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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야 Nov 07. 2018

우리가 있어야 너희도 있는 법이다.

우리가 있어야 너희도 있는 법이다.     

규란엄니는 멀미가 지독시리 나서 먼 길 떠나는 걸 질색한다. 아들 졸업식 때도 남편만 보내고 집에 남았을 정도라고 하는데, 사드 터지고 난 이후로 서울행 버스를 여러 번 탔었다. 제주까지 멀미약 먹고도 다녀왔었다. 그래도 마을에서 같이 하는 일을 다 빠질 수는 없었던가보다. 그런던 규란엄니가 청와궁을 빠져야 할 이유가 생겼다. 아들이 내려와서 감을 따야 한다며 소성리에 남았다. 규란엄니한테는 다행스런 일이었다. 

규란엄니는 저녁밥을 먹고 나서 마당에서 촛불문화제를 하나 안하나 궁금한 마음에 옷을 걸쳐입고 슬슬 나가니까 마을의 가장 막내 주민인 소야 훈님이 억수로 반갑게 맞아주더란다. 여자가 귀하다면서 형수님 오셨다고 하더란다. 소성리 마을회관 앞 평화마당에는 촛불을 하려고 모인 서너 사람이 있었는데, 아랫마을의 윤성아저씨는 섹스폰을 들고 오셨다. 윤성아저씨는 성주에서 섹스폰동아리 회장을 맡고 있다. 소성리에서 주로 사회를 봤던 대근아저씨가 얼마전 허리디스크 수술을 하는 바람에 요양중이다. 소성리로 올라오지 못했나보다. 마을구판장 강희성사장님이 누구라도 촛불을 빠뜨리면 안된다면서 사회를 맡겠다고 자발적으로 나서는 바람에 촛불문화제가 시작되었다. 

사람이 서넛 밖에 모여 있지 않는 모습을 보고 규란엄니가 부리나케 조자엄니랑 마을의 남은 몇몇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형님, 밥먹은겨? 여기 나오소. 오늘 촛불문화제 한다는데 자리 좀 채워주소 했더니 의리의 조자엄니가 부랴부랴 마당으로 쫓아나왔다고 한다. 

조금 있으니 김천촛불님 몇몇 분이 소성리로 올라오셨다.  

강사장님이 청와궁에 원정투쟁 나간 우리 사람들 응원하는 촛불문화제를 시작했다. 음향장비 볼 사람 없어도, 이 없으면 잇몸으로 떼운다고, 윤성아저씨가 섹스폰연주 두 곡을 하고나니, 김천에서 아이를 데리고 늘 참석하는 키 큰 양반이 색시같이 얌전하더니만 노래를 시키니까 넙죽 받아서 부르더란다. 노래를 아주 기똥차게 잘 불러서 깜짝 놀랐다고 한다. 옆 동료가 하는 말이 저 자슥은 마이크 주면 안 놓을지도 몰라요 하더란다. 그 정도로 노래도 잘 부르지만 노래 부르는 걸 좋아한다고 한다. 

옆에서 그 얘기를 듣고 있던 임순분부녀회장님이 그 사람 한번씩 우리 소성리 와서 노래공연해달라고 해야겠네 했고, 나도 옆에서 맞장구 치면서 조감독한테 누군지 알려주라고 펌프질을 해댔다. 

정수씨는 얌전하게 앉아서 노래 부르라고 몇 번을 청원했는데도 끝내 쑥스러워하면서 마이크를 잡지 않았다고 전한다. 

소성리 토요촛불문화제는 예정된 것은 아니었지만 열손가락 꼽을 정도 밖에 모이지 않았어도 사람들 모이면 빠뜨리지 말자는 의지가 모여서 촛불을 밝힐 수 있었나보다. 

놀라운 것은 전혀 생각지도 않게 칠순이 넘은 강사장님이 나섰다는 것도 경이로웠다. 소성리에서 촛불문화제가 진행되고 있다는 소식을 버스에서 전해들으면서 우리는 한바탕 웃음꽃이 피었다. 우리가 없는 자리 잘 지켜주고 있는 우리편에게 사랑과 감동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청와궁을 다녀온 버스는 김천에 내릴 사람을 내려주고 밤11시30분은 넘어서 소성리에 도착했다. 자가용으로 움직였던 이종희위원장님 승용차가 먼저 도착해 있었다. 버스가 도착할 시간 맞춰서 마당을 지키고 있던 우리편은 어묵을 한 냄비 끓이고 있었다. 버스에서 내린 사람 만큼 쓰레기도 가득 나왔다. 모두 피곤해 지쳐있을만도 한데, 어묵탕 한 그릇씩 먹고, 소주와 막걸리로 반주를 하기도 했다. 마치 초저녁에 모인 거처럼 난로에 불을 피우고 둘러앉았다. 

소성리의 밤은 늘 그렇게 깊어갔다. 

소성리로 내려와서 우리 소식을 전해들은 태환언니는 밥먹자고 연락이 왔다. 임회장님과 규란엄니랑 나랑 넷이서 식당으로 갔다. 사실 임회장님은 오후에 인천으로 가야 한다. 영화 공동체상영하는 곳이 있어서 주민과의 대화를 하러 올라가야 하는 데 수확한 들깨를 씻고 말리는 일도 밀려있는 바빠죽을 지경인 와중에 태환언니가 밥을 먹자고 하니 거절은 못하고, 바빠죽겠는데 밥먹자고 한다고 투덜거리면서도 우리는 만났다. 나는 밥먹자고 연락해주는 것만도 고마워서 바쁜 건 다 치우더라도 와야지요 하면서 웃었다. 

태환언니는 사과농사를 짓는다. 과수원 일이 밥 먹을 새도 없이 바쁜 와중에 서울은 가야 하고, 마음을 먹고 아침에 일어나 머리도 감고 올라갈 채비를 했다가 버스가 만원이란 소식을 듣고는 재영아저씨에게 버스 꽉 찼으면 자신은 과수원일을 해야겠다고 알렸다고 한다. 청와궁에서 상복입고 연좌시위 할 줄 몰랐으니, 집회는 빠져도 안되겠나 생각했을거다. 할매들이 생고생하고 있었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미안했을지 가늠이 된다. 

임회장님은 할매들과 호흡을 맞춰도 중간에서 역할해 줄 사람이 없어서 힘들었다는 하소연도 들어야했다. 태환언니가 임회장님 보단 젊고 재바른 사람이라서 태환언니가 안 와서 무척 힘들었다고 투정 아닌 투정도 부려본다.  나는 나대로 왜 미리 나한테라도 귀띔을 해줬더라면 좀 준비를 했을텐데 아쉬워했다. 백광순할매가 그러더란다. 상복은 언제 준비했대?       

그래도 참 다행스럽다. 올라간 사람은 올라간 사람대로, 남은 사람은 남은 사람대로 자기가 지키고 서 있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역할을 해내고 있으니 사드철거 투쟁은 아직 희망이 있다.     

「열매의 글쓰기 2018년11월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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