 무지가, 그토록 깨끗하고 무해한 벤의 무지(無知)가 그녀에게는 유일한 숨구멍이었다.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 애도하지 않아도 되는 평화였다. 벤은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그녀의 기억 밖에서, 오직 살아있는 현재의 빛으로 존재했다.


슈우욱, 후우우. 슈우욱, 후우우.


벤의 레귤레이터가 뱉어내는 공기 방울들이 은빛 수은처럼 흩어지며 수면을 향해 상승했다. 그녀는 홀린 듯 그 공기 방울을 바라보았다. 클로드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던 저 숨. 지금 자신이 벤과 함께 마시는 이 건조하고 차가운 공기가 얼마나 사치스러운 생(生)의 증거인가를 만끽했다.


벤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녀를 응시했다. 마스크 너머 그의 푸른 눈동자는 이시가키의 바다를 그대로 잘라 넣은 듯 깊고 투명했다. 그 눈 속에 비친 그녀는 겁에 질린 목격자도, 도망자도 아니었다. 그저 숨을 쉬고 존재하는 온전한 생명체였다. 지상에서 낭비했던 수많은 단어들, 사랑, 연민, 이해 같은 것들이 이곳에서는 무력했다. 지금 두 사람을 연결하는 것은 그런 가벼운 음성 신호가 아니었다. 그것은 생명을 담보로 한 연대였고, 서로의 호흡 소리를 확인하며 느끼는 본능적인 안도감이었다.


벤이 천천히 손을 들어 검지와 엄지를 둥글게 말아 보였다. ‘OK?’ 그녀는 잠시 망설였다. 정말 괜찮은가? 이 투명한 감옥 속에서, 기억의 유령들과 마주하면서도 나는 괜찮은가? 그녀는 벤의 눈을 깊이 들여다보았다. 흔들림 없는, 맑은 호수 같은 눈빛.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똑같은 수신호를 보냈다. ‘OK.’ 그 짧은 손짓은 단순한 안부 확인이 아니었다. ‘나는 기억의 심연 속에 잠기지 않았어. 당신이 있는 이 살아있는 세계에서 버티고 있어’라는 영혼의 답신이었다. 날카롭던 푸른빛이 비로소 부드러운 휘장처럼 그녀의 전신을 감쌌고, 귓가에 울리는 규칙적인 호흡 소리만이 세상의 유일한 리듬이 되는 완벽한 평온의 순간이었다. 이 투명한 공간은 더 이상 감옥이 아닌, 상처 입은 짐승이 웅크릴 수 있는 거대한 요람과도 같았다.


그때였다. 머리 위에서 쏟아지던 태양 빛이 순식간에 차단되었다. 마치 누군가 거대한 손바닥으로 하늘을 덮어버린 것처럼 투명했던 이시가키의 바다에 묵직한 어둠이 내려앉았다. 먹구름인가? 아니면 일식인가? 그녀는 본능적인 공포를 느끼며 고개를 들어 수면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숨을 멈췄다.


거대한 비행 물체. 아니, 그것은 살아있는 섬이었다. 만타였다.


양 날개 길이만 4~5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거대한 흑가오리 한 마리가 태양을 등지고 유유히 그녀의 머리 위를 활공하고 있었다. 녀석의 몸체가 빛을 가리자, 둘이 머물던 수심 20미터의 세상은 순식간에 시커먼 어둠 속으로 잠겼다. 가혹한 투명함이 사라진 자리가 압도적인 위엄으로 채워졌다. 녀석은 헤엄치는 것이 아니라 비행하고 있었다. 검은 벨벳으로 만든 듯한 거대한 날개는 물의 저항을 전혀 받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아주 느리고, 우아하고, 권태로울 만큼 여유로운 날갯짓. 한 번 펄럭일 때마다 수 톤의 바닷물이 소리 없이 밀려나고, 거대한 해류가 궤적을 따라 일렁였다.


심연의 황제였다. 지상의 그 어떤 생명체도 흉내 낼 수 없는 고결한 움직임이었다. 녀석은 자신을 올려다보는 두 인간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혹은 태초부터 이곳의 주인은 자신이었다는 듯 오만하고도 성스러운 자태로 그들의 머리 위를 천천히 선회했다.


그녀는 지금 자신이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었다. 조금 전까지 그녀를 괴롭히던 클로드의 잔상도, 자신의 초라한 죄책감도, 이 압도적인 자연의 경이로움 앞에서 먼지처럼 사소해졌다. 만타가 만들어 낸 거대한 그림자 안에서 그녀는 역설적이게도 가장 안전한 평화를 느꼈다. 그 어둠은 공포가 아니라 위대한 존재가 베풀어 주는 넓은 품 같았다.


녀석이 하얀 배를 드러내며 방향을 틀었다. 벤과 눈이 마주쳤다. 벤은 호흡기를 문 채 두 팔을 벌려 황홀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역시 이 신성한 알현 앞에서 순수한 소년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그 거대한 그림자가 머리 위를 완전히 지나쳐, 짙푸른 심연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시선을 떼지 못했다. 만타가 사라진 뒤에도 물결은 오랫동안 묵직하게 출렁였고, 그 여운은 그들 피부에 전율처럼 남아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잔압계의 바늘이 붉은색을 향해 기울자 벤이 엄지를 위로 치켜세웠다. 상승할 시간이었다. 두 사람은 아주 천천히, 물의 층계를 하나씩 밟고 올라갔다. 수심 5미터. 안전 정지를 위해 잠시 멈췄을 때 머리 위 수면에서 부서지는 태양 빛이 다시 거대한 빛의 커튼처럼 너울거렸다. 현실의 빛이었다. 수심이 얕아질수록 짙은 잉크빛은 서서히 코발트블루로, 다시 눈부신 에메랄드빛으로 산란했다. 입수 직전 시신경을 베어낼 듯 날카로웠던 그 가혹한 쪽빛은 이제 그녀의 낡고 곪은 상처를 도려내고 새 살을 돋게 하는 맑은 소독약처럼 느껴졌다. 그것은 두려운 무결함이 아니라,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깨끗한 백지 같은 파랑이었다.


수면을 뚫고 고개를 내밀자 훅, 하고 습하고 뜨거운 아열대의 공기가 폐부로 밀려 들어왔다. 비릿한 소금 냄새, 파도 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뱃고동 소리. 현기증이 날 만큼 선명한 산 자들의 세상이었다.


“푸-하.”


그녀는 마스크를 벗고 젖은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넘기며 거친 숨을 토해냈다. 다시 중력이 어깨를 짓눌렀지만, 마음 한구석에 똬리를 틀고 있던 납덩이같은 무게는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눈앞이 시릴 만큼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을 등지고, 벤도 역시 마스크를 벗었다. 물기를 머금어 짙어진 금발, 속눈썹 끝에 매달려 보석처럼 반짝이는 물방울. 그는 방금 전 심연 속의 신비로운 인도자가 아닌, 오래전 꼬따오 해변에서 보았던 그 장난기 가득한 무해한 소년의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벤은 곧바로 입을 떼지 못했다. 마스크 자국이 선명한 얼굴로, 방금 우리가 무엇을 본 것인지 믿을 수 없다는 듯 멍하니 수면 아래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가볍게 떨리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이내 터져 나오는 벅찬 숨을 고르며 고개를 들었다. 그는 태양보다 더 환하게, 죽음 따위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처럼 티 없이 맑게 웃어 보였다.


“와우… 하나 너. 진짜 다이버가 되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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