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영영 모른 체 할 수는 없었다. 결혼 후 3년이 지나자 35세. 이제 노산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졌다. 슬슬 준비해야 했다.
피임약 먹는 걸 그만두었다. 피임을 안 하면 아이가 바로 생길 줄 알았다. 한 달, 두 달이 지났다. 작은 증상에도 ‘혹시 임신인가?’ 기대했다. 인터넷에서 찾아본 임신 극초기 증상은 생리 전과 비슷했다. 가슴이 커지고 분비물이 많아지고 몸이 찌뿌둥하고 등등. 생리가 늦어지고 증상이 나타나면 남편과 나는 ‘혹시 임신 아닐까’ 설레발쳤다. 그럴 때마다 임신 테스트기는 의심의 여지없이 1줄이었고, 며칠 내 생리가 시작되었다. 우리는 그걸 ‘증상놀이’라고 불렀다. ‘나 몸이 이상한 것 같아’하면 ‘또 증상놀이인가’하는 식이었다. 그러면서 6개월을 보냈다.
가볍게 산전 검사를 받아보기로 했다.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보건소에서 피검사로 간략한 검사를 하고 나는 산부인과, 남편은 비뇨기과에 가서 각각 검사를 받았다.
그런데 결과는 예상외였다. 나는 다낭성 난소 증후군이었다. 생리가 불규칙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나이도 어리지 않아 자연 임신이 어려울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결과가 안 좋기는 남편도 마찬가지였다. 정자의 직진 운동성에 문제가 있다고 했다. 현미경으로 본 남편의 정자들은 뭔가 투명한 막에 갇힌 것처럼 제자리에서만 왔다 갔다 했다. 정자가 앞으로 나가지 않으면 난자와 만날 수 없다. 자연임신이 어려울 거라고 했다. 침울한 표정의 우리에게 비뇨기과 의사는 ‘아예 정자가 없는 무정자증도 있는데, 이 정도면 정자의 수는 충분하니 인공 수정이나 시험관은 가능하다’는 말을 건넸다. 나름의 위로였을 것이다.
난임이라는 단어가 우리에게 찾아올 줄은 몰랐다. 그간 알람을 맞춰 가며 피임약을 먹어온 시간이 허무했다. 임신할까 봐 전전긍긍했던 과거의 내가 우스웠다.
본격적으로 시험관 시술에 대해 찾아보기 시작했다. 워낙 흔하게 하는 시술이지만 내 이야기가 되니 무게가 달랐다. 그간 임신과 출산에 대해 정말 무지했다는 걸 깨달았다. 단순히 난자와 정자를 채취하여 수정시킨다는 개념만 알고 있었다. 시험관 시술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난자를 최대한 확보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 여성은 매일 배에 호르몬 주사를 맞아야 한다. 매일 주사 맞으러 병원에 갈 수는 없으니, 직접 주사를 놓는다. 어쩌다 한 번 맞는 독감 예방주사도 무서워하는 내게 배에 직접 주사를 놓는다는 건 끔찍한 일이었다.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정부 지원금이 있지만 소득 기준이 까다로웠다. 한 번에 150~200만 원 정도는 드는 듯했고, 더 힘든 점은 기약이 없다는 것이다. 인터넷에는 몇 년째 시험관 시술을 시도하는 부부들의 사연이 넘쳐났다. 알면 알수록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러다 아이 없이 평생 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본격적으로 시험관 시술에 착수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반기가 되면 난임 병원에 가보자는 대화를 끝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몇 달이 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