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은 왜 이병헌의 영어를 부끄러워하는가

나는 완벽한 문법보다 '살아남는 법'을 먼저 배웠다

by 조하나


미국 NBC의 간판 토크쇼 <레이트 나이트 위드 세스 마이어스>의 스튜디오.


박찬욱 감독의 신작 <어쩔수가없다(No Other Choice)>를 홍보하기 위해 출연한 배우 이병헌이 소파에 깊숙이 몸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쏟아지는 조명과 관객들의 환호 속에서 그는 여유로웠다. 진행자 세스 마이어스가 던지는 농담을 능청스럽게 받아치고, 때로는 좌중을 폭소케 하는 위트까지 선보였다. 그 순간 그곳에 '언어의 장벽'은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 현지의 관객들과 비평가들은 이병헌이 구사하는 문법의 정교함이 아니라, 그가 뿜어내는 '태도'와 '매력', 그리고 작품에 대한 깊은 이해도에 환호했다.


하지만 시선을 돌려 한국의 온라인 커뮤니티와 소셜 미디어를 들여다보았을 때, 나는 기이한 괴리감을 느꼈다. 스튜디오의 뜨거운 반응과는 대조적으로, 한국어 댓글창에는 싸늘한 냉소가 흐르고 있었다. "생각보다 발음이 별로네.", "월드 스타라더니 억양이 너무 토종 한국인 같다.", "듣기에 좀 투박해서 실망이다."


이것은 단순한 악플이 아니다. 한국 사회가 오랫동안 앓아온 지독한 병증의 징후다. 정작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그들은 아무런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데, 한국 토박이 배우가 한국인 특유의 억양을 가진 것을 두고 오히려 동포들이 부끄러워하며 검열의 칼날을 들이대는 현상은 기이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도대체 우리는 왜 우리의 혀를 이토록 부끄러워하게 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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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교육에 10조 원을 쓰고도 입을 닫은 나라: '4세 고시'의 비극


이 기시감은 낯설지가 않다. 십수 년 전,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취임 연설을 했을 때도 한국 사회는 똑같은 반응을 보였다. 당시 언어학자들이 진행한 흥미로운 실험이 있었다. 동일한 반 전 총장의 연설을 들려주었을 때, 원어민들은 "매우 고급스러운 어휘를 구사하며 논리 정연하다"며 극찬했다. 반면, 한국인 피실험자들은 "발음이 촌스럽다", "딱딱해서 듣기 거북하다"며 최하점을 줬다. 메시지의 본질보다 껍데기에 집착하는 이 한국인의 강박은 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


한국은 영어 사교육비로만 연간 10조 원 이상을 쏟아붓는 '영어 공화국'이다. 대한민국 초중고생이 영어 과목에만 1인당 월평균 26만 4천 원을 지출하며, 이는 모든 과목 중 가장 높은 금액이다. 이 나라에서는 만 4세가 되면 아이들이 소위 '영어 유치원' 레벨 테스트를 통과하기 위해 고액 과외를 받는다. 언론은 이를 두고 '4세 고시'라 부른다. 유아 대상 영어학원과 영어 유치원의 월평균 비용은 약 154만 5천 원으로 일반적인 대학 등록금의 두 배가 넘는 금액이다. 고등학생이 되면 셰익스피어도 울고 갈 만큼 난해하고 비비 꼬인 수능 영어 문제를 풀며 밤을 새운다. 한국의 수능 영어 문제는 원어민 교사들조차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며 혀를 내두를 정도로 악명이 높다.


이토록 국가적인 시간과 비용을 영어에 투자함에도 한국인은 성인이 된 후에도 영어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성인 시장은 정확한 통계가 잡히지 않지만, 업계에서는 온/오프라인을 합쳐 약 2~3조 원 규모로 추산하고 있다. 과거에는 토익/오픽 등 '점수 따기' 위주였다면, 최근에는 야나두, 스픽 같은 '회화/실전 앱' 시장이 커지고 있다. 이는 역설적으로 "학창 시절 내내 영어에 시간과 돈을 쏟아부었지만, 정작 말 한마디 못 하는 어른들"이 한국에 그만큼 많다는 방증이다.


그렇다면 이 천문학적인 비용과 노력의 결과는 무엇인가. 우리는 주변에서 흔히 본다. 토익 만점을 받고, 해외 어학연수 스펙을 갖춘 대기업의 엘리트 직장인들이, 정작 외국인 바이어가 회의실에 들어오면 입을 떼지 못한 채 서로의 눈치만 살피는 풍경을 목격하곤 한다. 이것은 개인의 무능 때문이 아니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는 '언어는 곧 자본'이라고 했다. 한국 사회에서 영어는 소통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계급을 구별 짓기 위한 '문화 자본'으로 변질되었다. 우리에게 영어는 '틀리면 안 되는 시험 문제'이자, 나의 지적 수준과 사회적 지위를 증명하는 신분증이다. "발음이 구리면 무시당한다", "문법이 틀리면 내 격이 떨어진다"는 공포. 이 두려움이 대한민국 전체를 거대한 '침묵의 영어' 감옥으로 몰아넣었다. 우리는 영어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영어를 통해 서로를 평가하고 탈락시키는 법을 배우고 있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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