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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어나는 사랑, 저무는 애정

by 하난

흐린 하늘이었다. 곧 비가 쏟아질 듯해 발걸음을 서두른다. 느적이며 길을 막는 사람들을 헤치고 골목을 도는 순간, 어디선가 낯선 운율이 흘렀다. 홀린 듯 음을 쫓았다. 톡, 튀었다 부드럽게 흐르는 음. 어딘가 아련하고 단정한 곡은 한 손에서 뻗어져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올곧게 뻗은 연한 빛 손을 지녔다. 그녀의 손가락이 움직임에 따라 각기 다른 소리가 울리었고, 그것이 곧 세상이 되었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이미 그녀 앞이었다. 그녀의 시선 또한 나를 향했고, 우리는 그렇게 만났다.


그녀와의 잦은 만남은 우연 혹은 어떠한 알아차림이었다. 저녁이면 바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그녀는, 자주 가는 식당의 직원이었고, 두 칸 건너 집의 커다란 개 주인이었다. 산책하며, 식사를 하며 계속해서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가 눈에 걸렸다.


그녀와 시선이 마주치는 날이 늘어가고, 우리는 사랑에 빠졌다. 영원을 약속하는 열렬한 애정은 아니었으나 따스하고 어지러운 사랑이었다.


그랬기에 몰랐다. 격렬히 피어오르는 불꽃만이 순식간에 식는 줄로만 알았다. 잔잔한 따스함은 지속될 줄 알았다. 한번의 피어오름이라도 그것이 크다면 계속해서 파장이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걸, 뒤늦게야 알아버렸다.


이별은 갑작스러웠고, 또한 당연했다. 우리는 서로에게 무심했고, 각자의 열정에 바빴다.


그날, 회색빛 건물이 조명에 빛나는 날, 강가 앞에서 우리는 결별했다.


그날 본 풍경이 오늘에서야 다시 눈에 들어오는 건 왜일까. 이미 수년이 흐르고서야 다시금 그날이 생각나는 건 왜일까.


'이경준 작가 사진전'의 첫번째 사진을 보고 떠올린 장면이다. 친구의 권유로 예상치 못하게 방문한 사진전은 온통 세상과 사람으로 가득했다.


어스름한 빛 아래 반짝이는 무채색 건물들, 피어나는 사랑과 저무는 애정. 수평 수직을 맞춘 늘어선 건물 아래 저마다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사진전은 상이함과 조화를 담고 있었다.


어떤 사진은 꺄르륵거리는 아이들의 뛰노는 모습을 상기시키고, 또 어떤 사진은 허덕이며 즐길 준비를 하는 가장과 이미 신난 가족 구성원의 대비를 보여줬다.


어두운 공간 속, 사진의 반짝임은 꼭 밤하늘 같기도 해 어여쁘다.


사진은 작가의 시선을 담는다.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그가 삶을 대하는 태도를.


이경준 작가는 세상이 못내 좋았나보다.


문득 나도 글로 전시회를 열고 싶다고 소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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