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나를 살게 하는 것과 살기 위해 하는 것을 구분한 적이 있다. 여기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은 살기 위해 ‘해야 하는’ 일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저 숨 쉬듯이 자연스레, 적어도 내가 살아야겠다고 결심한 순간이 오면 물 흐르듯 어떤 일을 했다.
애초에 살게 하는 것도, 살기 위해 하는 것도 각각 한 가지뿐이었지만 이제 와 불만은 없다. 지금은 논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글을 언제나 수단으로 사용했다. 내게는 목적이었던 적이 없었다. 살기 위해 쓰는 글은 나 자신을 자각하기 위한 도구였다. 하지만 상황은 언제나 역전되고, 수단이었던 것은 목적으로 변해 존재 그 자체의 가치를 뿜어낸다. 어느새 나는 글과 함께 공존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 말인즉슨 글이 나를 살게 하는 일에 포함되었다는 의미이다.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이 말은 굳이 쓰지 않아도 될 만큼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어떤 관계는 유독 특별해서 관계를 설명하기 위한 주석이 꽤 필요하다. 나는 그런 관계 속에 놓인 사람들이 서로의 결여를 포용하며 성장해나가는 이야기를 그리고 싶었다. 다만, 이 ‘특별한’ 관계는 이들에게만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고, 이들의 결여는 단순히 개인의 것이 아니다. 그래서 단순한 이름으로 ‘길을 잃은 사람’ 두 명을 지칭하기 어려웠다. 언어에 한정되지 않는 이야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작중 ‘나’와 ‘쌤’의 이름이 나오지 않은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다. 그 누구라도 그들이 될 수 있고, 그들도 언젠가는 길을 찾았다고 ‘인식’할 수 있다. 또는 길을 찾아가는 과정 자체를 목적지로 설정할 수도 있다.
결국은 답이 없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고작 젊은 피 하나가 쓰기에는 오만한 글일지 몰라도, 이 과정조차 하나의 기록이라고 믿고 싶었다.
서로의 결여를 채우기 위해 상대를 수단으로 사용하는 ‘나’와 ‘쌤’은 꼭 이 글은 쓴 나의 모습과 같다. 내가 글을 수단으로 썼듯이, 그들도 서로를 수단으로 썼다. 하지만 결말은 나와 같을 것이다. 서로에게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공존하며 서로를 그 자체로 인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언젠가 한 쪽이 비어도, 이 두 사람이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페이지 너머에서 씩씩하게 잘 살아가리라고 믿는다.
활동 때마다 열심히 피드백해주신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만약 피드백이 없었다면 이야기를 쓰는 내가 되레 이야기에 끌려가며 소설을 썼을 것 같다. 그중 퇴고 짝이 되었던 소정님과 직접 한글 파일로 감상평을 보내준 최지우, 그리고 일대일 산문 스터디로 같이 활동했던 피페포님께도 특별히 감사 인사를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