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일본군에 끌려가고, 2주 뒤 화장실을 통해 도망쳐 몇 날 며칠을 산을 넘어 몰골이 상한 채 집으로 돌아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과 연이어 시동생이 아프면서 며느리가 잘 못 들어와서 그렇다고 많은 설움을 당했다
6.25 때 오빠는 북으로 끌려가고 가족들은 고향을 떠나 피난살이를 했다.
몇 년이 지나 폐허가 된 고향에 흙과 나무로 다시 집을 짓고 그렇게 삶을 이어 왔다고 했다. 아무것도 없는 살림에 평생 기른 머리카락을 잘라 시아버지가 좋아하는 술을 사드리고, 시어머니의 치마를 샀다.
그녀는 11년을 중풍으로 거동을 못하시고 누워 계신 시아버지를 간호했다.
몇 년 후엔 집에 놀러 왔던 작은 집 조카를 돌보지 못해 집 근처에서 물가에서 잃었다.
8남매를 낳았지만 그중 둘째 딸을 18살까지 키우고도 병으로 가슴에 딸을 묻었다.
남편은 그 후 술로 슬픔을 달랬다. 결국 술 때문에 병이 생겼고 가족들에게는 또 다른 고통이었다.
군대에 간 아들의 면회를 3년 동안 한 번도 가지 못했다고 했다.
7남매를 없는 살림에 공부시키고 , 결혼시키기까지 그 삶은 얼마나 고단한 삶이었을까?
지금의 내 나이 39살에 첫 딸을 먼 곳으로 출가시켰다.
인생의 풍파를 맨몸으로 받아냈던 그녀는 삶이란 곧 한이었을 것이다.
평생 자식 걱정, 손자 손녀들 걱정뿐이었다.. 시집간 딸조차 암으로 병들고 먼저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녀에게는 절망이었을 것이다.
죽을 때까지 고통은 무뎌졌을 뿐 불쑥불쑥 그 기억이 날 때마다 몰래 눈물을 닦곤 했었다
나는 그녀와 30년을 함께 살았다.
어릴 적 삶은 그렇게 행복하지 못했다.
항상 새벽부터 밭에 나가서 농사일을 하시는 부모님은 저녁이 다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오셨다. 술을 좋아하셨던 할아버지는 매일 취해 있는 날이 더 많았고, 할머니는 속상한 나머지 할아버지와 싸우거나 해서 집안은 항상 무거운 공기가 가득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가정의 평화가 찾아왔다고 생각했으니까.
할머니는 평생 자식으로 , 며느리로, 엄마로, 아내로 살면서 사랑이라는 것을 받지 못하고 사셨다. 힘들 때마다 참아냈던 응어리들이 고스란히 나에게 전해졌다.
자식들을 모두 출가시키면 자신의 일은 다 끝난다 생각했지만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었다. 자식 하나하나 애를 태우기도 했고, 다 큰 자식마저 또 먼저 보냈으니까.
어릴 때 할머니는 부모님을 대신해 항상 학교 가기 전이면 밥상을 차려 주셨고, 고등학교 때부터 자취를 하는 손자 손녀를 위해 시골과 시내 집을 왔다 갔다 하셨다.
엄마는 단 한 번도 자취하는 집에 오지 않았지만 할머니가 그 역할을 대신했다.
병원에 취업하고 3교대를 할 때 나를 챙겨준 것도 할머니였고
시집가기 며칠 전 옷장을 정리하는 손녀를 보고 몇 날 며칠을 운 사람도,
결혼식장에서 눈물을 닦던 사람도 유일하게 할머니였다.
시댁에서 혹시나 고생이라도 할까 매일 새벽 일어나 기도했을 할머니. 할머니는 엄마보다 더 많은 것을 나에게 베풀어 주셨다.
내가 결혼하고 난 후 할머니는 기력이 조금씩 떨어졌다.
몇 년이 지나 셋째 여동생의 결혼식 날, 혼자 집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지셨다. 119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기관 삽관을 하고 중환자실에 입원하게 되셨다.
빈혈과 복통이 심했다.
내가 근무하던 곳 의사 선생님이 내시경을 해 보자고 했었고, 검사하면서 알게 되었다.
그녀가 고통받았을 세월의 무게가 위에 큰 구멍을 얼마나 많이 냈었는지를…….
그리고 몸은 회복되지 못할 병이 들었다.
할머니는 그렇게 3번을 중환자실에서 기관 삽관을 하고 억제대를 한 채 의식 없이 누워 계시다 회복되기를 반복했다. 의식이 돌아오면 발버둥 치는 할머니를 다시 약으로 잠재우고, 억제대로 묶었다. 할머니는 병원이 아닌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마지막을 보내고 싶어 했다. 하지만 자식들의 욕심으로 무리하게 연명치료를 한 것 같아 시간이 오래 지난 지금도 마음에 걸린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내가 병원 퇴사 후 할머니를 매일 찾아 간호할 수 있었던 것이다. 두 아이도 함께 병원으로 가서 할머니와 마지막 시간을 함께 했다.
11월의 어느 날
할머니는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 얼마 있으면 결혼할 남동생의 신혼집을 보고 싶어 하셨다.
의사 선생님의 허락을 받아 아빠의 생일날 집도 보고 함께 식사하기로 약속했지만 지키지 못했다.
약속한 당일 아침 병원에서 급하게 나를 찾았다.
“ 할머니 BP( 혈압)도 안 잡히고 Pulse(맥박)도 떨어지고 있어. 지금 올래?”
선배의 전화를 받고 병원에 갔을 때 이미 할머니는 아침부터 급작스런 통증에 너무 힘들어했다. 배는 널빤지처럼 단단해져 있었고, 의식을 잃어갔다. 응급으로 CT를 찍었을 때 이미 위천공이 심한 상태였었다.
당장 수술이 필요했지만 이제는 할머니를 보내드려야 했다.
“ 아프지 않게만 해 주세요”
모르핀을 쓰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할머니는 그렇게 숨을 멈추셨다.
90년 이상을 단 한 번도 마음 편하게 살지 못하셨을 할머니.
자식, 손자들 그렇게 할머니는 하나하나 결혼을 시킬 때마다 내려놓기를 하셨고, 마지막을 준비하셨던 것 같다. 이 책도 삼촌과 고모들의 결혼을 다 시키고 손자 손녀를 보며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 하시며 책을 쓰셨다. 고통스러운 순간이었지만 어쩌면 손자의 결혼을 보고 생을 마감하겠다는 작은 욕심이 할머니를 다시 일으키진 않았을까? 할머니는 더 이상 깨어나지 못하셨고, 새벽 함박눈이 내린 아빠의 생일날 아침 할머니를 할아버지 옆에 묻어드렸다.
몇 년이 지나 해도 뜨지 않는 지금 이 시간. 새벽 5시
할머니가 남긴 책 < 할머니의 칠십 평생>을 보며
어릴 때는 부처님에게 나이 들어서는 성경책을 읽으며 하나님에게, 보이지 않는 눈으로 줄을 그어 가며 책이 해지도록 읽고 기도하셨던 할머니가 생각난다. 나는 모른척하고 다시 잠을 청했지만 할머니의 간절한 기도를 통해 단단하게 자랐을 것이다.
학교도 다니지 못하고 환갑이 다되어 한글을 배우고, 성경책과 불경 책을 읽으며 글을 익힌 할머니는 죽기 전 자신의 역사를 기록하셨다. 2000년 1월 1일 이 책을 손자 손녀들에게 만들어 주셨고, 21년이 지나 색 바랜 책 속엔 아직도 할머니의 한 맺힌 삶과 자식들을 걱정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 온다.
자녀들에게 미안함과, 고마움, 손자 손녀들이 부모님의 고생을 이해하고 잘 커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가득했다. 자식들에게 큰 재산은 아니었지만 어려움 속에서도 끈질기게 삶은 지속되고 또 살아가야 한다는 걸 알려 주고 싶으셨던 것 같다.
사실 돌아보면 어릴 땐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보며 우울한 날들이 더 많았다.
하지만 결혼을 하고 나이를 먹고 다시 이 책을 보니 지금 태어난 사람은 전혀 상상할 수 없는 고통에 얼마나 힘든 삶을 살았을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가끔씩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조상으로부터 대물림되는 고통과 가난으로 힘들어하고 그 굴레를 벗어던지지 못하고 산다. 한 개인이 짊어지고 가기엔 너무나 큰 고통들이 자녀와 후손들에게 고스란히 그늘처럼 전해 지는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내 자식들이 나보다 좀 더 나은 삶을 살아가길 누구나 원한다는 것이다. 할머니의 어두운 삶을 유산으로 받기보다는 나는 그때의 슬픔은 이제 벗어던지고 온전한 나로 살아가야 한다.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가기보다는 나의 삶을 살길 할머니는 여전히 기도하고 계실 테니까. 할머니의 기록을 통해 일제의 수탈과 6.25 전쟁으로 폐허가 된 땅에서 지금 이만큼 걱정 없이 삶을 살아가는 것에 새삼 감사히 여기며 할머니의 잠언이 그대로 아랫세대에도 전해지기를 바란다.
쌀쌀한 새벽바람에 오늘은 할머니가 가을 저녁 가마솥에 끓여주신 소고기 토란국이 생각난다. 다시는 먹어 보지 못할 할머니의 따뜻한 손맛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