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이 Seoy Oct 22. 2021

[ 4-4 ] 감금증후군

숨 쉬기 그리고 간호사의 마음

산소 포화도







겨우 살아난 사람에게 자가호흡은 정말 중요한 일이었다.

생명을 유지시켜주는 산소.

병원에서는 혈당체크와 산소 포화도를 검사하느라

간호사들이 주사기를 들고 찾아와서

피를 엄청 자주 뽑아갔다.

잠을 자고 있으면 깨워서 피를 뽑기 시작했다.


폐 엑스레이도 자주 찍어갔다.

잠들어 있으면 또 깨워서

간호사와 촬영 담당자 둘이 내 무거운 상반신을 들고

등 바닥에 촬영을 위한 철판을 깔았다.

환자복 등이 뚫려있어서 철판에 등을 대고 누우면

차갑고 뼈가 닿아 딱딱하고 아팠다.

입원 중 나는 다행히 폐에 물이 차거나

이물질이 들어간 일이 없어서 폐렴에 걸리지 않았다.

산소 포화도는 대체로 안정됐다.



자가호흡 연습시작




어느 날 드디어 호흡기 떼는 연습에 돌입했다.

사실 내가 호흡기로 숨을 쉬고 있다는 걸

한참 뒤에 발견한 나는 당혹스러웠다.

호흡은 언제나 늘 하던 거 아닌가? 호흡을 연습하다니.


혼자 숨 쉬기 연습해봐요.

레지던트는 시작을 알리며 산소공급량을 낮췄다.

그걸 몇 번 반복해서 서서히 낮추고 곧 한계가 찾아왔다.

이 느낌을 내가 잘 설명할 수 있을까?


한 숨, 한 숨을 부자연스럽게 인위적으로 쉬고 있었다.

내 숨쉬기 능력으로는 산소공급이 잘 안되는지 숨이 찼다.

숨이 차니까 머리가 조금씩 아팠다.

마치 머리 둘레에 끈을 질끈 두르고

세게 조이는 듯 머리가 아팠다.

힘들어서 기권을 하면

다시 원 상태로 돌려놓았다.


내가 지쳐서 쉬고 있는 동안

다시 기권했던 상태로 똑같이 맞추고 연습했다.

나는 연습동안 천장의 석고보드 무늬

아니면 냉난방 장치를 쳐다보며

어렵지만 열심히 호흡을 이어갔다.



호흡기를 떼다



호흡기는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저절로 졸업할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호흡기를 떼기 , 먼저 자가호흡이 가능하도록 

단계적으로 연습을 해야 했다.

의사는 어려운 수학문제를 하나씩 내주듯이

 몸과 연결된 기계의 산소포화도를 소폭 낮추고 

어딘가로 사라졌다.

살면서  쉬는 일을 

말그대로  쉬듯 자연스럽게 해와서 

이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산소포화도가 떨어지자 

처음부터 머리와 가슴  깊은 곳이 답답했다.

속으로 이대로 몇 분이나 버틸까 싶었다.

너무 힘들어서 그만하겠다고 할까 싶었다.

너무나 어려운 들숨과 날숨.


그런 느낌 그대로 얼마간 더 지속됐다.

머리가 아득해졌다.

이보다 더 아프면 어떻게 되는 거지?

이때 숨을 놓치면 어떻게 되는거지?

산소부족으로 뇌를 다치면 큰일인데...


심란한 마음.

있는 힘껏 산소를 끌어당기는 내 콧구멍 목구멍.


다행히도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그저 그런대로 질질 끌면서 좀 더 버틸 수 있었다.

그걸 수차례 반복했다. 낮췄다가 잠깐 높이고.

다시 낮췄다가 힘들면 바로 높여두고 숨쉬기를 쉬었다.

가만히 있어도 호흡기를 통해 산소가 공급되고 있었다.


딱히 실패라고 할 만한 결과는 없었지만

연습이 반복되면서 중간에 많이 지쳤다.

어느 순간 호흡기가 차라리  편하게 느껴지는 바람에 

위기감을 느꼈다.


예전의 습관처럼 다시 숨을 쉬는데

힘이 풀린 근육들이 제대로 된 역할을 해내지 못했다.

억지로 들숨과 날숨을 만들어야 했다.

숨을 모았다 내뱉는 힘이 모자라기도 했지만 

박자를 맞추기도 쉽지 않았다.

언제쯤 들이마시고 언제쯤 내쉬어야 하는지도 까먹어서

숨 쉬는 방법을 다시 배워야했다.


이만큼 마셨으면 이제 뱉을 차례인가?

이 느낌이 맞나?


들이마시다 말고 멈추고 생각했다.

멈추었던 숨을 다시 내쉬는데 호흡이 가빴다.

그다음 들이 마시면서 다시,  정도 마시면 된건가?

하고 내쉬었다.

다시 마시려다가,

왠지 더 내쉴 숨이 남아있는 것 같아서 머뭇거리기도 했다.

 

스스로 산소를 마시고 뱉는 일이 

이렇게 어렵고 힘들다니.

나도 모르게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내 목에 뚫린 배꼽 같은 구멍을 얼른 막고 싶었다.


레지던트가 강행한 호흡 훈련 덕분에 

나는 드디어 호흡을 스스로 하게 되었다.

물론 어설펐지만 아무튼 

호흡기가 필요없을만큼 자가호흡을 해냈다.

 왼편 머리맡에 서있던 

거대한 산소유지장치를 졸업하고 

새로운 작은 사이즈의 호흡관을 제공받아 

목에 꽂고 지냈다.


막상 의존하던 것이 없어지니

처음 며칠은 불안했지만 그런대로 적응해갔다.



가족의 마음



시간이 지나서 알았는데

오랜만에 핸드폰 카톡을 열어보니

내가 병원에 있는 동안 수많은 대화가 오갔다.

아이폰을 다룰 줄 모르던 엄마가

어렵게 어렵게 문자 타이핑을 하고

내 지인이나 일로 만난 사람들 몇몇에게 내 소식을 알렸다.

아빠는 혼자 독립생활을 하는 언니로부터 

녹음 편지를 받고 

언니 대신 면회를 왔다.

(면회는 1 가족 1명만 가능)


중환자실에서 악몽에 시달리고

현실과 꿈을 구별하지 못하는 상태였는데

언니 목소리를 들으니 꿈에서 깰 수 있었다.

아빠의 핸드폰 스피커로부터 흘러나오는

친숙한 목소리가 내 자리에서 울려 퍼졌다.

언니의 목소리 덕에

 영혼이 돌덩이같은 몸에 갇혀있다가 

잠시 해방된 듯했다.

아빠의 면회시간이 끝나고

나는 다시 내 몸으로 들어와 또 갇혔지만.

이때 사실 악몽에서는

아빠가 나를 다른 병원으로 탈출시켜주기를

기다리는 꿈을 꾸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면회가 끝나고

“치료 잘 받고 있으렴.” 하고는 뒤돌아서 나가버리니,

현실과 꿈을 구분하지 못했던

내 입장에서는 또다시 악몽의 시작이었다.

나를 두고 가버렸다!

내 눈물은 쉽사리 멈추지 않았다.



격려와 응원




간호사들의 제안으로 엄마 아빠는

내가 좋아할만한 그림과 가족사진

그리고 내 드로잉 몇 장을 집에서 챙겨오셨다.

간호사들은 그 종이들을

내가 눈만 뜨면 시선을 둘 수 있는

모니터 두대의 뒷면에 각각 1장씩 붙여놨다.

어느날은 엄마랑 내가 좋아할 

컬러풀한 공예품 잡지 사진을,

또 어떤날은 아빠가 컬러로 확대 출력한 가족사진을,

어떤 날은 물고기와  드로잉을 출력한 

종이가 붙어있었다.

가끔  그림들에 관심을 가지고 

물어봐주는 간호사들이 있었다.

내가 말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이여서

내 작품이 아닌 엄마가 고른 컬러풀한 공예품 사진을

내 작품으로 오해할 수 밖에 없던 간호사들도 있었다.


 번은  작품으로 오해하지 않도록 

설명을 하려고 했지만 

대화가 엉뚱하게 꼬이는 바람에

그냥 제대로 알려주기를 포기했다.

이런 일이 생길때마다 목소리를   없다는 것이 

 힘겨웠다.


 

언니의 목소리를 들은 그날 

아빠가 나에게 작은 라디오를 주려고 가져왔다.

나를 능숙한 솜씨로 관리해주던 간호사가 

웃음을 참지 못하며 말했다.

“하이고 이거 너무 작은 걸 들고 오셨네.

이거 소리가 나기는 해요?”


'ㅎㅎ. 그래도 적적한데 어떡하겠어요.

그거라도 틀어서 귀 옆에 대주세요.'

라고 나는 말하고 싶었다.


간호사도 의사도 라디오 주파수를

딱딱하고 얇은 버튼을 밀어보고 당겨보면서

숫자 눈금마다  맞춰보려고 하는데 

어쩐 일인지 죄다 잡음

그나마 조금 들리는  같으면 

그래도 국악방송이 나왔다.

꽹가리 소리… 음산한 소리…

그러다가 국악인이 손님으로 나와서 

이런저런 잡담을 하면 

그 이야기에 귀기울이다 대충 잠이 들었다.



열 37도와 아이스 팩




나는 평소 열이 많은 편이었다.

몸에 마비가 생기고 풀리는 과정에서

통증 외에 반드시 또 거쳐야 하는 것이 있었다.

중환자실에서 내 몸에는 항상 미열이 있었다.


바깥은 영하10도의 추운 날씨였기 때문에

간호사들은 얇은 환자복을 입은 내게

이불을 열심히 덮어주었다.

그런데 내 몸의 열은 37.5도를 자꾸 넘어갔다.

얇은 이불로 대체를 해줘도 마찬가지.

내 몸에 뭘 덮기만 하면 어김없이 열이 올랐다.

이제는 내가 추워 보여도

또다시 열이 높아질까봐 무서워서

뭘 덮기가 겁이 난다고 할 정도였으니까.


열이 오르면 나도 무척 힘들어졌다.

아무것도 안하고 있는데도 기진맥진.

정신을 추스릴 수 없이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열이 내리면 다시 편안했다.

몸의 열이 36도가 될 때까지

아이스 팩들을 이곳저곳에 끼고 있었다.

열이 내려가서 아이스 팩을 치우고 나면 

어느새 다시 더워졌다.

“아이스 팩 갖다 줄까요?”

그러면  병원 시트로 감싼 아이스 팩으로 

냉찜질을 했다.

뒷목, 겨드랑이, 옆구리, 팔뚝…


회복의 단계에 들어섰다는 신호였을까

마비가 완전히 풀렸는지 

상반신은 어느날부터 덥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스 팩을 사용한 직후부터 

 부작용으로 

얼음이 없는데도 감각이상이  것처럼 오한을 느꼈다.

체위변경마다 내가 한동안 부르르 떠는 모습을 보고는

조무사들이 이불로 단단히 몸을 덥혀주었다.

얼음을 뺐는데도 

어딘가에 얼음이 있다는 착각이 들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체온조절 능력이 잠깐 고장났던 것 같다.



간호사의 마음-머리카락 자르기






계속 중복되는 말이지만 간호사들은 무척 바빴다.

나도 환자인데 다른 환자를 돌보느라 정신이 없곤 했다.

그래서 나를 매일 깨끗하게 해줄 수도 없었다.

교대근무를 하니까 늘 사람이 바뀌었고

그래서 가끔 예전 담당자가 다시 오면 반갑고 덜 외로웠다.

 머리를 잘라주던 간호사도 

나에게 익숙했던 간호사들   명이었다.

머리 길이, 머리 숱이 너무 많아서 감겨주거나

체위 변경을  때마다 걸리적 거려서 

관리해주기가 많이 어렵다고 했다.

그래서 머리 길이를 짧게 해보자고 먼저 제의를 해왔는데

나도 마침  머리가 두껍게 떡이  느낌도 

너무 불쾌해서 싫었던 참이었다.

서로 커트를 하기로 약속을 했고 

다음 교대 순서로 다시  간호사가  ,

미용 가위 세트를 들고 나타났다.

 목에 빳빳한 휴지를 꼼꼼하게 둘러줬다.

앞서 미리 그녀가 말하길,

서툴지만 잘라본 경험이 있으니 안심하라고 했다.

스걱스걱. 머리카락이 잘리는 소리.

나는 긴 머리에 별다른 애정이 없어서

뚝뚝 머리카락이 휴지 위로 떨어지는 동안 

편안하게 있었다.

그리고 내 머리를 잘라주는 간호사를 만났던

첫 날을 떠올리면서 감회가 새롭기도 했다.


처음 만난   상태는 

전신으로 마비가 퍼져있는 상태였고

팔은 난간을 겨우 잡고 흔들 수 있는 정도였다.

처음 겪는 통증에 놀라고 불안해서 

난간으로 소리를 내며 간호사를 불렀다.

 동안 다른 환자를 돌보며 

가요 갑니다 간다니까요!” 소리를 질렀고 

 간호사보다 목소리가   다른 간호사가 

나에게 와서 그만 부르라고 호통을 치고 갔다.

나에게 아무것도 해줄 일이 없었던 모양이다.

다들 그러고 내 곁을 비웠다.

그리고  몸이 꽁꽁  얼음처럼 

마비가 전체로 골고루 퍼졌다.


그때 나는 감각이 없어지는 몸 때문에 겁에 질려있었다.

간호사는 그 누구보다도 바빠서 숨 막혀 했다.

머리를 자르던 날은 운 좋게도 둘 다 괜찮았고

상황이 도왔는지 꽤 여유로웠다.

최악의 경우는 머리를 자르다 말고

가위를 내 이불 위에 던져놓고

긴급 환자를 보러 가는 상황일테지만

다행히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양치질



병원에 들어온 이후 

거의  달쯤 이빨을 닦은 적이 없었다.

전신마비가  몸으로 왔다가 사라질 때까지 

가만히 누워서 기다렸다.

입에 보름정도 호흡기를 꽂고 숨을 쉬다가

자가호흡이 안돼서 목을 절개해 거기로 숨을 쉬었다.

그러니 입을 청결히  상태가 아니었다.


숨이 끊어질 위기를 넘겼고 

치료제 투약  마비 풀림이 시작됐다.

(면역 글로불린 1 5, 2 5.

정확하게 말하자면 치료제는 아니다.)


풀리는 동안 그 전에 불가능했던 자세들을 해 나갔다.

그 중 하나가 비스듬하게 앉아있기였다.

그리고 입에 소량의 물을 머금는 것도 

어느정도 가능해졌다.

다만 왼쪽 얼굴에 마비가 남아서 

물이 입밖으로 빠져나오기도 했다.

드디어 간호사의 도움으로 양치질을 하게  날은 

감격스러웠다.



간호사의 마음 - 손 마비풀림



중환자실에서 의사는 회진마다 집요하게

 팔과 다리의 , 감각, 자율운동이 되살아난 정도를 

테스트하고 관찰했다.

“당겨보고”, “밀어보고”, “더더더더더”

팔의 힘이 하루하루 좋아졌고

손의 마비풀림이 한창 진행중이었다.



간호사가 내 마비된 손이

나중에 변형이 오면 안된다고 걱정하면서

작은 도구들을 여러 개 손수 만들어줬다.

새 붕대로 칭칭 감아서 테이프로 모양을 고정시킨

공 모양과 막대기 모양을 각각 2개씩.

그걸 받은 시기에 내 손에는 큰 변화가 있긴 했다.



나의 경우 손가락 마디마디가 

무척 불안할 정도로 불편했다.

양 손의 손가락 관절들을 옥죄는 장갑을 낀 줄 착각했다.

그러다가 손가락이 제멋대로 오그라드는 착각.

그땐 몰랐지만 두 착각 모두 감각이상 증세였을 것이다.

그것이 점점 심해져서 젓가락으로

손가락을 번갈아 걸어 놓아야 안정감이 들었다.

이걸 간호사가 반대했지만

나는 그게 심적으로 더 나아서 어쩔 수 없었다.



(다음 이어서)

이전 09화 [ 4-3 ] 감금증후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