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HANESI 7월호
어느 때와 같이 불편한 식사였다. 소라는 말없이 입에 밥을 밀어 넣고, 재영은 다섯째와 막내를 양 옆에 끼고 밥 먹이느라 분주했다. 도리도리 고갯질 하는 막내, 한 숟갈이라도 더 먹이려는데 쨍쨍쨍- 숟가락 부딪히는 소리가 난다.
다섯째가 고 짧은 새를 못 참고 숟가락으로 밥그릇을 내리치는 것이다. 소라가 매섭게 노려보자 입술을 댓 발 내밀고선 뿌우 뿌우 소리를 내며 모른 체한다.
“공재원, 가만히 있어.”
재영이 경고하자 숟가락을 더 크게 휘두르는 게 아닌가? 숟가락 소리에 맞춰 소라의 표정도 점점 더 일그러졌다.
“공재원. 밥 먹을 땐 시끄럽게 하는 거 아니랬지?”
“소라 누나가 자꾸 나 보는데.”
아니나 다를까 소라는 이미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재영은 아이의 손에서 숟가락을 뺏어 들었다.
“네가 시끄럽게 하니까 그렇지. 밥 먹을 때 시끄럽게 굴면 누구나 싫어해.”
아이는 볼을 크게 부풀리며 딴짓을 하더니 소라를 향해 혀를 날름거렸다.
“공재원.” 결국 소라가 입을 열었다.
“누나가 뭐랬어? 소라 누나 놀리지 말랬지?” 재영이 황급히 재원을 혼냈다.
“나 아무것도 안 했는데...”
“안 하긴 뭘 안 해. 누나가 다 봤어. 그러는 거 아니야. 빨리 밥이나 먹어.”
대충 수습하고 막내 밥을 마저 먹이려는데, 기어코 소라는 짜증을 내었다.
“와, 나 진짜 어이없네. 무슨 애가 저렇게 약아빠졌어?”
“약았다니,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재영이 인상을 쓰며 한 소리하자,
“내 말 틀렸어? 봐봐, 지금도 눈 똑바로 뜨고 거짓말 치잖아. 무섭다, 무서워.”
“그냥 장난치는 거야. 애들은 원래 그래.”
원래 그런 게 어딨냐며 소라가 따박따박 대꾸를 하였다. 재영은 한숨을 쉬며 피곤한 얼굴을 쓸어내렸다.
“네가 좀 참으면 안 돼? 네가 얘 밥 먹이는 거 아니잖아. 저녁 다 먹었으면 올라가. 시끄럽게 굴지 말고.”
더 대답할 생각이 없다는 듯, 재영은 몸을 돌리고 막내에게 밥을 먹였다. 소라는 기가 차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재원은 언제 그랬냐는 듯 얌전히 앉아 혼자 밥을 먹고 있었다. 그 꼴을 보고 있자니 웃음도 안 나왔다. 그래, 나도 니들이랑 말 섞고 싶지 않아. 소라는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대에 누워 친구와 영상통화를 하면서 식사시간에 있었던 일을 토로하는데 생각할수록 기가 차는 게 아닌가.
“웃긴다. 요즘 애들은 다르다더니, 무섭네.”
“여하튼 이 집에선 나만 욕먹는다니까. 내가 나가든가 해야지.”
“그러니까 얼른 독립해. 나였으면 하루도 못 버텼어. 아무리 생각해도 너희 어머니께서 잘못 선택하신 것 같아. 그 아저씬 좀 아니지 않니?”
입 안이 썼다. 그녀의 말에 동의했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고 싶진 않았다. 소라는 동조 대신 회피를 선택했다.
“야, 나 이제 씻어야 해. 끊는다.”
침대에 누워 낯선 천장을 바라보며, 소라는 눈을 질끈 감았다. 촌스러운 분홍색 벽지 위로 불행의 시작이었던 그날이 떠올랐다.
뭣도 모르던 초등학생 시절, 아버지는 병으로 돌아가셨다. 유전병이었다. 그날부터 소라에겐 엄마뿐이었다. 아니, 아버지가 병원에 누워있을 때부터 그녀의 세상은 그녀와 엄마 둘 뿐이었다. 하나밖에 없는 딸마저 병으로 잃을까, 엄마 미화는 딸을 위해 모든 것을 했다. 먹고 입는 무엇 하나 허투루 하지 않았다. 엄마의 사랑을 듬뿍 받은 소라는 다행히 건강하게 자랄 수 있었다.
“엄마, 이제 걱정 마. 내가 돈 많이 벌어서 엄마 호강시켜줄게. 나랑 둘이 놀러 다니자.”
“말만이라도 고맙네. 엄마 신경 쓰지 말고 너 하고 싶은 거 해. 그게 엄마 위하는 거야.”
모든 게 완벽했던 두 사람의 세상이 금이 가기 시작한 건, 미화가 보육원에 봉사를 가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소라야, 엄마 봐봐. 어때? 괜찮아?”
“웬일로 화장을 다 했어? 어디 동창회라도 가?”
“아니, 그냥 보육원.”
“일하러 가는데 왜 화장을 했을까?”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하루가 다르게 환해지는 얼굴이 말해주었으니까. 남자가 생겼구나.
‘다행이야. 나도 독립하면 엄마 혼자 남게 될 테니까.’ 엄마에게 소중한 사람이 한 명 더 생긴다는 사실이 조금 섭섭하기도 했지만 그녀는 진심으로 엄마의 새로운 삶을 응원했다. 그녀와 엄마의 생각이 다르단 걸 알기 전까진.
“소라야, 엄마 만나는 사람이 있어.”
“알아. 내가 누구 딸인데, 그것도 모르겠어? 나는 찬성이야. 만나는 사람이 있으면 좋지.”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소라와 달리 미화는 재차 말을 아끼었다. 아무리 봐도 무언가 숨기고 있는 게 분명했다. 뭐지? 그 남자가 별론가, 사기꾼이었나? 소라는 제 엄마를 재촉하였다.
“왜? 그 남자가 헤어지재? 무슨 일인데. 걱정 말구 말해 봐.”
“그게... 엄마 그 사람이랑 결혼을 할까 해.”
“뭐어? 결혼?”
엄마가 결혼을 한다고? 다른 남자랑?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미화는 조곤조곤 그 남자에 대해 이야기했다. 상냥하고 배려심이 깊어. 나에게도 잘하고 애들한테도 잘하는 사람이야.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줘. 그 말에 결국 지고 말았다.
“알았어. 대신 내가 먼저 만나볼게. 괜찮은 사람인지.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그럼 당연하지. 안 그래도 자리 한 번 마련하려 했어.”
미화는 조심스레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네가 알아야 할 게 있어. 그 남자 애가 있어.”
개의치 않았다. 미화에게도 소라가 있지 않은가. 다 큰 딸로서 엄마에게 짐이 되고 싶진 않았다.
“걱정 마. 그 애랑도 잘 지낼 테니까. 근데 몇 살이야? 나보다 나이 많나?”
미화는 대답 없이 웃었다. 다들 착하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엄마가 이상했지만 굳이 더 물어볼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만나봤자 몇 번을 만나겠어.’ 가벼이 넘겼다. 그때 물었어야 했는데.
고풍스러운 중식당이었다. 소라는 있는 힘껏 꾸미고선 조신하게 앉았다. 쉽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엄마와 결혼할지도 모르는 남잔데, 아주 깐깐하게 따질 생각이었다.
약속시간이 몇 분 안 남았을 때쯤, 머리가 희끗한 남자가 그들을 향해 걸어왔다. 단정하지만 제법 낡아 보이는 곤색 카라 티를 입은 그는 양손에 아이들을 데리고 왔다. 얼핏 봐도 유치원생, 초등학생쯤 되어 보였다.
‘너무 어린 거 아니야?’
소라는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이렇게 어리단 말은 없었잖아. 엄마를 한껏 째려보았지만, 미화는 그녀의 손을 가만히 붙잡으며 진정시켰다. 조금만 참아.
굳어버린 안면 근육으로 애써 웃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정미화 씨 딸 임소라입니다.”
“네가 소라구나. 만나서 반가워. 아저씨는 공남철이야. 여긴 우리 애들, 재원이랑 재하. 얘들아 소라 누나한테 인사해야지.”
처음 보는 아이들이 낯설기만 하건만, 미화는 그저 예쁘다며 아이들을 쓰다듬기 바빴다. 미화와 아이들은 그 전에도 자주 봤는지, 아이들은 서슴없이 그녀의 품에 안겼다. 남자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설마 엄마가 쟤넬 키워야 하는 건 아니겠지?’
무서운 생각을 애써 지우며 소라는 억지로 웃어 보였다. 중요한 건 애가 아니라 남자니까, 섣불리 판단하지 말자 임소라.
남철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시종일관 차분하게 말했다. 엄마를 대하는 모습이나 아이들을 챙기는 모습이 퍽 괜찮아 보였다. 이 정도면 첫인상은 나쁘지 않다. 소라만 심각한 식사가 계속되는데, 미화가 물었다.
“큰 애들은?”
“학교 때문에 좀 늦나 봐. 곧 올 거야.”
큰 애들? 미화와 남철의 대화에 소라는 머리가 어질 했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엄마를 바라봤지만, 그녀는 소라의 허벅지를 꾹 누를 뿐이었다.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지?
중고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남학생과 여학생이 그들이 있는 테이블로 왔다.
“오, 왔니? 인사해. 미화 아줌마 딸 소라 누나야.”
“안녕하세요. 공재인입니다.” 여자아이가 말했다.
재인보다 머리가 하나 반은 더 큰 남학생이 말했다. “공재희입니다.”
“어, 그래. 나는 임소라야.”
소라는 떨떠름하게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재인이는 손을 잡지 않고 빤히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소라가 어쩔 줄 몰라하자, 재희가 재인을 툭 치자 그제야 마지못해 손을 잡았다. 손가락만 살짝.
“하하, 얘들이 사춘기라 낯을 가려. 소라 네가 좀 이해해라.”
남철은 사람 좋은 얼굴로 호탕하게 웃었다. 처음에는 괜찮아 보였던 그 얼굴이, 슬슬 가증스러워 보이려 했다.
‘애가 넷이라니, 엄마는 왜 이런 말을 나한테 하지 않았지? 반대할까 봐?’
미화의 생각이 빤히 보였다. 그렇게 이 아저씨가 좋나? 소라는 눈을 까딱거리며 남철을 훑어보았다. 배 나온 중년 아저씨에 불과한데. 굳이 장점을 꼽으라면 머리가 벗겨지진 않았다는 것 정도?
남철을 땀을 질질 흘리며 어린아이들을 밥 먹이고 있었다. 입가에 짜장을 잔뜩 묻히며 먹는데 얼마나 꼴 사납던지. 가뜩이나 없는 입맛이 완전히 가셨다. 젓가락으로 애꿎은 면발만 지분거리는데 짜장 양념이 툭, 그녀의 옷자락에 묻었다.
고개를 퍼뜩 들자, 재희라는 아이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피했다.
“아이구, 어떡해. 소라야 미안하다.” 남철이 미안해하며 사과했다.
“물로 지우면 지워질 거예요.” 말없이 밥만 먹던 재인이 입을 열었다.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소라는 벌떡 일어나 자리를 나섰다.
그때, 미화가 그녀를 불렀다.
“소라야, 애가 실수로 그런 거니까 너무 화내지 마. 알았지?”
소라는 대답 대신 성큼성큼 화장실을 향해 걸어갔다.
세면대에서 옷을 빠는데 점점 더 화가 났다. 소라는 입술을 꾹 깨물곤 온 힘을 다해 옷을 문댔다. 하지만 지워지지 않은 얼룩처럼, 차오르는 감정도 가실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결국 옷을 흠뻑 적시고, 찬물 세수를 하고 나서야 겨우 맘을 추스를 수 있었다.
‘참자, 참아. 집에 가서 엄마랑 얘기하면 돼. 일단 여기선 가만히 있자.’
심호흡을 하며 테이블로 돌아갔다. 젖은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는데 못 보던 사람이 있었다. 통통한 체형에 동그란 안경을 쓴 여자와 키 큰 남자였다. 저 사람들은 누구지?
“어, 소라 왔구나! 얼른 와서 애들이랑 인사해.” 남철이 손을 흔들며 반갑게 맞았다.
그 말에 맞춰 남자가 고갤 돌렸다. 시원시원한 눈매에 오뚝한 코, 살짝 올라간 입꼬리. 누가 봐도 훤칠한 미남이었다. 그리고 소라는 그가 누군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첫사랑, 재찬이었다. 그런데 그가 왜 여기에…?
어찌 된 영문인지 눈만 멀뚱멀뚱 뜨고 있는데,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소라를 향해 허리 굽혀 인사했다. 그리고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공남철 씨 첫째 아들, 공재찬입니다.”
공재찬? 공남철, 공재하, 공재희, 공재인, 공재원… 공재찬?
소라는 소리 없이 경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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