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은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공간이다.
어떤 이는 입원하고 회복되어 퇴원을 하기도하지만 어떤 이에겐 병원이 삶의 마지막 장소가 되기도 한다.
예전에 일하던 곳은 병동 옆에 장례식장 건물이 있었다. 병실에서의 마지막 순간을 지나 장례식장의 분위기만 봐도 그 사람의 인생이 어떠했는지 가늠해 볼 수 있었다.
자식들이 성공해서 장례식장 복도에 화환이 빈틈없이 채워져 꽃가루가 병원 밖까지 진동하는 집이 있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화한의 수를 세고 어디에서 보냈는지 글을 읽으며 자식을 잘 키웠네, 성공한 인생이네 평가하기도 했다. 곡소리보단 하나의 잔치처럼( 흔히들 말하는 호상이라도 되듯) 그 집 문상객들은 목소리 톤도 높아 소리가 옆 건물 병실에서도 시끌벅적하게 들렸다. 상주들의 직장에서 관광버스를 대동해서 문상을 오는 집이 있는 가하면, 가족이라고는 덜렁 하나밖에 없어 곡소리조차 나지 않는 집도 있었다. 가끔은 상주들이 싸우는 집도 있었다.
환자들은 창밖을 내려다보며 오늘은 어떤 집이 상을 치르고 상황이 어떤지 알려주기도 했다. 그리고 자신들의 마지막은 어떠했으면 한다고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하루는 동료의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자식들도 많았고, 간호사인 손녀 덕에 병원에서 마지막 간호를 받으셨다.
자식들이 많다고 했다. 동료의 집은 평범한 집이었는데 아버지가 장남이셨다. 그중 어떤 삼촌은 대기업에 높은 직위를 갖고 있다고 했다. 직장에서 차를 대절해서 동료들이 왔다 가고 화한이 그야말로 병원 밖 까지 가득해 한 번씩 눈길을 주고 갔다.
3일장을 치르며 대기업에 있는 삼촌 회사 사람들이 다녀가고 그 일이 터졌다.
“선생님, 가족들이 난리가 났어요. “
‘왜? “
“삼촌 직장 사람들이 많이 왔었는데 삼촌이 조의금은 자기 거라고 조의금 통을 가져갔어요."
후배는 울상이 되어 왔었다.
아직 장례도 다 치르지 않았던 시점이라 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의 장례를 마무리하기도 전에 조의금이 뭐 그리 대수라고 가족들이 난리가 난 모양이었다. 그 일로 연락도 안 되고 서로 앙숙이 되어 사이가 틀어졌다. 3일 동안 가족들은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었다. 어머니의 마지막 순간에 무슨 말도 안 되는 상황인가?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몸이 편찮으셨던 할머니 마지막은 그렇지 않기를 매번 기도한 적이 있었다. 할머니는 돌아보면 항상 나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 얼른 죽어야지 하는데 죽는 게 쉽지 않다고 자주 이야기하셨다.
할머니는 환갑이 지났을 무렵 마지막 순간에 입고 갈 수의를 윤달이 있는 어느 해에 마련해 두셨다. 핑크색 보따리에 수의를 고이 싸 두고 혹여나 좀이 슬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코끝을 찌르는 나프탈렌을 넣어 보물 단지 마냥 장롱 위에 깊숙이 보관하셨다. 할머니 방은 나프탈렌 냄새가 났었다. 매년 한 번씩 보따리를 내려 수의가 괜찮은지 살펴본 날이면 방안이 온통 나프탈렌 냄새로 가득해서 인상을 쓰곤 했다.
그리고 70 무렵엔 할머니는 자식들에게 70 평생 기록을 남겼다.
자신의 힘든 삶을 정리하기 위해 그리고 자녀들이 잘 커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쓴 글이었다.
가끔씩 글을 보며 할머니가 우셨던 기억이 난다.
어쩌면 고단한 삶에 대한 이유일 수도 있었고, 스스로 자신의 삶을 보면서 치유의 역할도 했을 것이다.
내가 대학생이 되던 해 명절날 오후, 가족사진을 찍으러 시내의 작은 사진관에 갔다. 7남매와 그들의 자식들까지 거의 30명이 넘었다. 그때 할머니는 영정 사진을 준비 해 두셨다. 언제 쓸지 모르는 영정 사진과 수의는 할머니의 방 옷장 위 한편에 거의 20년 이상 먼지가 가득한 채 준비되어 있었다. 나는 그런 할머니를 보며 청승맞게 왜 수의를 자꾸 보고, 영정 사진을 준비했냐고 화를 낸 적이 있었다. 아마 어린 나이에 할머니의 죽음을 생각하기 실은 감정이 더 컸을지도 모른다.
30년을 함께 사는 동안 할머니는 운동을 쉬지 않으셨다.
새벽에 일어나 누구보다 먼저 아침을 부지런히 시작했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일과 운동을 이어가셨다. 혹여나 아픈 몸 자식들에게 부담될까 매일 걱정하며 자신의 루틴을 지켰던 것 같다. 병원에 입원하시기 전까지 성경책을 읽고, 작은 일도 손을 멈추지 않으셨다.
또 할머니는 평생 자식, 손자들이 준 용돈, 나라에서 주는 노령 연금을 아주 소중히 모으셨다. 나와 함께 살았던 할머니는 매년 입출금 통장에 있는 돈을 모아서 다시 예금 통장에 모으기를 반복했다. 명절이면 손자들에게 주기도 했었고, 하나하나 모은 돈을 시집갈 때 쓰라고 50만 원을 주셨던 게 아직도 기억에 선하다. 결혼 전인 시아주버님께 미안하셨던지 옷 한 벌 사주라고 따로 용돈을 주셔서 어머니가 참 고마워하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할머니는 60대부터 삶의 마지막을 매일 준비하셨다는 생각이 든다. 아플 준비를 하셨던 것이다. 입퇴원을 반복하던 시기 할머니는 병원비 쓰라고 모아둔 돈을 내셨고 마지막 가실 때도 그랬다. 혹여나 자식들이 병원비 때문에 힘들어할까 미리 준비하신 것이다. 할머니는 그 흔한 보험 하나 없었지만 자신이 아프기 위한 준비로 손자들이 주는 용돈을 하나하나 허투루 쓰지 않으시고 세고, 또 세가면서 할머니는 그렇게 돈을 모아 두셨다. 혹시나 용돈이 없으면 나이 들어 헛헛할까 자식들과 우리는 명절이나 어버이날이면 할머니께 용돈을 드렸는데 그게 할머니의 든든함이었던 같다.
할머니 돌아가시고 영안실에서 조문객을 맞이할 때 어른들은 할머니 통장에서 돈을 빼오라고 했었다. 만 원짜리로 몇 백만 원을 뽑았던 기억이 난다. 할머니의 마지막을 찾은 조문객들에게 만원씩 봉투에 담아 차비 명목으로 그 돈을 드렸다. 할머니의 장례식은 자식들과 20명이 넘는 손자 손녀들이 수백 명의 조문객들을 맞이하고 , 일사불란하게 할머니의 마지막을 마무리했다.
3일 후 첫눈이 내린 날 할머니는 그렇게 자식들과 많은 조문객 사이에서 삶을 마무리하고 시골 할아버지 묘 옆에 함께 잠드셨다.
남은 할머니의 백여만 원의 돈은 다음 해 설날에 할머니가 주는 마지막 용돈으로 20명이 넘는 손자 손녀들에게 똑같이 봉투에 담아 전해졌다.
병원에서 본 많은 환자들의 마지막은 준비되지 못한 채 얼기설기 마무리되고, 끝까지 상처가 봉합되지 않은 채로 덮어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긴 병에 효자 없다고 간호하다 지친 가족들이 많았고, 마지막이 좋지 않게 끝나는 경우도 있었다. 사람들은 너무 앞만 보고 사느라 그날그날 주어진 일에만 급급해 살아간다. 당연히 나의 죽음의 순간은 생각할 겨를도 없을 것이다. 돌아보면 할머니가 오래전부터 매일 자신의 마지막을 준비했기 때문에 가족들끼리 얼굴 붉히지 않고 큰 탈 없이 지나갔을 것이다. 할머니의 마지막 순간을 떠올리면 슬프기보다는 마지막을 잘 준비하셨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임종 간호를 가르치면서 매일 나의 삶과 타인의 죽음을 되돌아본다.
여러 사람들의 마지막을 함께 했고 그 당시엔 슬픔이 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돌아보면 죽음 또한 삶의 연상선이란 생각이 든다. 태어난 즉시 사람들은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존재다. 어느 누구든 그 마지막은 죽음이 목적지다. 그 목적지에 도착하는 순간 우리의 삶이 잘 살았는지 그렇지 않았는지 판가름 나는 것이다.
우리가 죽음을 매 순간 준비하는 것은 잘 살기 위함이다.
죽음을 준비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마지막은 확연히 차이가 났다.
매일 삶을 정리했던 나의 할머니를 기억하며 내 삶을 돌아본다. 할머니처럼 나는 내 마지막을 생각하며 수의를 점검하고, 영정사진을 준비하듯 삶과 죽음을 양옆에 두고 더 나은 삶을 위해 매일을 고민하고 살아가고 싶다.
인생이라는 큰 퍼즐의 한 조각 오늘 하루를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인생이라는 큰 조각을 만든다면 나는 어떻게 다듬을 것인가?
그 고민이 또 나를 잘 살게 하는 원동력이 되지 않을까?
죽음을 가르치며 나는 오늘도 삶의 마지막을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