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내가 주목하는 것은,
나비가 된 애벌레가 아닌
'꽃들'이다.
꽃이 주인공이 아닌
이 책의 제목은
왜,
'꽃들에게 희망을' 이
되어야만 했을까에 대한.
어떤 단어 앞에 붙는 순간, 부정의 것으로 돌변시켜 버리는 형용사가 있다.
맹목적인 사랑
맹목적인 자유
맹목적인 믿음
맹목적인 긍정
맹목적인 선의
맹목적인 열정
맹목적인 희생
어떤가, 이들 중 어느 것 하나라도 좋은 뉘앙스가 풍겨오는 것이 있는가.
따로 떼어놓고 보면 아름다운 빛을 지닌 단어도, 이상하다. [맹목]이 붙으면, 갑자기 활활 붙어버린 불에 타 시꺼메져 버린다.
부정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는 단어는 어떠할까.
맹목적인 집착
맹목적인 복종
맹목적인 추종
쓰임에 따라 호의를 품을 수 있는 각각의 단어도, '맹목'만 붙으면 부정 중에서도 가장 극도의 지경까지 이르게 한다.
이렇듯 [맹목적]이라는 건 앞뒤 따지지 않고 그러니까, 우리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깊고 진득한 사고 기능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나의 의견은 어떠한지, 내 마음. 내 생각은 어떠한지 스스로 답할 찰나의 기회조차 주지 않고.
무언가에 홀린 듯, 무턱대고 뒤에 붙은 무언가에 매달리는 것을 뜻한다.
나는 우리 시대를 종종, 이런 [맹목적]이라는 단어를 붙여 생각하고는 하는데 시대에 뿌리 깊게 박힌 '경쟁과 추종'의 양상이 보일 때마다 그러하다.
그 영역이 점점 더 확장되가는 가상 세계의, 시대.
우리는 자칫 이 시대가 만드는, 덫에 걸려들 수 있는 것이다.
맹목적인 경쟁.
맹목적인 추종의 덫에.
마치 꼭대기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른 채, 내 존재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거대한 '죽음의 기둥'을 만들어내고 있는 애벌레들처럼.
눈을 가리고, 귀를 닫은 채 무작정 올라가기에 바쁜.
맹목적인 움직임에 붙잡혀 버린, 날아올라야 할 나비가 되지 못한 애벌레들처럼.
다소 유치할 수 있는 어린이들의 필독서.
'꽃들에게 희망을'을 책장에서 다시 꺼낸 이유는, 바로 이것에 대한 문제의식 때문이었다.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 스스로에 대한 문제의식.
나와 세상의 흐름 속에서 진자처럼 왔다 갔다 하면서 맹목적으로 수치를 생각했다가, 맹목적으로 타인의 방식을 따르며 나를 버릴까도 생각했다가.
그럼에도 내가 지키고 싶은 나의 색깔을 이 세상과 어떻게 어울리게 할 것인가를 끊임없이 고민하게 되는.
이, 나에 대한 솔직한 문제의식으로부터.
각 개인이 자신을 드러낼 수 있다는 건, 우리에게 축복 시대를 열어줌과 동시에 고통을 안겨주었다.
우리는 플랫폼이라는 공간에서 나를 맘껏 드러내며 나의 공간을 구축해가는 축복을 누리게 되었지만, 한편으로 그에 종속되어 부자유한 삶을 살고 있다.
나조차도, 이것을 부정할 수 있을까.
본질적으로 좋아요. 조회수, 팔로워 등 숫자로 움직이는 곳인 플랫폼은, 우리 활동을 즉각적으로 가시 화하는데.
전례 없이 도파민을 한 번에 터뜨리는 이 수치들은 또다시 다음 행동의 동기가 되고는 한다.
더욱이 우리 시대에 [수치]는 힘이자 권력이지 않은가.
문제는, 이러한 메커니즘이 자칫 우리를 맹목적인 궤도에 올려놓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올라타야만 낙원이 펼쳐질 거라는 맹목적인 추종의 궤도에.
그러나 이로 인해 단지, 수치가 행동의 동기가 되고 목적이 되는 삶은, 얼마나 불행한 것인지..
모두가 소위 '핫'한 주제에 뛰어들고 모두가 선호하는 형식에 맞춰 콘텐츠를 찍어내며.
끊임없이 타인의 시선과 반응에 빠져있는 동안.
진정 내가 지켜야 할 나의 가치, 살아내야 할 삶, 나로서 세상에 내보내야 할 메시지를 잃고 있는 것은 아닐지.
내가 되어야 할, 진짜 나의 모습을 잃어버린 채.
내가 날아다녀야 할 곳이 어디인지, 생각해 보지도 못한 채.
나의 안에는 날개가 숨겨져 있다는 것도, 알지 못한 채.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기로 했어.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다른 애들은
아무도 걱정하지 않는 것 같아.
그러니까 우리가 가는 곳은
틀림없이 멋진 곳일 거야"
경쟁은 사람과 사람이 부대끼어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 건강한 성장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나.
여기에 '나'라는 주체가 빠지면 나는 나로서 존재할 수 없고, 서로는 짓밟는 대상이 되어버린다.
무엇을 위해 경쟁하는지도 모른 채 서로를 밟고 올라가게 되어버리는.
맨 꼭대기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른 채, 올라선 그 누군가를 우러러보는 맹목적인 추종이 일어나면서.
이것은 어쩌면 우리 시대의 역설이다.
자유롭게 나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시대에,
오히려 수치에 묶이어 나 자신을 타인의 삶. 타인의 방식으로 바꾸어 버리게 되는 역설.
나로서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이 가장 크게 열린 시대에, '나로서 살지 못하는 삶'이라니.
맹목적인 추종이 가져오는 맹목적인 경쟁의 끝은, '나를 잃은 삶' 인 것이다.
잠시 높은 곳에 오를 수 있을지언정, [맹목]의 대가는 스스로 나의 날개를 꺾어버리는 비극이 될 것이다.
날아올라야 할 나비가 되지 못한 채, 거대한 기둥을 오르는 데만 삶을 바치는 '애벌레'인 채로.
"그런 이야기를 곧이듣다니,
너도 참 웃기는 애구나.
우리의 삶은 기어다니다가
기어오르는 거야.
우리 모습을 봐!
어느 구석에 나비가 들어 있겠어.
이런 몸뚱이나마 최대한 이용해서,
애벌레의 삶이나
열심히 즐기라고! "
방향을 돌려보는 것이다.
진정 나 자신으로 살기 위해 내가 가장 먼저 선택해야 할 것은.
아래로 내려오는 것을 선택해 보는 것. 반대의 방향으로 향해보는 것.
겹겹이 쌓여 서로를 짓누르고 있는 맹목적인 추종과 무의미의 더미에서, 흐름을 끊고 내려와 보는 것이다.
내려와야만 그 과정에서 보이는 것이 있다.
꼭대기로만 향해있는 시선을 돌려야만 볼 수 있는 것이 있다.
그건, 날고 있는 나비.
궁극적으로 되어야 할, 나의 모습.
사실 내 안에 꽁꽁 숨기어져 있는 진짜 나의 날개.
기어올라갈 것이 아니라, 펄렁이며 가벼이 날아오르게 할 진짜 나의 날개.
실은 속에서 꿈틀대고 있는 '날아오름에 대한' 진짜 열망.
그래서 그렇게도 높은 곳을 올라가려 했던 나의 진실되고 투명한 본능.
꼭대기 향한 마음을 돌려야만 마주할 수 있는 것이 이렇듯, 있는 것이다.
그러고 나면 나는, 우리는 스스로 깊은 침묵에 들어가게 되겠지.
실을 뽑아 나를 감으며, 그 어느 곳도 아닌 '나'에게 깊이 들어가는 공간을 만들면서.
높은 기둥이 아닌 흙바닥의 메마른 가지에 붙어 있는 자신이 두렵기도 할 테지만, 오래 견뎌야 하는 시간이 초조하기도 할 테지만, 그 누구와도 같지 않은 방식이 불안하기도 할 테지만.
마침내 나비가 되어 꽃 사이를, 나뭇잎 위를, 하늘의 한복판을 날고 있는 나를 만나게 되겠지.
침묵의 시간은 내 속에 들어있는 나비의 모습을 꺼내어 내는 시간이었다는걸, 비로소 깨달으면서.
나로서 깊어지는 시간이었다는걸, 비로소 알게 되면서.
"힘들게 기어오르지 않고도
어떻게 이렇게 높이까지
올 수 있을까"
.
.
호랑 애벌레는 새삼 깨달았습니다.
높이 오르려는 본능을
그동안 얼마나 잘못 생각했는지.
'꼭대기'에 오르려면
기어오르는 게 아니라
날아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나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결국 내가 주목하는 것은, 나비가 된 애벌레보다는 그들이 만난, '꽃들'이다.
왜 '꽃들'이 주인공이 아닌 이 책의 제목은, '꽃들에게 희망을'이 되어야만 했을까에 대한.
그것은, 존재의 이유에 대한 것이었다.
누군가가 아닌, 나로서 존재해야 하는 이유.
누군가를 따라 사는 삶이 아닌, 나의 색깔로서 사는 삶이어야 하는 이유.
그러한 내가 되기까지.
때로 어두움과 고독한 침묵의 시간을 버텨내야 하면서도, 나비의 삶으로 다시 태어나야 하는 이유.
그것은, 단지 나 자신의 '성취'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꽃들을 위한 것.
생명을 위한 것.
세상을 위한 것.
내가 나비가 되지 못하면, 꽃들은 살아남을 수 없는 거였다.
내가 모두가 오르는 높은 곳에만 매달려 있으면, 생명은 다시 움틀 수가 없는 거였다.
내가 오랜 시간 나를 다듬는 순간을 보내지 않으면, 세상에 아름다운 향기는 더 이상 없는 거였다.
지금 애벌레일 뿐인 나는, 그러나 꽃들에게는 생명의 희망임을.
내 안의 나를 믿으며 진짜 나로 살아가기를 선택했을 때, 마침내 생명을 피워낼 나비로 날게 될 것임을.
나비가 된다는 건, 단지 '변화'의 상징이 아닌 '존재의 이유'를 되찾는 것임을.
비로소 하게 될 나의 날갯짓은, 누군가의 생명을 피워내기 위함이라는 것임을.
그러니 나다움을 찾는다는 건, 나로서 산다는 건.
단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다.
누군가를 위한 것.
생명을 위한 것.
세상을 위한 것.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위해 지음 받았으며, 나로서 살아갈 때에만 서로에게 생명을 주는 존재가 된다는 것을.
이 시대를 살아갈 때마다, 내 빛을 지우려는 유혹이 다가올 때마다, 나를 찾고 나를 만드는 침묵의 시간이 두려워질 때마다.
마음에서 꺼내어 기억해 보려 한다.
희망이 될, 나의 존재에 대해.
변화가 일어나는 동안,
고치 밖에서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나비는 이미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란다.
다만 시간이 걸릴 뿐이지.
그것만이 아니란다.
일단 나비가 되면,
너는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어.
새로운 생명을 만드는 사랑을 말이다.
그런 사랑은,
서로 껴안는 게 고작인
애벌레들의 사랑보다
훨씬 좋은 것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