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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논어>를 읽고

by 하난

사랑할 때는 그가 살기를 바라고 미워할 때는 그가 죽기를 바란다.그가 살기를 바라면서도 또 그가 죽기를 바라는 것은 의혹(미혹)이다.
-논어 <안연> 중-

‘사랑’. 사랑은 참 여러 곳에서 다양하게 말해진다. 도깨비, 눈물의 여왕 등 유명한 연애 드라마, 나의 아저씨, 대도시의 사랑법 등 우정이라는 사랑을 담은 이야기, 사랑을 모티브로 한 각종 노래와 시들. 어느 모임에 가든 사람들은 사랑할 만한, 사랑해 줄 법한사람을 물색하고 여기저기서 사랑이 물 트고 식어간다. 그토록 사람들이 찾아 헤맨, 이제는 상투적인 말로도 들리는 ‘사랑’은 대체 무엇일까.


사랑에 대해 염세적이었던 적이 있다. 아이들의 연애담이 시시껄렁한 노닥거리로만 보이고, 각종 사랑을 모티브로 한 이야기들은 진부하고 따분했다. 다들 연애에 목매다는 시기, 사랑에서는 한 걸음 물러나 나만의 지향을 쫓는 스스로가 여타 다른 이들과는 다른특별한 사람처럼 느껴져 그에 도취되기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아이돌의 부고 소식을 들었다. 여느 날과 다름없는 날이었다. 점심시간, 학교에는 노래가 울렸고 한 아이가 주저앉아 울부짖었다. 불쌍하다고, 안타깝다고우는 아이에 당황해하자 주위에서 저 친구가 가장 좋아하는 아이돌이 전날 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상대는 저의 존재도 모르는 상황에서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사람의 죽음이 그토록 슬플까. 저 감정의 연원은 무엇일까. 아이돌을 좋아하는 이들을 유치하게만 바라봤던 내게 그것은 처음으로 저들을 궁금해하게 한 계기였다.


몇 년이 흘렀을까, 아이돌을 좋아하는 이들의 말을 듣고도 확 와 닿지는 않던 어느 날, 아이돌이 주인공인 소설을 읽게 되었다. 나는 소설을 퍽 좋아했는데, 고등학교 1학년 때E북 도서 구매 내역이 만 건에 달할 정도였다. 늘 판타지, 드라마, 성장 소설을 보던 내게 이세계 아이돌물은 다소 거리낌이 있었다.


친한 친구의 권유를 가장한 강제에 의해 읽게 된 소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은일평생, 단연코 인생 최고의 소설 중 하나로 꼽힐 것이다.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속칭 데못죽은 사랑받고 싶었던, 사랑하고 싶었던 한 청년의 이야기였다. 소설은 아이돌들이 겪는 부당한 대우, 가족에 대한 개념, 우정과 비즈니스의 관계, 자아에 대한 개념등을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끌어갔다. 박동하는 이들의 삶에 참 많이도 웃고 울었다.


처음으로, 제대로 그때 울었던 아이의 심경에 공감했다.


소위 ‘덕질’은 어떤 것을 좋아해 깊이 몰두하고 찾아보며 즐거워하는 것이다. 나는 일평생을 소설 덕질을 하고도 그것의 본질이 사랑임을 모르고 있었다. 사랑을 하면서도 그것이 사랑인지 인지하지 못한 것이다.


어떤 것을 보고 가슴이 뛰고, 설령 아무도 몰라준대도 깊이 그것을 들여다보고 그것에공감하고 애정한다면, 그것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소설도 아이돌도 그런 맥락에서의 사랑이었으며, 진부한 언어가 된 ‘사랑’은 사람을 그토록 몰아넣을 수도, 웃게 할 수도 있는 강력한 힘이었다.



내게 지금 애인은 거의 처음 사귄 사람이다. 이전에 한 번 다른 이와 만남을 가진 적은있으나, 한 달이라는 짧은 기간이었고 서로를 좋아하기보다는 외로운 마음에 만났던 것이라 진짜 연애라 할 법한 것은 지금이 처음이다.


애인과 처음 만난 곳은 독서 모임이었다. 약 2년간 다닌 독서 모임, 수능 준비로 한동안방문하지 않다 너무 사람을 만나지 않는 것 같아 1년여 만에 다시 간 날이었다. 그곳에서 애인과 나는 같은 조가 되었다. 나는 <법이 이름이 될 때>라는 책을, 애인은 <싯타르타>를 발표했다. 그는 작문을 즐겼는데, 나도 브런치 작가로 활동하며 글쓰기에 관심이 많았던 지라 우리는 자연스레 서로의 연락처를 교환하게 되었다.


한창 수능을 앞두고 치열한 나날을 보내고 있기도 했고, 그도 일이 성수기인 시즌이라우리는 그 뒤로 약 2주간 보지 못했다. 그저 카톡을 하거나 인스타로 연락을 주고받을뿐이었다. 그렇기에 2주 후, 처음으로 서로를 따로 만난 날에 두 사람 모두 고백 편지를가지고 온 것은 낭만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은 장기적으로 봐야 한다는 모토가 있음에도 단 2주 만에 연애를 결심하게 된 이유는, 그와의 대화가 무척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우리는 틈틈이 시간이 날 때마다 각종 이야기를 나누었다. 성애적 사랑과 우정의 차이는 무엇일까, 자아는 어떻게 확립되며 우리는 ‘나’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좋은 사람이 좋은 사람을 부르는 것일까, 좋은 사람들 사이에서 좋은 사람이 되는 걸까. 무수한 철학적 사유를 나누었고, 흔한 직장 상사 혹은 친구의 험담을 나누기도 했다. 강아지를 자랑하기도 했고, 삶의 굴곡을 취하듯 털어놓기도 했다.


그는 ‘나의 언어에 힘이 있으면 좋겠다’고 했으며, 그 모든 순간 자신의 이상을 이루기위해 힘썼다. 어휘를 고르고, 지키지 못할 말을 삼가며, 상대의 말을 수용했다.


그와 만남을 가진 지 이제 일 년이 되어간다. 그동안 싸우기도 많이 싸웠지만 여전히그는 존경스러운 인물이며, 사랑하는 연인이다.


그를 보며 공자를 떠올렸고, 공자를 보며 그를 떠올렸다. 나는 어려서부터 사람이란 무엇인지, 무엇을 위해 사는지를 궁금해했기에 중학생, 고등학생 시기를 거치며 제자백가및 각종 사상가에 대한 학습을 했다. 얕은 공부였으나 공자에 대해서도 알아본 바 있었기에 애인의 언행이 꼭 공자 같다고 느꼈고, 실제로 그렇게 말하기도 했다.


그리고 <논어>를 배우며 더더욱 그 생각이 견고해져갔다. 공자가 말하는 사랑은 ‘사랑할 때는 그가 살기를 바라고 미워할 때는 그가 죽기를 바라는’ 사랑이다.


이때 살기를 바란다는 것을 다양하게 해석 가능하나, 나는 상대가 상대로 서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저 ‘생’을 이어가는 것이 아닌, ‘삶’을 살아가는 것. 그에 이바지하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이다.


애인은 늘 그러곤 했다. 애인은 나보다 연상으로 우리는 나이 차가 조금 난다. 당연히도그는 나에 비해 많은 사람을 만났으며 경험이 많다. 그는 그의 경험과 지혜를 토대로 나를 갈고 닦아주려, 내가 스스로 설 수 있도록 노력했다. 내가 해 본 적 없는 것을 해보도록 하고, 먹어보지 않은 음식을 먹어보도록 했으며, 사람들에 대한, 사물에 대한 새로운관점을 알려주며 스스로 생각할 여지를 터 주었다.


일례로 그의 지인이 하는 테크노 공연에 간 적이 있다. 쿵쿵거리는 음악은 그저 정신없고 난잡하며 약간은 저속하다 생각한 내게 그것은 충격이었다. 심장까지 울리는 박동, 지그시 눈을 감을 때면 떠오르는 각종 색채와 장면들. 그곳은 음악으로 삶을 표현하는 곳이자, 삶을 음악에 담은 곳이었다. 그는 그런 식으로 나의 편견을 깼다.


그와 관련하여, 논어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질이 문을 넘어서면 촌스럽고, 문이 질을 넘어서면 겉치레에 흐르게 된다.문과 질이 알맞게 조화를 이룬 뒤에야 군자답게 된다.”


해당 문장에서의 ‘질’을 생각, 사고, 가치관 등으로, ‘문’을 표현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잠시 유보하고, 질을 ‘내적인 것’으로, 문을 ‘외적 모습’으로 생각해 논해보고 싶다.


나는 내적인 것에 치중한 사람이었다. 내 내면을 닦는다면 나 스스로 바르게 되고, 그리된다면 남들에게 굳이 알아봐 달라 하지 않더라도 자연히 인정을 받게 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애인은 꾸미지 않는 내게, 사람들이 결국 처음에 의존하는 것은 시각이기 때문에어느 정도 스스로의 겉모습을 가다듬고 꾸미는 것은 필요하다고 했다. 그런 류의 말을많이 들어왔으나 대부분이 그저 그런 잔소리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애인의 말은 사뭇 다르게 느껴졌다. “네가 겉모습으로 무시당하지 않길 바라.”라는 그의 눈은 나에대한 염려와 어떠한 류의 기대가 어려있었다. 퍽 나쁘지 않았다. 아니, 꽤 기뻤던 것 같다. 단순히 나를 인형 취급하는 것이 아닌, 내가 사회에서 받는 대우를 걱정하고, 어디서든 당당하고 인정받길 바라는 간절함이 기꺼웠다. 이후로는 자세를 비롯하여 머리, 옷차림 등을 이전보다 신경 썼던 것 같다. 그는 적극적으로 코디해 주고 자세를 바로잡아줬으며 운동을 알려줬다. 실제로 겉모습의 변화는 큰효과를 낳았다. 어디에 가든 이상한 사람이 꼬이기 일쑤였던 내게 사람들이 정중하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귀여워하거나 하찮게 보던 이들도 내가 하는 말을 사람 대 사람의 언어로 수용해 주기 시작했다.


문득, 고등학생 시절 윤리와 사상 선생님께서 하셨던 말이 생각났다.


“교복을 불편하게 만든 까닭은, 불편함 속에서 바로 서는 법을 배우기 때문이다. 옷차림이 바를 때, 그것이 태도와 품성으로 드러나곤 한다.”


내적인 것이 외적인 것에 영향을 끼치는 것도 맞으나, 외적인 것 또한 내적인 것에 영향을 미친다. 타이트한 옷을 입으면 자세를 바르게 하게 되고, 자세가 바르면 경청하며가다듬게 된다. 이가 쌓이면 곧 품행이 되기도 한다. 때문에 질과 문의 균형은 중요하다. 애인은 그를 알려주었다.


더불어 처음 말한 것처럼 ‘질’을 ‘마음’으로, ‘문’을 ‘표현’으로 해석할 경우에도, 이는 나의 사상과 일치한다. 나는 늘 발화자의 중요성을 생각했다. 대화와 관계는 발화자와 청자의 상호 소통이며 이에는 양측이 모두 중요하다. 그러나, 발화자가 더 많은 책임을 지고, 적극적이고 세심하게 자신의 역할을 행해야 한다. 마음은 그 무엇보다 중요하나, 적절한표현으로 드러나지 않은 마음만큼 폭력적인 것 또한 없다. 때문에 발화자는 저의 ‘문’이폭력이 되지 않도록, 자신의 마음과 언어에 책임을 져야 한다.


“알아들었지?”로 퉁치는 무책임한 발화자에 염증을 느끼던 나였기에 이러한 발화의 책임을 다하는 애인과 그를 역설하는 논어의 구절은 더욱 강하게 와닿았다.


공자의 말과 관련하여 또 하나 논하고 싶은 것이 있다.


“사랑한다고 하여, 어찌 수고롭게 하지 않겠는가?충심으로 대한다면, 어찌 가르쳐주고 싶은 마음이 없겠는가?”


해당 문장에 대해서도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어떤 자는 사랑하기만 하고 수고롭게하지 않는다면 짐승이 그 새끼를 사랑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석하기도 하고, 어떤자들은 사랑한다면 귀찮음을 무릅쓸 수 있으며, 상대에게 진실되다면 가르치게 된다고해석하기도 한다.


둘 다 합당한 해석이라 여긴다.


애인은 전자를 특히 많이 행하는 사람이다. 자신이 하면 일찍 끝낼 수 있는 것도 일부러 나를 불러 하나하나 가르쳐준다. 실수하거나 잘못해도 화내지 않고 처음부터 다시 알려준다. 예로, 그는 요리를 퍽 잘하는데 나는 요리엔 영 재능이 없다. 정확히는, 요리를시도해 본 적이 거의 없다.


자취를 시작한 내게 그는 종종 집에 와 요리를 알려주었다. 그가 하면 10분이면 끝날것을 하나하나 가르쳐주었다. 채소를 다듬을 때는 어떻게 해야 안전하게 잘할 수 있는지, 구울 때는 어떤 식으로 해야 하는지, 웍질을 할 때 어떤 부분을 주의해야 하는지를 알려주고 내가 한 요리를 맛보게 했다. 요리를 하고 나선 늘 칭찬한 후, 부족한 부분이 무엇인지 물었다. 내가 고민 끝에 답을 내면, 그는 그런 문제에 직면했을 때 어떻게 해결할수 있는지를 설명해 준다.


그는 늘 나를 수고롭게 한다. 그것이 그의 사랑 방식이며, 또한 공자의 사랑 방식이다.내게는 이론적으로만 닿았던 그들의 사랑법을, 실전을 통해 배워나가는 중이다.


후자의 해석, 즉 사랑은 귀찮음을 견디는 것이라는 해석은 꽤나 잘 와닿는다. 6여 년 전부터 강아지를 키웠는데, 강아지 한 마리를 키우기란 여간 신경 쓸 게 많은 게 아니다. 사소한 배변부터 식사, 예절, 산책 등등. 특히나 강아지가 어리다면 온 집안이 난장판이되어 인내심을 시험당한다. 그런데 재밌는 점은, 집에 있는 소파를 뜯고 벽지를 뜯어내고, 아끼는 옷을 헤집어도, 오히려 더더욱 강아지를 사랑하게 된다는 점이다. 화를 내다가도웃음이 나오고 귀를 접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강아지를 어루만지게 된다는 점이다.


사람도 그랬다. 애인이 오는 날이면 피곤해 죽을 것 같아도 집먼지 알레르기가 있는 그를 위해 집 청소를 하고, 그가 좋아하는 물건이 보이면 바쁜 걸음을 멈추고도 잠시 가게에 들른다. 졸리는 와중에도 편지를 쓰고 전화를 한다.


그런 맥락에서 사랑은 수고로움이다. 상대를 향한 나의 수고로움이며, 나에 대한 상대의수고로움이다. 이는 공자의 배움에 대한 이야기와도 연결될 수 있다.


논어는 배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널리 배우고 뜻을 돈독히 하며, 간절하게 묻고 가까운 것에서부터 생각해 나간다면,인은 그 가운데 있게 될 것이다.”

-자장6-


박학 독지 절문 근사. 학문적으로나 일상적으로나 널리 배우고, 자신이 무엇을 위해 공부하는지 방향성을 설정하며, 적극적으로 질문하고, 가까운 것들에 자신의 배움을 적용해나가는 것. 그것이 논어에서 말하는 ‘배움’이다.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종잡을 수 없어 터득하지 못하고,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

-위정15-


논어는 자신의 뜻을 정하고 이것저것 많이 들으며, 그에 대해 생각하고 질문하며 생각한 바를 삶에 적용해 나가길 바란다. 어릴 적, 정말 많은 가르침을 주었던 역사 선생님의모토가 이와 같았다. 그분은 늘 우리가 생각하길 바라셨고, 적극적으로 묻고 생각한 것을생에 적용하길 바라셨다. 위안부 관련 문제, 독립운동 이야기를 하며 눈물을 보이고, 아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시던 그 분은 내게 여전히 아름다운 롤모델이시다. 때문에 그분이 말씀하신 바를 이루려고 무던히도 애썼다.


학교에서 배운 것이 있으면 집에서 혼자 설명해 보고 그것이 왜 그런지, 합당한 것인지를 스스로 끝없이 질문했다. 혼자서 답을 찾을 수 없으면 친구들 혹은 선생님들과 담론하고 그래도 답이 나지 않는 것은 필기해 놓은 채 답을 유보하곤 했다. 근래에도 그 과정은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데, 대학에 들어오고서는 특히 더 그러한 것 같다. 이에는 또다시 애인과 변화한 교육 체제의 특징이 기여했다.


애인은 소위 ‘싸움꾼’이다. 그는 언쟁을 즐기고 담론에 열광한다. 그는 끝없이 고민하고반박하고 반박당하며 합리적이고 보다 나은 답을 궁구해가는 것은 즐긴다. 때문에 나는인생을 총 통틀어도 지금에 이르지 못할 만큼의 토론을 하고 있다. 우리의 대화는 부드럽게 혹은 다소 뾰족하게 진행되며, 어떠한 경우든 분석과 의견 교환을 토대로 한다. 이것이 지치기도 하지만 꽤나 즐겁다. 그는 나와 상당히 다른 사람이어서 그만의 독특한견해들은 반발심과 함께 호기심과 즐거움을 불러온다.


학교 체제도 토론과 생각 교환을 기본으로 하고 있어 상당히 즐겁다. 특히 지금은 토론수업만 두 개를 듣고 있는데 그때면 늘 중구난방, 가끔 보면 터무니없는 생각들이 여기저기서 터지고 융화되는 게 퍽 재미있다. 교수님께서 견해를 말씀하시면 우리는 치열하게 묻고 공격하고, 공격당하며 의견을 교환한다. 그저 위에서 아래로의 수업이 아닌, 상호 소통을 기반으로 한 수업은 꿈에 그리던 이상이자 즐거움이다. 덕분에 과로로 허덕이면서도 그 어느 때보다 즐거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사랑과 관련하여 이런 배움을 논한 까닭은, 이 또한 수고로움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견해를 전하고 묻고, 그에 대해 고민하고 반박하는 모든 과정은 어느 정도의 애정이 없다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치열함은 증오 아니면 애정의 경우에만 가능하며, 일상적 상황에서는 대부분 애정에 근간한 것이다.


나는 오랫동안 정신질환을 앓아왔다. 정신질환 특유의 오류 덩어리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고, 이미 그 사고에 편안함을 느껴 그것이 진리인 것마냥 지냈다. 정신질환에 조심스러운 현대 사람들은 그들의 친절함으로 인해 내게 큰 변화를 일으키지 못했다. 반면, 애인은 달랐다. 그는 적극적이고 다소 공격적으로 내 생각의 맹점을 집었고, 그에 대해 내 스스로 생각해 답하도록 했다. 많이도 울었고, 괴로웠다. 그러나 그 과정이 있었기에 나는‘나’라는 사람을 제대로 찾아가고 있는 중이다.


“옛날의 학자들은 자신을 충실히 하기 위하여 공부했고,오늘날의 학자들은 남에게 인정받기 위하여 공부한다.”

-헌문25-


결국 논어에서 말하는 배움의 최종적 목적은 스스로를 세우는 것. 자아확립이다. 그리고 사랑이란, 상대가 이러한 배움을 올바로 할 수 있도록 이끄는 것이다. 때문에 논어는 연결된다. 논어에서 자아는 배움을 통한 자아이며, 사랑은 상대의 자아에 대한 기여이다.


“인이란 사람다움이다.”


“인이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공자가 말했다.

“삼아, 나의 도는 하나의 원리로 꿰고 있다.”

증자는 “예”하고 대답했다.공자께서 나가신 뒤 제자들이 “무슨 뜻입니까?”하고 물었다. 증자가 답했다.

“선생님의 도는 충서일 뿐입니다.”


논어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다. 논어 자체에서 스스로에 대한 사랑을 논한 적은 없으나, 상대의 자아에 대한 기여를 사랑으로 정의한다는 측면에서, 자신을 바로 세우는 배움을 가장 첫 번째 순서로 둔 것은 자신에 대한 사랑을 배움이라는 이름으로 대신한 것이라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충’으로도 설명된다. ‘충’이란 충실한 것, 최선을 다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이 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충실한 것은 자신의 행위에 대한 존중이며 나아가 스스로에 대한존중이다. 이것이 이루어지면 논하는 것이 ‘서’이다. ‘서’란 충을 타인에게 행하는 것, 역지사지의 자세이다. 내가 싫은 것을 타인에게 하지 않는 것, 내가 서고자 할 때 상대를 서게 해주는 것. 그것이 ‘서’이다.


그러나 ‘서’는 이기적이지 않다. ‘서’는 무수한 회의 위에 서 있다. 내가 원한다고 하여상대도 원하는 것이 맞을까. 내가 원치 않는다고 하여 상대가 원치 않는 것이 맞을까. 늘고민하고 ‘새를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르는 것’이다. ‘서’를 위해서는 배움에서 발하는 ‘절문’이 특히 중요하다. 간절히 묻지 않는다면, 상대를 알 수 없기 때문이며 독단으로 빠지기 쉽기 때문이다. 절문은 수고로움이며 때문에이는 사랑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논어는 사랑으로 통해 사랑으로 끝난다. 논어는 사랑에 의한, 사랑을위한, 사랑의 이야기이다.


엠페도클레스는 세상이 물, 불, 흙, 바람으로 이루어지며 이들이 뭉쳐져 존재가 존재하도록 하는 것이 사랑이며, 사랑의 부재가 미움이라 명명했다. 이것이 지금까지 이어져사랑과 미움에 대한 정의로 남아있다. 비슷한 맥락에서, 우리의 사주 또한 생과 극으로 만물의 생멸을 논하며, 엠페도클레스의 사랑이 우리의 ‘생’으로, 미움이 ‘극’으로 해석 가능하다.


신기하지 않은가. 사랑이 생이라니. 익숙한 말이지 않은가.


“사랑할 때는 그가 살기를 바라고 미워할 때는 그가 죽기를 바란다.그가 살기를 바라면서도 또 그가 죽기를 바라는 것은 의혹(미혹)이다.”

-논어 <안연> 중


처음 이 글의 시작과 동일한 말이, 동서양 가치관의 합으로 도출되는 것이다.


예전에 머리를 울리는 충격을 준 말이 있었다. 어떤 책에서 사랑에 관해 논한 것이었는데, 사람은 이기적이어서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은 생물학적으로 불가능하다는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실제로 종종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을 보지 않는가. 이에 대해 도서는 자신의 타인에로의 확장이 이러한 희생을 가능하게 한다고 했다. 그것이우리가 말하는 ‘사랑’이라고.그 글을 본 후로 나는 줄곧 사랑의 정의를 이렇게 정의한다.


사랑 : 자신의 타인에로의 확장


자신의 확장으로 인해 타인의 생을 구한다는 측면에서도 논어의 구절은 퍽 이런 생각과들어맞는다.


<논어>는 다소 구시대적이고 상투적이다. 별생각 없이, 지식 없이 보면 그저 사회생활해본 적 없는 사람의 탁상공론이자 이상화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단순한 표현에서 벗어나 그것을 말하게 된 계기와 그것의 참된 뜻을 파악하려 노력한다면, 이처럼 현대에 필요한 것도 없다.


논어는 ‘사랑’이 도처해 있으나 ‘사랑’이 부족한 현대인에게 ‘사랑’을 다시금 알려준다. 사랑이 무엇인지 궁금한 이들에게, 세상을 사랑하고 싶은 이들에게 부디 이 책이 어떠한 해답을 줄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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