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I
513. 삶의 수확으로서의 삶 - 인간은 자신의 인식으로 아주 멀리 자신 을 펼쳐나갈 수도 있고 자기 자신에게 아주 객관적으로 보여질 수 도 있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결국 그는 자기 자신의 전기(傳記)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I』,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책세상, 2020. p.398)
나는 책을 통해 내가 가보지 못한 시대를 여행하고, 만나본 적 없는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을 좋아한다. 수백 년 전의 철학자와 대화를 나누고, 지구 반대쪽에서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의 인식이 무한히 확장되는 듯한 기쁨을 느낀다. 그 순간만큼은 나의 좁은 일상을 벗어나, 마치 세상을 객관적으로 조망하는 신이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하지만 책을 덮고 현실로 돌아오는 순간, 나는 니체의 말이 얼마나 날카로운 진실인지를 깨닫는다. 내가 아무리 많은 지식을 쌓고, 타인의 삶에 깊이 공감하며, 세상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려 노력해도, 그 모든 것은 결국 ‘나의 경험’이라는 필터를 거쳐 ‘나의 이야기’의 한 페이지로 기록될 뿐이다.
미술관에서 위대한 화가의 그림을 보며 기법과 배경을 공부하고 나면, 나는 작품을 객관적으로 이해했다고 믿게 된다. 하지만 그 위대한 그림은 결국 ‘내가 그 그림 앞에 서서 감동했던 어느 날의 기억’이라는 나의 지극히 개인적인 시간 속에 존재한다. 내가 그 그림에 대해 알게 된 것이지, 그림이 나의 존재를 아는 것은 아니다. 결국 내가 얻은 수확은 그림이라는 객관적 실체가 아니라, ‘그 그림을 보며 무언가를 느꼈던 나의 경험’이라는, 내 전기의 한 줄이다.
여행을 떠날 때도 마찬가지다. 나는 낯선 도시에 가서 그곳의 음식을 먹고, 현지인들의 언어를 배우며, 그들의 일상에 스며들기 위해 노력한다. 잠시나마 나 자신을 잊고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해방감을 느낀다. 하지만 여행이 끝나고 나의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 모든 생생했던 경험은 ‘나의 추억’이라는 앨범 속에 정리된다. 내가 얻은 것은 그 도시의 객관적인 실체가 아니라, ‘그 도시를 여행했던 나의 이야기’뿐이다.
우리가 아무리 인식을 확장하고 객관적인 시선을 가지려 노력해도, 결국 우리는 자신의 삶이라는 무대에서 내려올 수 없는 유일한 주인공이다. 내가 읽은 책, 내가 만난 사람, 내가 느낀 모든 감정은 결국 나의 전기를 더욱 풍성하고 깊이 있게 만드는 재료가 된다. 삶의 수확이란 흩어진 지식의 총합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겪어내며 써 내려간 나만의 고유한 이야기 그 자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