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다시, 봄
계절은 순식간에 시간을 삼키고 생사를 반복하며 꽃을 피워낸다.
계절은 순식간에 시간을 삼키고 생사를 반복하며 꽃을 피워낸다. 초등학교 일 학년이던 주현이는 순식간에 이 학년이 되었다. 또, 주현이의 짙은 갈색 머리칼은 단발로 변신했다가 다시 어깨에 닿을 만큼 자라났다. 그때마다 나는 짙은 갈색을 보고 밝은 갈색의 사람을 떠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주현이와 나의 관계, 그리고 쌤과 내가 엮인 관계의 결은 분명히 달랐다. 비유하자면 새빨간 사과처럼 웃는 백설 공주와 풋사과처럼 웃는 라푼젤 같다고나 할까. 공주라는 신분만 같고, 색도, 미소의 모양도 다른 두 관계를 나는 끊임없이 비교했다. 올라가는 입꼬리의 모양, 머리카락의 밝기, 내가 품는 마음, 떠오르는 생각. 그 모든 것이 일 년간의 나를 조직했고, 쌤과 나의 관계를 돌아볼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그런 숙고에도 나는 삼 개월을 쌤과 떨어져 지냈다. 쌤이 일본으로 장기 출장을 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메일은 여전했다. 우리는 주로 각자의 일기를 메일에 써서 상대에게 보냈다. 답장은 자유였다. 시간은 실수로 놓친 유리잔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 삼 개월간 겨울이라는 계절이 사라지자 온 세상을 진동하며 꽃을 피워낸 봄은 목련을 시작으로 전개됐다. 그 덕택에 우리는 어느덧 삼 개월의 끝자락에 와 있었다.
나는 신호등이 바뀌자마자 노래가 흘러나오는 휴대폰 대리점 곁에서 발걸음을 옮겼다. 삼 개월의 끝자락, 동네의 어느 한 지점에 서 있던 나는 한 손에 꼭 쥔 유에스비를 가지고서 유유히 제본소로 걸음을 옮겼다.
“한글 파일이고, A4 기준 총 삼백 페이지 정도 됩니다. 스프링 제본으로 부탁드려요.”
제본소 사장님은 파일을 여시자마자 양면 인쇄 설정을 하고 커다란 프린터기가 종이를 뿜길 기다리셨다. 유에스비뿐만 아니라 휴대폰에도 파일이 있었던 나는 자연스레 파일을 열어 편집된 메일을 살폈다. 에이포 용지 기준 삼백 페이지, 일 년 하고도 삼 개월 간 주고 받은 메일이었다.
나는 종이를 뿜어내는 거대한 프린터기를 바라보며 기계처럼 찍혀나오는 잉크를 구경했다. 잉크가 이그러졌다. 새하얀 에이포 용지 군데군데 얼룩이 지며 뭉개지는 라디오 주파수처럼 귀가 따가운 소리가 들렸다. 프린터기에 용지가 걸려 인쇄물이 망가지고 있었다. 애초에 종이가 일그러지자마자 사장님은 한걸음에 달려오시더니 프린터기를 살피셨다. 나는 벙찐 상태로 출입구에서 멍하니 프린터기를 바라보기만 했다. 프린터기는 아픈 것 같았다. 아마도 몸도 아프고, 프로그래밍 된 기계 내부도 아픈 것 같았다. 하지만 사장님께서 몇 번 종이를 빼내고 이상한 벨트를 뒤적이시더니 금세 프린터기가 제대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나는 잠깐 프린터기가 아파서 종이를 깨뜨린 것 같다고 생각했다.
얼마 있지 않아 종이가 다 뿜어져 나왔다. 사장님은 양면 인쇄된 백 오십 페이지의 종이를 한 아름 안아 드시고는 제본을 시작하셨다. 앞뒤에 갈색 표지를 내달자 흰 종이가 사이를 메웠다. 꼭 북커버에 싸인 소설책처럼 나는 쌤과 주고받은 메일을 선물처럼 제본했다. 삼 개월 만에 만나는 쌤에게 친구로서 건네는 첫 선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