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에 세계에 홀로 남겨진 기분이 들거나 위기의 순간이 왔을 때, 그 순간이 바로 ‘진정한 나’, ‘날 것의 나’와 마주할 수 있는 시간이다.
첫 출근한 곳은 전라북도 장수군, 해발 500M 산속에 위치한 시골 폐수처리장이었다. 지금까지 경상도에 작은 바닷가 마을인 ‘월내’라는 곳에 살았는데, 전라도는 태어나서 처음 가보는 곳이었다. 회사 동료의 차를 타고 꾸불꾸불한 산길을 따라 올라갔다. 마치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모든 것이 익숙하지 않고 불확실했다. 두려움을 진정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예측해보지만 소용없었다. 산 정상에 올라왔을 때, 건설 현장이 내려다보였다. 여러 대의 포크레인이 산허리를 파고 있었고 덤프트럭이 흙을 실어 날랐다. 건설 현장 구석에 있는 작은 컨테이너 사무실에 도착했다. 창문으로 담배 연기가 스며 나왔다. 문을 열자 사무실 안은 짙은 안개가 낀 것처럼 앞이 보이지 않았다. 화생방 훈련이나 두더지를 잡기 위해 연기를 피운 것 같았다. 금세 내 옷에도 담배 연기가 스며들었다.
처음 만난 그들의 얼굴은 낯설지 않았다. 앞으로 계속 볼 것 같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한 달만 현장 경험을 하고 돌아오면 자신이 이곳에 오겠다는 선배의 말이 떠올랐다. 하지만, 선배는 허리를 다쳤다는 핑계로 오지 않았다. 다음 달에도 계속해서 나는 그곳에 머물렀다.
산속의 어둠은 빨리 찾아왔다. 숙소는 산골 마을의 오래된 집이었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사는 집에는 현장소장이 방 한 칸을 월세로 지내고 있었다. 나는 현장소장과 함께 지내야 했다. 그는 쉰 살이 넘은 고참 부장이었다. 집 옆에는 소를 키우는 외양간이 보였다. 오래전 동화책에서 보았던 산골 마을 모습 그대로였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도시 생활을 해온 나온 나에겐 그곳은 낯선 환경이었다. 높고 화려한 빌딩에서 사회생활을 할거라는 내 꿈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집 밖에 나와 잠시 하늘을 쳐다보았다. 밤하늘에는 수많은 별들이 쏟아져 내릴 것만 같았다.
방안에 들어오자 캐리어 가방 하나가 놓여 있었다. 현장 소장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는 열지 않고 밖으로 꺼내 놓았다. 누구 것인지 묻자, 지난주에 이곳에 왔던 신입 직원이 두고 간 짐이라고 말했다. 현장 소장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고는 라이터를 켰다. 문득 나의 선택이 잘못된 것은 아닌지 혼란스러웠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못 버티고 도망을 갔을까? 짐까지 놔두고?’
이런 산골 마을에 갓 들어온 신입 직원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먼저 이곳을 다녀간 그의 생각이 궁금했다. 현장 소장은 늦은 저녁까지 계속 담배를 피웠다. 작은 방 안에 담배 연기는 환기가 되지 않아 나는 공기정화기가 된 기분이었다. 몇 차례 기침하자, 그는 내가 야반도주를 할까 봐 신경이 쓰였는지 담뱃불을 끄고 창문을 열었다. 찬 바람이 들어왔다. 쌀쌀했다. 이불을 덮어쓴 채 잠 못 이루는 첫날 밤을 보냈다.
수탉 울음소리에 잠을 깼다. 현장 소장은 아직도 잠을 자고 있었다. 도시보다 시골 산 속 공기가 몸을 가볍게 해주었다. 밖으로 나와 화장실을 찾았다. 할머니에게 묻자 소가 있는 외양간을 가리켰다. 걸어가면서 소와 함께 어떻게 볼일을 봐야 할지 상상했다. 외양간 가까이 다가가자 소똥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미 두 발은 소똥을 밟고 있었다.
엄마 소와 송아지가 보였다. 송아지는 눈을 끔뻑끔뻑 거리며 나를 쳐다보았다. 나도 쭈그리고 앉아 그 녀석 눈을 쳐다보았다. 엄마 소는 여물을 씹어 먹으면서 내 모습을 쳐다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소와 마주 보며 똥을 싸는 내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다. 엄마 똥이 철퍼덕하고 떨어지자, 이어서 송아지 똥이 철퍼덕하고 떨어졌다. 두 마리 소가 어쩌다 이곳에 온 나를 반겨주는 것 같았다. 문득 권정생 작가님이 쓴 ‘강아지똥’ 이야기의 첫 장면이 떠올랐다.
돌이네 흰둥이가 똥을 눴어요.
골목길 담 밑 구석 쪽이에요.
흰둥이는 조그만 강아지니까 강아지똥이에요.
- ‘강아지똥’, 권정생 -
강아지똥처럼 낯선 곳에 혼자 남겨진 기분이었다. 잠시 우울한 기분이 들었지만, 날것의 천국인 이 시골에서 무엇을 경험하고 배울 수 있을지 호기심이 났다.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해답이 그 곳에 숨어 있을 것 같았다.
미지에 세계에 홀로 남겨진 기분이 들거나 위기의 순간이 왔을 때, 그 순간이 바로 ‘진정한 나’, ‘날 것의 나’와 마주할 수 있는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