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세 번째 일기, 독감의 기록.

by 지승유 아빠

잔인한 크리스마스였다.


모든 일은 딸아이에게서 시작되었다. 물론 근본을 따지기 시작하면 딸아이가 다니는 어린이집부터 따져야 하겠지만 뭐, 우리 가정에 국한해서 그렇다는 이야기다.

크리스마스를 얼마 안 남긴 오후, 아내로부터 전화가 왔다. 큰아이가 열이 난다고 했다. 아주 자랑스럽게도 우리 딸은 잘 아프지 않은 아이였다. 아주 아기 때를 제외하면 감기도 그렇게 자주 걸리는 아이가 아니었다. 한 번은 배가 아프다고 울고 불고 해서 병원에 가려고 한 적이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집으로 돌아가 저녁을 먹였는데, 그걸로 배 아픈 것이 다 나아버렸다. 배가 아픈 것이 아니라, 배가 고팠던 것. 그 정도로 큰아이는 잘 아프지 않는 아이이다. 그런 아이가 열이 난다니, 그것도 40도 가까운 고열이 난다니.


나는 모든 할 일을 제쳐두고 집으로 달려갔다. 아이는 자리에 누워있었다. 아무리 아파도 놀던 아이가 누운 채, 끙끙 앓고 있는 모습은 적지 않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아내는 출산을 한 달 정도 남긴 만삭이었고, 자신의 몸 하나 챙기기도 힘들어할 시기였다. 하지만 열이 나는 아이를 연신 물수건으로 쓸어내리며 열을 내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내가 도착하자마자 병원으로 갔고, 아이는 독감 정확하게는 인플루엔자 판정을 받았다. 부랴부랴 발목 혈관을 통해 링거를 맞추자 아이는 급히 열이 떨어지며 겨우 잠들 수 있었다. 누워있는 아이를 보는 만삭의 아내도 안쓰러웠고, 그렇게 명랑하고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 아이가 병원 침대에 누워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보는 것도 마음이 아팠다.

아이는 삼일 정도를 앓았다. 열이 나고, 약을 먹으면 열이 내렸다가, 다시 열이 나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처음에는 힘없이 늘어져 있기만 하던 아이가 점차 종알종알 말을 하기 시작했고, 책을 읽어달라고 하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열이 난 상태로 역할놀이까지 소화해냈다. 물론 평소의 힘찬 모습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드레스를 찾아 입고 역할놀이에 열중하는 아이의 모습에 안도했다. 삼일 동안 내내 죽을 끓이고, 각종 국물을 끓였다. 아내는 만삭의 몸으로 배와 꿀을 달이고, 계속 아이를 안고 어르고, 달랬다. 그리고 마침내 아이가 다 회복되어서 일반적인 식사를 하게 되었을 때, 아내가 열이 나기 시작했다.

12월 24일이었다.


아이가 괜찮아졌다곤 하지만, 완전히 회복된 것은 아니었다. 분명히 곁에 있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로 했다. 하지만 아내의 상태도 말이 아니었다. 아내는 임신 기간 내내 입덧에 시달려, 거의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있었고, 병원에 가서 영양제를 주사해야 할 정도로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그렇게 체력이 떨어져 있던 아내가 40도 가까이 열이 나고 있으니 아내도 나도 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배속의 아이 때문에 아내는 약 먹기를 거부했다. 해열제도 항생제도 먹지 않았고, 인플루엔자 판정을 받았지만 타미플루도 먹지 않았다. 나는 아내를 설득하고 설득하다가 끝내 잠든 아이의 곁에서 아내의 팔다리를 주무르는 수밖에 없었다.


아마 그때가 둘째를 임신하고 키우면서 지금까지의 생활 중 가장 무기력한 순간이 아니었던가 싶다.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식사를 준비하고 무엇인가를 먹이고 주무르고 몸은 계속 바쁘고 마음은 분주했지만 정말 아내와 뱃속의 아이에게 직접적으로 도움을 줄 수 없는 상황. 기도밖에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아내는 12월 24일 늦은 밤, 정확하게는 25일로 넘어가는 새벽 응급실로 가야만 했다. 더욱 나를 힘들게 했던 것은 아내를 혼자 구급차에 태워 보내야 했던 것이다. 아이는 아직 완치되지 않은 상태였다. 한 밤중에 깨서 울거나 사람을 찾았고, 우리는 누군가에게 아이를 부탁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우리에게는 우리밖에 없었다. 선택을 해야 했고, 아내는 용감하게도 혼자 구급차를 타고 병원으로 갔다.

아내는 다음 날 아침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열은 조금 내려있었고, 의사와 상담 끝에 타미플루를 먹기로 했다. 구급차에서 아내는 고열 때문에 몇 차례 구토를 했고, 너무 아프고 걱정이 되어서 울었다고 했다. 혹시 아이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었고, 자신이 아픔을 못 견뎌서 약을 먹어서 아이가 잘못된다면 그것도 역시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고 했다. 아내도 진퇴양난(進退兩難)의 고난을 홀로 겪고 있었던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아이와 아내는 무사했다. 하지만 아내는 삼일인가 사일을 정말 많이 아프고 나았다. 우리는 일주일을 넘게 죽만 먹고살았다.

아내와 아이가 괜찮아지자 나는 스스로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아이의 어린이집으로부터 시작된 독감이 아이를 거쳐 아내에게로 그리고 이제는 내 차례가 된 것이 아닌가. 아직 아내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데 나까지 아프면 도대체 아이는 누가 돌볼 것인가.


그리고 2016년의 연말, 저녁 먹은 것을 치우고 나는 몸에 열감이 있는 것을 깨달았다. 근육통이 뒤따랐고, 오한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린 아내가 아이를 돌보는 동안, 나는 이불을 덮고 덜덜 떨고 있었다. 이렇게 삼일을 아프면 우리 가족은 어떻게 될 것인지 겁에 질리며 잠들었다. 잠들기 직전 나의 체온은 39도가 넘었다.


몇 시간을 자고 일어나자 오한은 씻은 듯 사라져 있었다. 열도 37도까지 떨어져 있었고, 아무리 보아도 환자의 상태는 아니었다. 온몸이 땀에 젖어 있었고, 약한 열감이 남아 있었지만 상태가 급히 호전되었음을 스스로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큰아이를 일주일이나 괴롭히고 다시 아내를 괴롭힌 독감은 나에게는 몇 시간의 독감 체험을 하게 해 주고 사라졌다. 나를 이렇게 튼튼하게 낳아주신 어머니와 조상님들에게 감사했다. 진심으로. 병원에 가보지는 않았다. 주말을 보내고 월요일, 우리 셋은 아니 정확하게 넷은 거의 다 나아있었으므로.


오늘 지루함을 이기지 못한 아이들은 서귀포의 '하논'에 가서 하루 종일 놀았다. 경기도에 가면 흔하디 흔한 논을 서귀포에서 유일하게 볼 수 있는 곳이었는데, 아이들은 아직 모내기를 하지 않은 논에서 하루를 보냈다. 멀리 백로나 꿩도 관찰하고, 냇가에 돌도 던지고, 옛 서귀포 성당터에 가서 꽃도 꺾고, 남에 밭에 들어가 쉬야도 하면서. 논이며 돌담길이며 성당터에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리는 하루 종일 들판을 독차지하며 놀았다. 집에 돌아와 흙냄새에 푹 젖은 아이들을 씻기며 아무도 아프지 않고 건강한 것이 얼마나 중요하며 감사한 일인지에 대해 생각했다. 큰아이는 금세 잠들었고, 둘째는 한참 뒹굴다가 잠들었다. 잠든 아이에게 잠옷을 입히고 바로 눕히면서 그때, 우리 가족의 무기력한 순간들을 생각했다. 정확하게는 내가 무기력한 순간들을. 그리고 잠든 아이들의 볼을 쓰다듬으며 늘 우리가 함께 있을 수 있음이 얼마나 고마운지 깨달을 수 있었다.


아이들은 아주 푹 잠들어 있었고, 아내도 푹 잠들어 있었다. 날씨는 따뜻하고 집안도 따뜻했다. 잠든 아이들도 아내도 아마 아주 좋은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닐까.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