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주의라는 종교, 가난은 왜 '밈'이 되었나
아버지에게 전해 들은 60~70년대의 학교 풍경은 지금의 감각으로는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어 마치 다른 차원의 판타지 소설처럼 느껴진다. 그 시절, 반에서 도시락 반찬이 유난히 화려하거나 좋은 옷을 입고 으스대던 소위 '부잣집 도련님'은 쉬는 시간마다 아이들에게 시기 섞인 눈총을 받거나 얻어터지기 일쑤였다고 한다. 심지어 은근한 따돌림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물론 폭력을 옹호할 수는 없지만, 그 기저에 깔려 있던 사회적 정서만큼은 곱씹어 볼 만하다.
당시의 가난은 누구 한 명의 잘못이 아닌,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시대의 풍경이었다. "우리는 모두 가난하다"는 공동의 비극이 있었기에, 그 속에서 혼자만 잘난 체하며 배부른 티를 내는 것은 공동체의 고통을 외면하는 '배신'이자 부도덕한 행위로 간주되었다. 즉, 가난이 부끄러움이 아니라, 부를 나눌 줄 모르는 태도가 부끄러움이던 시절이었다. 팍팍한 삶 속에서도 일종의 '평등한 가난'이 만든 거친 연대 의식이 작동했던 셈이다.
하지만 현대사회의 시계추는 정반대로 움직인다. 이제 학교에서, 그리고 더 거대하고 잔인해진 학교인 소셜 미디어에서 가난은 연대의 대상이 아니라 조롱과 멸시의 먹잇감이 되었다. 명품을 휘두르고 슈퍼카를 타는 10대, 20대의 모습에는 "영 앤 리치"라는 찬사가 쏟아지며 수만 개의 '좋아요'가 찍힌다. 반면, "빌거지(빌라 사는 거지)", "휴거(휴먼시아 거지)" 같은 끔찍한 신조어들이 아직 앳된 아이들의 입을 통해 아무렇지 않게 발화된다. 심지어 부유층 자제들이 재미 삼아 허름한 식당을 가거나 서민 체험을 하는 이른바 '가난 코스프레'는 힙한 놀이문화가 되어버렸다.
불과 반세기 만에 한국 사회는 '공동체주의적 빈곤'의 시대에서 '능력주의적 각자도생'의 정글로 급격히 변모했다. 이제 부는 단순한 화폐의 총량이 아니다. 그것은 그 사람이 얼마나 성실하고 유능하게 살았는지를 증명하는 '도덕적 성적표'가 되었다. 반대로 가난은 게으름과 무능력의 낙인이 찍혔다.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말은 농담이 아니라 생존의 철칙이 되었다. 부끄러움의 기준이 '도덕'에서 '통장 잔고'로 이동한 사회, 이것이 우리가 마주한 2026년의 서글픈 자화상이다.
이 자화상의 이면에는 통계가 증명하는 서늘한 진실이 자리 잡고 있다. 최근 발표된 자료에 따르면, 청년 고독사 비중은 5년 전과 비교해 약 20% 급증했으며, 그 기저에는 경제적 고립과 '실패한 인생'이라는 낙인이 깔려 있다. 또한, 소셜 미디어를 기반으로 한 온라인 혐오 범죄 접수 건수는 매년 역대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으며, 그 피해 대상의 대다수가 소득 수준이 낮은 취약계층이나 사회적 약자라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제 가난은 개인의 내면을 갉아먹는 우울을 넘어, 타인의 증오를 정당화하는 사회적 살해의 근거로 작동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변화의 메마른 토양 위에 스마트폰과 디지털 미디어가 기름을 부었다. 이러한 디지털 환경은 기성세대의 우려 섞인 한탄을 자아낸다. "요즘 애들은 왜 이렇게 패륜적이고 혐오 표현을 서슴지 않느냐"고. 하지만 냉정히 따져보자면, 이러한 현상은 비단 청년 세대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오늘날의 기성세대 역시 스마트폰 중독과 알고리즘이 만든 확증편향의 굴레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지하철이나 식당에서 스마트폰 화면에 매몰된 채 극단적인 정치 유튜브나 자극적인 가짜 뉴스를 소비하며, 댓글창에 서슴없이 혐오를 쏟아내는 장노년층의 모습은 이제 낯설지 않은 풍경이 되었다. 혐오는 세대를 가리지 않고 디지털이라는 도구를 타고 우리 삶 전반에 깊숙이 전이된 공통의 질병이 된 셈이다.
옛날에도 그런 사람은 있었다. 인간의 본성이 갑자기 악해진 것은 아니다. 다만, 그때는 혐오에 따르는 확실한 '비용'이 있었다. 동네 어귀에서, 혹은 학교 교실에서 입을 잘못 놀렸다가는 즉시 물리적 응징을 당하거나 사회적 평판이 박살 났다. 공동체의 감시망이 촘촘했기에 혐오스러운 생각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스스로 억제해야 했다.
하지만 온라인 세상은 이 모든 '비용'을 0으로 만들었다. 익명이라는 가면 뒤에서, 우리는 누구든 될 수 있고 누구든 욕할 수 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온라인 탈억제 효과'라고 부른다. 내 눈앞에 상대방이 없으니 때려도 내 주먹이 아프지 않고, 욕해도 맞을 일이 없다. 혐오의 가성비가 좋아진 것이다.
여기에 저성장 시대의 좌절감이 결합한다. 단군 이래 최고의 스펙을 갖췄지만 계층 이동의 사다리가 걷어 차인 청년 세대는 갈 곳 잃은 거대한 분노를 품고 있다. 그 분노를 눈에 보이지 않는 사회 구조나 거대 자본에게 돌리기엔 개인이 너무나 무력하다. 대신 가장 손쉬운 먹잇감인 약자, 여성, 노인, 혹은 자신과 다른 집단을 향해 배설한다. 온라인 커뮤니티의 알고리즘은 이 외로운 '확증편향에 갇힌 군중'을 전국, 아니 전 세계에서 한 곳에 모아주고, 서로의 혐오 발언에 추천을 누르며 증폭시킨다. 혐오는 이제 일종의 놀이이자, 무력한 개인이 사회에 복수하는 비뚤어진 효능감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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