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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한겸 Apr 16. 2023

불안장애 치료기 230416

오늘 4월 16일이구나. 저 숫자를 보는데 갑자기 마음이 안 좋아졌다.

웃긴 건 어제 4월 15일에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는 것. 어제 어느 절에 가서 '수륙대재'라는 행사를 구경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세월호와 관련 있는 행사가 아니었나 싶다. 어제는 전혀 그런 생각을 못했다. 0416이라는 날짜를 보고서야 아 오늘이구나. 벌써 또 9년이 되었다고. 이렇게 생각한 거다. 남의 일이란 이런 것인가. 멀기도 멀다. 내 일 내 가족의 일이었다면 매일 잊지 못하고 가끔 잊으며 4월이 뭐야 3월부터도 힘들었겠지 2월도 1월도...


최근 너무 힘들어서 커피를 마셨다. 나는 커피나 카페인을 마시면 많이 힘이 나고 그 대신 두근거리고 배탈도 잘 나고 새벽 2~3시까지 잘 못 잔다. 낮에 견디기 위해 감수하고 마실 때가 있다. 요 며칠 커피를 매일 마셨다. 그래서 새벽 늦게 잤고 오늘 오후 1시가 다 되어서 일어났다. 원래 늦어도 8시엔 일어나는데. 아주 무척 드문 일이다. 


오늘 아파트에 벼룩시장 행사가 있어서 나도 몇 가지 물건을 갖고 나갔다. 정리하고 싶어서 벼르던 것들이다. 관리사무소에서 테이블을 빌려서 물건을 늘어놓았다. 반은 무료 나눔, 반은 1000~3000원. 포스트잇 두 개를 붙여 안내했다. 사람들이 말을 거는 게 긴장되긴 했지만 물건 정리가 하고 싶어서 서 있었다. 무료 나눔 물건은 주로 봉제 인형으로, 어린 친구들이 와서 '이거 진짜 공짜예요?' 이러면서 좋아하면서 많이 가져갔다. 인형은 왠지 감정도 좀 담겨 있는 것 같고 또 깨끗하고 거의 새것인데 쓰레기봉투에 넣어 버리기도 아까워서. 많이들 가져가 주어서 좋았다. 그리고 1000원짜리 하나, 2000원짜리 하나 팔아서 3000원을 벌었다.


비가 조금 내리는 듯해서 비를 핑계로 얼른 물건을 정리해 집에 들여다 놓고 (물건을 펼쳐 놓고 누가 사려나 기다리는 게 꽤 신경 쓰여서 그만하고 싶었다) 다시 소비자의 입장이 되어 벼룩시장을 돌아다녔다. 상인인 입주자들도 꽤 참여해서 전문적인 음식도 있었다. 머랭 쿠키와 러스크 8000원, 우비 7000원, 티셔츠 15000원, 천혜향 13000원, 레몬빵과 코코넛 휘낭시에 3500원 등을 샀다. 3000원 팔아 놓고... 웃기긴 한데 재밌었다. 


그런데 다 먹고 치우고 저녁즈음에 당근에서 관심 있던 인형 무료 나눔을 발견했다. 아주 큰 곰인형이다. 옛날에 '릴리슈슈의 모든 것'에서 아오이 유우가 정말 큰 곰인형을 소파처럼 쓰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때부터 마음속에 그리던 것과 비슷한 인형이었다. 그래서 결국 나눔 받아왔다. 오늘 내가 정리한 인형 부피의 10배는 된다. 그래도 마음에 든다. 


이상할 정도로 많이 먹었다. 단 것을. 편의점에서 베지 마카롱이란 걸 파는데 꽤 맘에 들어서 2+1으로 3개를 사서 1개를 먹고 몽쉘 2개를 먹었다. 천혜향 4개랑 물회도 먹었다. 비타 500도... 강박적으로 쫓기듯 계속 먹었다. 이상한 게 틀림없는 상태다. 배가 불룩 나왔다. 나는 혈당 문제도 있어서 이러면 안 되는데. 체중을 재지 않은지 보름도 넘었다. 주의해야겠다. 


'릴리슈슈의 모든 것' ost를 듣다 보니 회상에 젖는 기분이 되었다. 나는 한메일, 핫메일, 지메일을 거쳐 최근에는 네이버 메일을 쓰고 있다. 오랜만에 핫메일에 로그인해 보니 2007년에 교환학생으로 잠시 몸담았던 외국의 대학의 연구회에서 계속 메일이 오고 있었다. 내 담당교수였던 사람이 쓴 메일도 있었다. 잘 계시나... 연락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으나 '나는 아무것도 안 되었지만 안부를 전한다'고 쓰고 싶지가 않아서 왠지 뭔가 이뤘어야 연락할 만한 것 같아 그만두었다.

그리고 2008년에 미대 복수전공, 불문과 복수전공, 고전산문(국문과) 석사 진학을 고민하던 시절에 고전번역원 뉴스레터를 받기 시작한 것이 핫메일에 고스란히 쌓여 있었다. 나는 한문 산문을 좋아한다. 방금 3개 정도 읽어 보니 역시 재미있었다. 네이버 메일로 보내줄 수 있겠냐고 부탁하는 메일을 보냈다.

내친김에 한메일도 들어가 보니 2004년에 마지막으로 연락을 주고받았던 친구와의 메일이 남아 있었다. 그 친구도 그 메일주소를 쓰지 않을 가능성이 높지만 한 번 메일을 보내 보았다. '20년 만이네요...' 너무 오래되어서 이제 생판 남에 가깝기 때문에 존댓말로 썼다. 


이번 주는 약을 제 때 안 챙겨 먹게 된다. 아니 식사를 안 챙겨 먹게 되어서 그렇다. 제 때 밥을 먹지 않고 자꾸 고칼로리 군것질을 엄청 하게 된다. 진짜 나쁘다. 이러고 싶지 않다. 


오늘 글쓰기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한 번도 의심해본 적 없었던 법의 공정성과 인간의 존엄성'... 나는 충격을 받았다. 기억하는 가장 어린 때에도 나는 공정성과 인간성을 믿고 있지 않았다. '치, 웃기시네, 거짓말' 이런 마음으로 가득차 있었는데 왜 그랬을까. 비뚤어져 있고 삐져 있었다. 믿지 않았고 이미 상처받아 있었다. 그 상처를 보살펴준 어른도 없었고. 그런데 애초에 왜 그렇게까지 비뚤어지고 못믿게 되어 있었을까? 어린이로서 어떤 경험 때문에... 

주변 어른들을 매우 싫어하며 또 부정적이고 날카로운 마음으로 평하고 있었던 게 기억나는데 왜 그랬냐고. 저런 믿음이 흔들리거나 깨진 게 아니라 처음부터 없었는데 왜였을까. (스무살이 넘어 '정상적으로 사는 사람과 가족들도 있다'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나는 나와 내 주변 사람같은 사람밖에 못봤고 그사람들은 올바르게 느껴지지 않았고(틀렸다 생각 들 때가 많았고) 대화가 통하지 않았다. 지금 보기에 무척 망가져 있거나 자포자기한 채 늙어버린 어른들이었다. 너무 이렇게 생각하지 말까? 가난해서 그랬을까?)


아! 이번 화요일 그러니까 모레부터 상담 시작한다. 기대된다. 그 때 이런 이야기를 해봐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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