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80주년 기념 특집>만해 한용운

시인과 독립운동가 이전에 개혁적이고 실천적 불자佛者인 만해를 만나보자

by 김벼룩

만해 한용운, 저항과 자유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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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이들이 만해 한용운을 너무나도 유명한 그의 시와 민족대표 33인 중 하나인 독립운동가로 기억할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만해는 조선불교계에서 변혁적 운동가였다. 이번 <광복 80주년 특집> 트립은 한 사람의 승려로서의 만해의 행적을 따라가 보려 한다. 이 글은 한용운 평전『만해, 그날들』(박재현, 푸른역사)을 바탕으로 필자의 생각을 보태어 작성하였음을 밝힌다.



1879년 충청남도 홍성 성곡리에서 태어난 한용운은 어린 시절부터 세상의 부조리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소년이었다. 유학을 배우며 자라면서도 늘 의문을 품었다. “과연 글을 읽고 과거에 급제하는 것만이 참된 삶일까? 나라가 무너져 가는데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는 세상과 가족, 자신 사이에서 큰 갈등을 겪었다. 부모와 스승은 그가 유학자로서 안정된 길을 가기를 원했지만, 그의 마음은 점점 더 먼 곳으로 향했다.

1895년, 아비가 세상을 떠난 그 해에 홍성 관아에 아전으로 취직했다. 열일곱 살이었다. 식구들의 끼니에 대한 책임은 아비가 죽고 나자 아들들에게 대물림되었다. 목숨 붙은 자들에게 들이닥치는 끼니는 적군보다 더 무섭고 전면적이었다. 해는 매일같이 텁텁한 산의 목구명 속으로 넘어갔고, 산다는 일의 고단함이 발목에 엉겨 붙었다. 유배온 죄인이 죄를 벗겨줄 전령을 기다리는 막연함으로 살아가는, 불안한 수입이었으며 괴로운 수입이었다. 취직한 그해 10월에 국모가 시해되었다. 그 전날부터 강원도 인제 땅에는 강한 서풍이 불더니 그날 밤에 된서리가 내렸다고 했다.
『만해, 그날들』 p. 32

홍성 관아에서는 3년 남짓 일하며 스무 살을 맞이했다. 하지만 세상은 더 막막하게만 느껴졌다. 그동안 배웠던 유학은 무의미했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 수 없는 막막함으로 괴로워했다.

아내가 바느질을 멈추고 호롱불을 가까이 당겨놓으며 물었다.
- 어쩔 요량이십니까.
- 모르겠소. 이대로 더 있을 수 없다는 것만 분명하오.
말을 빨리 꺼낸 것인지 늦게 꺼낸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이리저리 고쳐 생각하며 아내의 눈을 피해 호롱불을 바라보았다. 아내는 더 말을 받지 않았다. 별빛이 탁한 무더운 밤이었다. 미지근한 바람이 불더니 납물 같은 비를 몰아다 퍼부어대기 시작했다. 다음날 이른 새벽에 야반도주하듯 집을 나섰다. 방을 나설 때, 아내는 등을 보이고 돌아누워 있었다.
『만해, 그날들』 p. 37

그리고 특별한 결심도 없이 무작정 집을 떠난다. 딱히 출가를 목적으로 한 가출은 아니었기에 여러 해 동안 이곳저곳을 떠돈다. 반은 중이요 반은 불목하니 노릇을 하며 물에 띄워진 찢어진 낙엽처럼 이곳저곳으로 흘러 다녔다. 그러다 마지막으로 도착한 곳이 백담사였다

찢어질 듯 팽팽하게 당겨진 한겨울 하늘 위로 해가 기어가던 날, 머리를 깎았다. 계명誡命은 봉완奉琓, 법명法名은 용운龍雲으로 했고, 법호法號로 만해萬海를 받았다. 세상을 벗어난 이름이었고 세상 밖에서 쓸 이름이었다. 낯선 이름들을 몇 번씩 조아리며 입에 붙였다. 세상으로 영 나가지 않을 심산이었다. 1905년 정월에,, 설악의 눈은 두껍게 내렸고 오래 버텼다.
『만해, 그날들』 p. 39


산사에서의 생활은 편안했지만 막막했다. 세상의 소식을 듣지 않으려 해도 결국 설악산 골짜기까지 닿았고 두렵고 몸서리쳐지는 소식이 들리는 날이면 하루 종일 배회하다가 처소로 돌아와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잠들려고 애썼다고 한다.

백담사에서는 세상일에 신경을 끊고 불경 공부에 힘썼다. 건봉사로 들어가 참선 수행에 전념하기도 했다. 그러나 1909년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과 1910년 그의 죽음은 한용운에게 적잖은 의미로 다가온 것 같다.

공판은 2월에 있었다. 인근에서 수백 명이 몰려들었지만 방청표가 부족해서 대부분 돌아갔다. 법정에 한국인은 변호사와 안중근의 형제 두 사람뿐이었다. 법정에 들어갈 때 일본인까지 몸을 검사하여 경계를 엄밀히 했다. 이토를 살해한 것에 대한 질문을 받자 안중근은, 이토에게 총을 놓은 짓은 대한국 독립 의병의 참모중장 된 신분으로 행한 바요 절단코 한 개인의 뜻으로 행한 바가 아니라고 진술했다. 사형 집행은 3월 26일 오전 10시 15분에 행해졌다. 안중근은 본국에서 새로 지어간 흰 명주 두루마기를 입고 조용히 집행을 기다렸다. 교수형에 처해지기 전에 변호사를 통해 동포들에게 전하는 유언을 남겼다. 형대에 올라서는 동양 평화 만세를 부르고 숨졌다. 형제들이 시신 반환을 요구하며 통곡했으나 내어주지 않았다.
경술년에 줄곧 표운사에 있었다. 하얼빈역의 소식을 듣던 날, 주전인 반야보전의 추녀 끝 풍경소리가 유난스러웠다. 거울의 끝자락에 매달린 바람이 매서웠다. 여순감옥은 더 추웠을 것이었다.
산속에 용크리고 앉아 있는 것이 죄스러웠다. 불문의 안쪽에서 시급한 일이 무엇일지 생각했다. 스스로 바꾸지 못한다면, 세상의 힘을 빌어서라도 바꿔야 할 듯싶었다. 붓을 들어 헌의서를 적었다.
『만해, 그날들』 p. 84~85


조선이 넘어가던 그해 겨울 만해는 다시 설악으로 들어갔다. 팽팽하게 당겨진 겨울바람이 절 지붕 기왓장을 종횡으로 난도질하는 겨울 추위 속에서 해가 저물기 전에 조선불교의 향방에 대한 글을 마무리할 결심을 한다. 1913년 손가락에 입김을 불어가며 《조선불교유신론》을 집필한다.

《조선불교유신론》은 열다섯 항목으로 나누어 적었다. 각각이 개별적이었지만, 유신 하나로 조여들게끔 구성했다. 첫 번째로 불교의 성질에 대해 논했다. 종교적인 것과 철학적인 것 두 가지로 나누었는데, 종교의 핵심은 희망이고 철학의 골자는 진리라고 역설했다. 희망이 없는 삶은 황폐할 것이고, 희망을 빙자한 미신은 속임수에 지나지 않을 것이기에, 이 둘은 서로 비벼져서 마침내 아름다울 것이었다.
참선에 대해서는 다섯 번째 항목에 실었다. 조선불교의 염세와 독선에 대해 적었다. 그런 불교는 구세의 가르침이요 중생제도의 가르침인 불법과는 상치되는 것이었다. 선의 취지는 본말을 모른 채 세월만 끌고 다니며, 구두선口頭禪만 일삼고 시심마是甚麽*를 찾는 유명의 속물들에 대해서도 답답함을 토로했다. 선의 좌표는 늘 세상 속에 있어야 하고 세상을 벗어나지 않아야 할 것이었다.
『만해, 그날들』 p. 96~97

*시심마是甚麽: 선종에서 참구하는 화두의 하나로 인생의 모든 현상에 관한 근본적인 의문 ‘이것이 무엇이냐’를 던진다.


한용운은 《조선불교유신론》을 통해 불교가 시대에 뒤처진 채 산중에 머물러 있음을 비판했다. 이는 불교를 단순한 종교가 아닌 철학적·윤리적 기반으로 재조명한 시도라고 할 수 있다. 포교 방식의 혁신, 승려의 교육 개혁, 불교 의식의 간소화 등 불교를 사회 속으로 끌어내려는 노력을 통한 불교의 개혁을 주창했다. 비록 승려의 신분으로 사찰에 기거하며 수행하고 있었지만 이때부터는 이미 시대의 부름과 역사의 변화를 외면하지 않고 현장에 나서있었던 것이다.


세계대전의 포화 속에서 1918년 9월 잡지 문예지 성격의 잡지를 창간했다. 제호는 《유심(惟心)》으로 정했다. 오로지 마음일 뿐이라는 것은 부처의 말이기도 했지만 세상의 모습이기도 했다.

창간호의 머리말을 이리저리 구상해 보다가 모두 버렸다. <심心>이라는 시 한 편을 싣는 것으로 머리말을 대신했다.
·……마음은 마음일 것이다. 마음만 마음이 아니라 마음이 아닌 것도 마음이니, 마음 밖에는 아무것도 없으리라. 사는 것도 마음이요 장미꽃도 마음이다·…… 마음이 생겨나면 모든 것이 일어나고 마음이 사그라지면 텅 빈 것조차 없으리니, 마음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 실재함이요 있는 것도 사실은 텅 빈 것이라. 마음은 사람에게 눈물도 웃음도 주느니라.
창간호에 실을 글을 이리저리 청탁했다. 최린은 수양修養에 대한 글을 보내왔다. 최남선은 <동정받을 필요 있는 자가 되지 말라>는 제목의 글을 실었다. 타고르의 시 <생의 실현>도 번역해서 딛고, 현상공모도 했다. 견지동 118번지에 살고 있던 스무 살의 방정환은 <고학생>과 <마음> 등 2편이나 당선되었다. 평양 창전리에 사는 김순선의 글도 뽑혔다. 그렇게 얼추 잡지의 모양새를 갖추어 《유심》을 창간했지만, 그해 12월까지 겨우 세 번 발간하고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만해, 그날들』 p. 133~134


1918년 11월 세계대전이 종전되자 강대국들이 힘의 논리를 앞세워 약소국을 식민지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었다. 각 민족의 자신들의 의지에 따라 그 귀속과 정치를 결정하고 타민족이나 타국가의 간섭을 받지 않는다는 민족자결의 원칙이었다. 1919년 새해 벽두에 동경의 조선유학생들이 독립선언서와 각국에 보낼 독립청원서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이 현해탄을 넘어온다. 만해는 이때부터 각 종교인들을 만나며 독립선언에 대한 논의를 진행한다. 천도교의 최린이 불교계와 유림 쪽을 접촉해 주길 요청했다. 그 사이 고종이 의문스러운 죽음을 맞고 만해는 대각사의 백용성을 찾아간다.

독립선언에 대한 얘기를 꺼냈을 때, 한참 동안 듣고만 있더니 천천히 입을 열였다.
- 나는 만해수좌와 뜻을 함께 하겠네. 하지만 불교계에는 더 찾아다녀 봐야 별 소득이 없을 것이야
- 어인 말씀이십니까.
- 처자식을 버리고 출가한 사람들일세. 그들의 눈에는 와조의 흥망성쇠란 것도 수미산의 반딧불 같은 것 아니겠는가. 세간에는 세간의 도리가 있을 것이야. 끝내 허망한 도리일 테지만·……. 어쨌든 출세간에서부터 가타부타할 일은 아니라고 여기지 않겠는가.
- 스님, 저는 그런 조선불교에서 염세와 독선을 봅니다. 불교만이 아닙니다. 조선 전체가 그렇습니다. 안으로 닫아걸고 스스로 고매하다고 여기며 편안해했던 결과 지금 이 지경에 이른 것이 아니겠습니까. 선禪의 도리는 부처도 죽이고 조사도 죽이는 것일진대, 세상을 등지고 산속에 고요히 들어앉아 지켜내야 할 것이 도대체 무엇일지·…….
-만해수좌·…….
백용성화상이 무겁고 낮은 목소리로 말길을 끊었다. 그리고 한참 동안 빈 찻잔을 손가락으로 쓰다듬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조선의 불교가 이렇게 된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일세. 조선 왕조 5백 년 동안 중들은 사람 취급도 받지 못했네. 죽지 못해 살았다고 해야 할 것이야. 산으로 유람 오는 양반네들에게 술을 대고, 지나갈 길을 쓰고, 가마를 메고 산길을 내달렸네. 그들이 말에 오를 때면 땅바닥에 엎드려 등을 내줬어. 백성들에게조차 걸뱅이 취급을 받으며 손가락질을 당했지 않나.
『만해, 그날들』 p. 137~138

독립선언서가 작성될 당시 불교계의 상황을 볼 수 있다. 500년에 가까운 숭유억불 정책으로 불교계는 거의 초토화되었다. 임진왜란 때 승병들이 피를 흘렸지만 난리가 평정되자 조선 조정은 승려들을 외면했다. 이들에게는 독립이 왕조를 다시 일으키는 예전의 핍박받던 시절로 돌아간다는 의미였다. 만해는 불계 인사들을 몇몇 더 만나보았지만 백용성의 말을 다시 확인받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유림에서 참여할 사람을 물색하고 다녔지만 기꺼이 나서는 이가 없었다.


손병희가 이끄는 천도교에서 주도적으로 민족연합전선을 구성한다. 처음에는 천도교 15명, 기독교 15명으로 총 30명을 예정했지만, 기독교계에서 감리교와 장로교의 공동 참여로 각 8명씩 16명으로 늘었고, 불교계에서 만해와 백용성 2명이 참여하여 33인으로 확정되었다.

최남선이 초안의 작성을 자원하여, 2월 22~23일까지 만세운동 때 반포할 <독립선언서>, 일본 정부와 의회, 조선총독부에 보낼 <독립통고서>, 미국 대통령 윌슨과 파리 강화 회의에 보낼 <독립청원서(獨立請願書)>가 완성되었다. <독립선언서>의 초안은 최린을 통해 천도교의 손병희·권동진·오세창 등에게 전달되어 동의를 얻었고, 이광수가 교정을 보았으며, 만해는 공약 3장을 추가했다.


애초에 3월 1일 <독립선언서>의 낭독은 만해가 맡기로 했다. 33인은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기로 했으나, 유혈 사태 발발이 우려되어 태화관으로 장소를 옮겨 모였다. 모임에 늦은 길선주·김병조·유여대·정춘수를 제외한 29명은 이곳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한 다음 스스로 일본 경찰에 알려 체포되었다. 이후 김병조는 상하이로 망명했고, 나머지는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다.

끌려간 당일부터 경찰의 신문은 시작되었다. 서대문 경찰서의 담당자는 기본적인 인적사항과 독립선을 하기까지의 과정을 먼저 물었다. 이어서 관련자와 문안 작성자 그리고 비용의 출처 등을 캐물었다. 태극기를 사서 나눠준 사람이 누구냐고 경찰이 물었을 때, 말이란 결국 이런 것이고야 마는구나 싶었다 ·…… 검사의 관심사는 증거물로 보관된 압수 문건들에 있었다. 증거물이 혐의를 입증할 수 있을지 신중히 살폈고, 작성자와 소지경위 등을 집요하게 캐물었다. 신문이 끝날 즈음에 그가 아래턱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느리게 물었다.
- 피고는 금번의 운동으로 독립이 될 줄로 알았는가?
길게 대답하지 않았다.
- 그렇다. 독립이 될 줄로 알았다.
- 피고는 금후에도 조선의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
- 그렇다. 계속하여 어디까지든지 할 것이다. 반드시 독립은 성취될 것이다. 일본의 중에 월조月照가 있다면 조선의 중에는 한용운이 있을 것이다.
『만해, 그날들』 p. 149~150


1921년 12월 가출옥 형식으로 석방된 만해는 한동한 선학원에서 기거하며 대장경 국역간행을 위해 법보회를 조직하고 1924년에는 조선불교청년회 회장으로 취임한다. 같은 해 소설《축음》을 탈고하고 1926년에는 시집 《님의 침묵》을 펴냈다. 이후 잡지《불교》사장으로 취임하고 1935년 조선일보에 소설 《흑풍》을 1938년에는 소설 《박명》을 연재하는 등 문학인으로서의 횡보가 더욱 넓어진다. 일반적으로 시와 시집이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의 소설은 민족의식 외에도 여성의 역할이나 차별에 대한 만해의 고민이 보이는 선구적인 작품들이다.


《흑풍》 연재를 시작하던 날, 신문사에서는 소설의 앞부분에 장문의 글을 실었다.

…… 금번 만해 한용운 선생이 본보를 위하여 <흑풍>이란 장편소설을 집필하시게 되었습니다. 4월 8일부터 본보 제4면에 연재될 터로 날마다 여러분의 환영을 받으리라 믿습니다. 선생은 우리 사회에서 있어 가장 존경을 받은 선진자의 한 분이요, 또 가장 널리 명성을 울리는 선배의 한 분입니다. 선생의 인격에 이르러서는 여러분이 잘 아시는 터로 구구한 소개가 도리어 화사첨족畵蛇添足을 이루지 않을까 합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어떠한 작품에든지 그 작자의 인격이 반영되어 있다고 합니다. 에도 고결한 중 열정이 넘치는 선생의 인격으로 가득 차 있지만 더구나 이 <흑풍>에는 한 구절 한 구절이 모두 다 선생의 인격으로부터 우러나온 것이올시다. 선생의 소설은 다른 소설과 유가 다릅니다. 좀 더 다른 의미로 읽어주시기를 바랍니다……
『만해, 그날들』 p. 300


1930년대 이후에도 그는 불교 자주화 운동을 전개하며, 일제가 불교계를 통제하려는 시도를 거부했다. 소설 연재로 겨우 생활을 이어나갔지만 일제의 탄압으로 민족신문의 폐간과 복간이 계속되었다. 연재가 끊기면 살림살이는 더욱 쪼그라들었다.

그가 말년을 보낸 곳은 성북동의 심우장(尋牛莊)이었다. “잃어버린 소를 찾는다”는 이름처럼, 그는 끝내 민족의 잃어버린 자유와 존엄을 되찾고자 했다. 1944년 6월 29일, 심우장에서 입적했다.


만해 한용운은 승려였으나 불교의 울타리에 머무르지 않았고, 시인이었으나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다. 그는 불교의 개혁을 통해 민족정신을 지키고, 문학을 통해 자유를 노래했으며, 행동으로써 독립을 실천한 인물이었다. 오늘날 《님의 침묵》의 구절을 다시 읽을 때, 우리는 그것을 사랑의 노래이면서 시대의 고통에 대한 저항인 동시에 한 명의 승려로서 평생을 불도에 귀의한 그의 목소리로 듣게 된다.


2025년 광복 80주년, 80년 장고한 역사의 의의에서 독립기념관장의 기념사 논란까지 다양한 의미와 이슈가 떠오르는 이때, 템플트립은 만해 한용운을 톺아보았다. 뒤집어진 세상에서 버텨낸 그의 66년 인생에 존경과 감사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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