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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원 Aug 08. 2022

10. 무의미한 계절의 구분

선물에 기록되지 못한 첫 번째 메일


[제목] 선물에 기록되지 못한 첫 번째 메일


  이렇게 메일로 인사를 남기는 것도 정말 오랜만이다.

  네가 준 선물은 잘 받았어. 아까도 잘 받았다고 인사했지만 말이야. 사실 우리가 주고 받았던 메일을 네가 제본할 거라는 생각은 정말 못해봤어. 너도 알다시피 삼 개월의 시간 동안 우리는 제법 바빴고, 서로에 대한 생각보다 자신의 감정을 탐구하는 일이 우선이었기 때문이지. 그래서였을까, 어느 순간 네게 메일을 보내지 않으면서 일상 한 편이 참 쓸쓸했던 것 같아.

  일상을 나누던 사람이 사라진다는 건 정말이지 슬픈 일이야. 내가 이전에도 네게 말했겠지만.

  딸은 세상에서 흩어지고 와이프와는 갈라섰어. 그리고 나만 남았을 때, 나는 죽어야겠다고 생각했어. 삶의 의미가 사라졌기 때문에 나는 굳이 살아갈 필요가 없었어. 일상을 나누던 사람이 사라진다는 건, 그리고 내 안식처가 없어진다는 건 단순히 슬픈 일이 아니야. 너도 조금은 알겠지만.

  나는 그 순간을 알아. 아주 무력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지. 그 순간이 다가오면 나는 그저 현실을 허망하게 받아들이고 침잠할 수밖에 없어. 그래, 끝도 없이 이어지는 침잠. 그게 다였어.

  딸과 책 이야기를 참 많이 했었던 것 같아. 물론 초등학생이었으니까 너랑 말하듯 두꺼운 책 이야기는 할 수 없었지만, 문학을 나눈다는 건 삶을 나눈다는 거고, 삶을 나누는 그 사람이 내 울타리 안에 있을 때 나는 꼭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았었어.

  하지만 언젠가부터는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없었어. 나는 그냥 몸만 존재하는 거였어. 아무도, 그 누구도 내가 숨을 제대로 쉬고 있는지 관심조차 주지 않았지. 나조차도 내게 관심을 주지 않았어.

  그저 이건 기계였고,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로봇이었어. 학원에서도 그랬지. 모두가 헤어질 사람들이니까, 어차피 전부 사라질 사람들이니까 나는 그냥 그 사람들의 편의에 맞춰 성격을 마구 바꾸면 되는 거였어. 어차피 이 학원에서 나가면 더 볼 일 없는 사람들이니까. 그냥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굳이 내일의 사람과의 관계와 미래를 생각할 필요가 있었을까.

  언젠가부터 나를 수단으로 생각했어. 나는 그저 수단이었어.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는 하나의 주체가 아니라 그냥 적절히 사람과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물건이었지. 그 중 하나의 기능이 네가 말했던 맞춤형 인간관계였어.

  한창 예민할 시기에 사람에 따라 성격을 바꿔대는 나를 보니 다른 학생들도 소름이 돋았겠지. 이해해.
  하지만 나는 더 이상 나를 방치해두는 것 외에 다른 시도를 할 수가 없었어. 내가 나를 사람으로 인정하는 순간 나는 정말 모든 걸 놓아버릴 것 같았거든.

  그래, 어쩌면 나는 사람이 아니었는지도 몰라. 이건 부정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부정 그 자체였어.

  그리고 너를 만났지. 모든 사랑에 의문을 품고 자기자신마저 포기하려드는 너를. 꼭 나를 보는 것 같았고, 네가 책을 읽고 뭐라 조잘거릴 때면 내 딸을 보는 것 같았지. 그 애는 책 속 인물을 고작 인물로 보지 않았어. 책 속 인물과 살아 숨 쉬는 우리 사이의 위계를 없애는 아이였지.

  너도 그랬어. 단순히 책 속 인물을 닮아가려는 시도가 아니라 인물의 삶과 세계를 진심으로 사랑했지. 모든 것을 포기하려 들면서 모순적이게도 타인에게는 베푸는 무한한 사랑. 나는 그 사랑을 보고 나를 자각하기 시작한 거야. 이 말도 안 되는 맞춤형 인간관계와 나를 포기해야만 했던 비극, 그리고 나조차도 나를 포기했던 이전의 삶을.

  이제는 네가 더 잘 알겠지? 예전에 너가 술 먹고 전화했던 기억이 갑자기 떠오르네. 그때 정말 웃겼었지. 너는 안 웃길지도 모르지만. 괜히 노파심에 또 말하는데 나는 너를 연애 감정으로 대하는 게 아냐. 이제는 정말 네가 더 잘 알 거라고 생각해.

  어쩌면 나는 네게 사과를 해야 할지도 모르지. 내 삶을 자각하기 위해 너를 수단으로 사용했으니까. 너랑 내 딸을 많이 겹쳐봤으니까 많은 사과를 해야 할지도 몰라. 하지만 그건 우리 둘 다 마찬가지겠지? 이것저것 복잡한 게 많지만.

  분명한 건 우리가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이야. 그러니 조만간 너를 대학로에서 다시 만나면 아주 맛있는 밥을 한 번 사줄게. 그때는 좀 특이하고 예쁜 걸 먹어볼까? 우리 아무리 생각해도 국밥이랑 감자탕은 너무 많이 먹었어.

  아, 그리고 저번에 두고 왔다던 기념품도 갖다줄게. 일본에서 사왔기 때문이 아니라, 의미 깊은 선물이라 그래.

  드디어 너에게 물질적인 선물을 주네. 상징적인 의미라고 하자.
  서로가 서로에게 새로운 삶을 선물해줬다는 의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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