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께 불만이 있을 때마다 ‘엄마가 되면 이렇게 하지 말아야지’ 다짐했다.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의 애청자였고, 커서는 <금쪽같은 내새끼>를 즐겨보았다. 오은영 선생님의 피드백을 깊이 새겼고, 아이의 마음을 알아주는 엄마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나는 분명, 언젠가 엄마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연애 6년 차, 32살 동갑내기 연인과 결혼식을 올렸다. 당시 나는 중소기업의 5년 차 직장인, 남편은 작은 카페를 운영하는 자영업자였다.
우리는 양가의 장남과 장녀였는데, 두 부모님 모두 노후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양가에서 지원받을 수도 없고 모아둔 돈도 적었지만 결혼까진 어렵지 않았다. 신혼부부 특례 전세자금 대출을 영끌해 경기도의 21평 전세 아파트에서 시작했다. 매달 140만 원의 공동 자금을 모아 생활비로 사용했다. 둘이 살 땐 부족하지 않았다. 하지만 부모가 되는 것은 훨씬 현실적인 이야기였다.
결혼식 3개월 뒤 코로나가 터졌다. 직장인 월급 정도의 수익을 내고 있던 남편의 카페가 적자로 돌아섰다. 인터넷 커뮤니티에 우리 상황을 올렸다면 백이면 백, ‘아이를 갖지 않는 게 맞다’는 댓글로 도배가 되었을 거다. 나 역시 지금 아이를 낳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남편도 아이를 좋아하지만 현 상황에서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것에 대해선 동의했다. 당장 우리 생활도 그리 안정적이지 않은데, 아이를 낳는 것은 무책임한 일로 여겨졌다.
게다가 갓 부부가 된 우리는 이제야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조금씩 맞춰가는 단계였다. 그리고 이상적인 엄마가 되기에 나는 너무 미숙했다. 매주 <금쪽같은 내새끼>를 보며 교훈을 얻었지만 현실은 다를 거였다. 불완전한 인간인 내가 아기를 낳아서 기른다는 게 끔찍한 일처럼 생각됐다. 아이에게 안 좋은 영향을 주면 어쩌지? 아이에게 상처를 주면 어쩌지? 잘못 키우면 어쩌지?
그랬기에 결혼 후 내내 피임약을 먹었다. 하지만 100% 피임은 없다는 생각에 늘 전전긍긍했다. 피임약을 깜빡하고 안 먹은 날도 있었고, 그럴 때 생리가 늦어지면 초조했다. 당시 우리에게 임신은 축복이 아니었다. 실수였고, 불행의 시작이라 여겨졌다.
나는 생리가 불규칙한 편이었다. 30일, 40일, 심지어 48일까지 생리를 안 하는 때도 있었다. 임신테스트기를 10개 쟁여두었다. 너무 늦어진다 싶으면 테스트를 했다. 그때마다 임신 테스트기는 1줄, 비임신을 가리켰다. 호르몬의 장난인지 임신테스트기를 한 당일 오후 어김없이 생리를 시작했다. 생리혈을 발견하기 전까지 초조했다가, 생리가 시작되면 크게 안심하는 날이 여러 번 반복됐다.
하지만 언젠가는 아기를 가지고 싶었다. 지금 말고, 내가 좀 더 성숙해졌을 때. 남편 사업이 안정될 때. 우리 부부의 관계가 좀 더 편안해지면. 아이에게 드는 비용이 부담스럽지 않을 때. 아기에게 방 한 칸을 제 몫으로 내 줄 수 있을 때. 아이를 만들 수 있는 조건은 점점 추가되었다.
그때가 언제일까? 모든 조건을 만족시키는 날이 올까? 우리는 구체적인 계획을 차일피일 미루었다. 어차피 눈앞에 당면한 과제는 많았다. 나는 회사에서 팀장을 맡아 고군분투하고 있었고, 코로나의 직격타를 맞은 남편의 카페는 소상공인 긴급 대출로 심폐소생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