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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봄의 흐림

집단상담

by 하난

무더운 날이었다. 성난 햇빛을 피하기 위해 우산을 들었음에도 열기가 머리 끝까지 올라 얼굴이 터질 듯했다. 학교 중앙에 위치한 건물 4층의 집단상담실에 도착하고서야 겨우 흐르는 땀을 훔칠 수 있었다.

오늘은 '마음사용설명서'라는 이름으로 진행되는 집단상담의 첫날이었다. 학교에 상담원이 존재한다는 건 알았으나 방문해 본 적은 없었던 탓에 어색하게 미리 공고받은 곳으로 향했다.

그곳은 꼭 병원 같기도 했고, 어떤 센터 같기도 했다. 밝은 빛의 색을 머금은 방과 은은하게 흐르는 선율. 나긋한 목소리의 선생님들과 여기저기 구비된 간식이 인상적이었다.

집단상담실은 들어가서 우측에 위치한 방이었다. 방에 들어가자 원형으로 놓인 8개의 테이블이 보였다. 선생님을 포함한 총 8명의 인원이 4주간의 프로그램에 함께 할 멤버였다.

나는 가장 먼저 도착해 어색하게 문가 바로 앞 자리에 자리잡았다. 곧이어 사람들이 들어오고 1시 정각이 되자 고요한 분위기에서 상담이 시작되었다.

여느 상담과 비슷하게 처음은 사전 심리 검사 및 규칙 설명으로 이루어졌다. 돌아가면서 규칙을 읽고, 우리들만의 추가적인 규칙을 만들기도 했다.

그 후에는 자기소개를 했는데 익숙하면서도 재밌는 자기소개였다. 우리는 각자 스스로를 동물, 날씨, 색깔로 표현해야 했다. 돌아가면서 왜 이 동물, 날씨, 색깔로 자신을 표현했는지 이야기했는데 이게 퍽 즐거웠다.

사실 방식이 대단히 특별하거나 생소한 건 아니었다. 다른 여느 모임에서도 해 본 것이었고, 그닥 재밌었던 적은 없었다. 때문에 처음 이 질문지를 받았을 때 실망스럽기도 했다. 이런 진부한 짓을 해야한다니, 또 다시 견디는 시간이 왔구나 싶었다.

그런데 오늘, 처음으로 깨달았다. 이 질문이 잘못된 게 아니었음을. 이 물음들이 자신을 알리고 소통하는 데 퍽 유용한 것이었음을!

모임에 온 사람들은 그저 단순히 자신을 단어로 표현하지 않았다. 날씨에 대해 이야기해보자면, '선선한 바람이 부른 맑은 가을의 오후'라든지, '해가 비치는 와중 흩뿌리는 비' 따위로 표현했다. 그에 대해 이야기하며 자신의 삶과 지향점을 풀어나갔는데, 그 이야기들이 하나같이 생동감 넘쳤다.- 참고로 나는 동물은 '개냥이 출신 길고양이'로, 날씨는 '늦봄의 흐림'으로, 색깔은 '아이보리'로 표현했다. 대부분 모순과 관련되어 있는데, 첫번째 동물은 사람에 대한 애정과 경계가 동시에 있는 심리를, 늦봄의 봄은 선선하다기에도 덥다기에도 모호한, 어여쁘지도 처연하지도 않은 애매함을 표현했다. 마지막 색상은 모든 걸 포용할 듯 하지만 사실은 자기만의 색으로 편견을 보이는 모습을 나타냈다. 모두 나의 가장 큰 고민인 '모순'을 표현한 것이다.

이후에는 이 모임에서 불렸으면 하는 별칭과 목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양한 별칭이 나왔고, 또 다양한 목표와 기대가 나왔다. 그러나 공통점이 하나 있다면 모두가 '자기 이해'를 바랐다는 것이다.

때문에 자신에 대해 얘기하며, 고민과 바뀌었으면 하는 것들, 자신의 고유한 특성들을 많이 얘기했는데 그중 부정적인 감정을 어떻게 다루냐에 대한 논의가 기억에 남는다.

노랑을 사랑하는 사람은 흘려보내려고 한다고 했다. 굳이 생각하지 않고, 훌훌 날려버리려 한다고.

봄과 여름 그 사이의 오후를 좋아하는 사람은 모든 원인을 분석하여 다시금 그런 상황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려 한다고 했다.

오묘한 매력이 있는 사람은 오히려 더 부정적인 감정으로 다가간다고 했다. 그 감정이 바닥을 찌고 흩어지도록.

어떤 방법이 맞는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어떤 날은 감정을 마주하기가 너무 버거워 마주 하는 것만으로 고통에 허덕이기도 한다. 너무 아프고 무거워서 그럴 때면 오히려 감정을 외면하고 보내버리는 게 나은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또 한켠으로는 그렇게 보낸 감정들은 정말 보내졌을까 의문이 든다. 때문에 그 감정들을 헤집고 끊임없는 물음 끝에 언어화하기도 한다. 그 감정에 마침표를 찍고 싶어서.

감정을 쓰는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다. 그러다보면, 어느날은 지독하게 괴롭다. 다시금 그 감정에 다가가는 게 못견디게 외롭다. 반면 어느날은 첫 자유를 맞이한 사람마냥 자유롭다.

둘 모두를 겪어봤기에 여전히 어떤 게 더 나은지는 모르겠다. 그저 시도해 볼 뿐이다.




목표에 대해 이야기하며, 나의 오랜 우울과 불안에 대해 털어놓았다. 이것을 떨쳐내려면 '나'를 알아야할 것 같다고, 그래서 이 자리에 왔노라고 했다.

누군가는 울었고, 누군가는 질문했다. 어떤 이는 공감에 끄덕였으며 어떤 사람은 그저 묵묵히 자리를 지켰다.

눈물이 났다. 처음 꺼내보인 이야기도 아니고, 친구나 연인에게도 털어놨던 것인데 이상하게 후련했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의 긍정은 그토록 힘이 있었다.

자기소개로 끝난 첫날이었으나 그로 인해 풍족했다. 그것만으로도 가득 찼다.

별다른 설명이 없어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시작한 집단상담. 그 끝이 기대되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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