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합리의 존재조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I』

by 이시영

515. 경험으로부터 - 어떤 사건이 불합리하다는 것은 그 사건의 현존을 부정할 이유가 아니라 오히려 현존의 한 조건이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I』,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책세상, 2020. p.396)


나는 오랫동안 세상을 이성이라는 잣대로 이해하려 애썼다. 모든 일에는 합리적인 원인과 결과가 있어야 하고, 나의 감정과 선택 역시 논리적으로 설명될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내 안에서 설명되지 않는 ‘불합리한’ 무언가가 고개를 들 때마다, 나는 그것을 없는 셈 치거나 억지로 합리화하려 했다. 하지만 니체는 바로 그 불합리함이야말로 어떤 사건이나 감정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라고 말한다.


몇 년 전,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랑에 빠진 적이 있다. 내가 가진 모든 이성적인 기준—가치관, 생활 방식, 미래에 대한 계획—에 맞지 않는 사람이었다. 머리는 계속해서 ‘이건 아니야, 말이 안 돼’라고 경고 신호를 보냈다. 나는 그 불합리한 감정을 부정하기 위해 애썼다. 어떻게든 그 사람의 단점을 찾아내고, 우리 사이의 불가능한 이유들을 되뇌며 나의 감정이 ‘착각’이라고 결론 내리려 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감정의 존재감은 더욱 선명해졌다. 나의 모든 논리와 이성을 무력하게 만드는 그 사랑의 ‘불합리함’이야말로, 그것이 얼마나 강력하게 내 안에 현존하는지를 증명하는 조건이었던 것이다. 만약 그 사랑이 나의 모든 조건에 딱 들어맞는 합리적인 감정이었다면, 오히려 나는 그것을 의심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통제를 벗어난, 설명할 수 없는 힘으로 나를 압도했다. 결국 나는 그 불합리함을 받아들이고 나서야, 비로소 그 사랑의 실체를 온전히 마주할 수 있었다.


우리의 삶은 이성으로 설명되지 않는 순간들로 가득 차 있다. 길을 걷다 문득 터져 나오는 이유 없는 눈물, 모든 것을 걸고 싶게 만드는 비합리적인 꿈,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누군가의 희생. 우리는 종종 이런 일들을 ‘비정상’ 혹은 ‘이해할 수 없는 일’로 치부하며 외면하려 한다. 하지만 니체는 바로 그 ‘이해할 수 없음’이 삶의 본질적인 조건이라고 말한다.


어떤 사건이 너무나 불합리하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그 사건을 부정해야 할 이유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얼마나 강력하게 우리 삶에 개입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신호다. 삶은 언제나 우리의 이성적인 예측을 뛰어넘는다. 진정으로 삶을 경험한다는 것은, 이 불합리함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있는 그대로 끌어안고 ‘이것 또한 나의 삶의 일부’라고 인정하는 용기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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