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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마름모 Aug 19. 2020

불안

휴가

삶에서 가장 자주 마주하는 감정을 한 가지만 꼽으라면, '불안'이라고 말하겠다.

예상치 못한 변수들로 만들어진 세상에 살면서, 난 그 변수 하나하나에 불안으로 반응하며 살아가고 있으니까.

음, 그렇다면 세상은 변수들로 만들어진 게 아니고 불안으로 만들어진 것일까


크고 작은 불안들을 자주 마주하다 보면 익숙해질 법도 한데, 아직은 의연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


여름휴가로 고향에 다녀왔다. 몇 개월 만에 만난 아빠는 당뇨에 걸렸다. 흰쌀밥도, 빵도, 커피도, 아이스크림도 안 드신다. 엄마는 아빠의 식단을 준비하기 위해 나물을 무치고, 다시마를 데쳤다. 귀찮다며 최근 몇 년간 햇반을 먹던 우리 가족은 이제 5곡 곡물을 정성스레 섞어서 지은 오곡밥을 먹는다. 식단은 바뀌었지만 아빠는 그대로다. 맥주는 혈당 때문에 끊었다고 했다. 67년생인 우리 아빠는 담배 30개비로 낮을 버티고 소주 2병으로 밤을 버틴다. 아빠는 몇 년 사이에 살도 머리도 많이 빠졌다. 아빠 다움도 많이 빠졌다. 난 아빠를 빼닮았기 때문에 당신이 변해가는 모습이, 당신 다움이 빠진 당신이 조금 슬펐다. 불안했다.

아빠는 언젠가부터 술을 마시지 않고는 나와 눈을 잘 마주치지 못한다. 한 평생 자기 멋대로 행동해온 귀한 막내아들, 자기 마음처럼 흘러가지 않는 세월을 잡아서 손에 쥐어주고 싶지만 가능하지 않으니.. 그래. 불가능하다.


엄마는 욕심이 많은 사람이다. 성인이 되고서야 작은 손 뒤에 감춰둔 욕심들이 보였다. 어릴 때 엄마는 우리 자매에게 항상 희생의 아이콘이었다. 멋대로 행동하는 아빠를 항상 용서했다. 이해하고 배려하진 않았다. 하지만 항상 아빠를 도왔다. 3명이나 되는 자식들을 먹이고 입히고 재웠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엄마는 혼자 장례를 치르러 갔다. 어렸던 나와 동생들을 데리고 아빠는 미꾸라지를 잡아 죽을 쒀줬다. 더러운 부엌에서 미꾸라지 죽을 먹으며 엄마를 기다렸다. 엄마는 예쁘고 착하다. 야망 있고 매력적인 사람이다. 엄마는 가끔 모든 걸 포기한 마냥 말을 한다. 그럴 때면 난 엄마를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온 힘을 다해 엄마를 눈에 꾹꾹 집어넣는다. 아무 일도 없는데 그냥 불안해서 그렇게 한다.


글로 쓰니 왜 이렇게 불쌍해 보이는지 모르겠다. 우리 집은 아마도 중산층이었을 것이다. 평생 우리는 한 방에서 항상 같이 잤다. 다른 방도 있었지만 이상하게 항상 그랬다. 21살이 되어서야 다른 친구들의 가족들은 보통 한 방에서 다 같이 자지 않는다는 걸 알아차렸다. 부엌과 마루는 아무리 청소를 해도 곰팡이가 생겼다. 이사를 가고 싶었다.


매번 휴가의 마지막 날, 아빠는 버스터미널까지 나를 오토바이로 데려다준다.

난 이상하게 오늘 기분이 좋아 아빠 뒤에서 괜히 날씨가 덥다는 소리를 했다. 아빠는 여름이면 이 정도는 더워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코로나를 조심하라고 했다. 터미널에 도착해서는 짐을 내렸다. 뒤도 안 돌아보고 오토바이를 돌리는 아빠를 보며 '인사는 하자!' 소리쳤다. 아빠는 멋쩍게 웃었지만 여전히 눈은 마주치지 않았다.

'한 번 안아줄까?' 물으니 에이- 뭐 그런 걸 하냐고 하길래 조용히 가서 짧게 아빠를 안아봤다.

아빠는 작아졌고, 오토바이가 참 잘 어울리는 사람이 되었다.


갖가지 것들에 불안이라는 딱지들이 덕지덕지 붙어있다. 가족들에게도 나에게도 너무 많이 붙어있어 하나하나 떼어 내기가 버겁다. 떼어내도 끈끈한 자국이 남아 찝찝하다. 그러니 저 딱지 또한 우리 삶의 일부인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야만 저 마루 곰팡이 같은 불안과 함께 살아갈 수 있다. 앞이 깜깜하고 보이지 않아도 받아 들어야 한다. 아빠의 당뇨도, 엄마의 한숨도. 그 상황 자체를 불안해하다 보면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고 시간은 흐르니까, 그러니 우리는 빠르게 받아들이고 빠르게 헤쳐나가야 한다. 남은 날들을 불안에 절여진 채 죽어가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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