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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진 Oct 30. 2020

한 방울에 넘친다

1장 : 내 잘못이 아니다 _ 9화

무작정 도망가고 보자는 사람은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파악하기 힘들다. 그래서 길을 잘 못 들어서기도 하지만, 잘못 든 길에서 만나는 낯선이 만큼 반가운 사람이 또 있겠는가? 그 낯선 이가 나와 같은 길을 잃은 방랑자라면, 그 상황이 나쁜 것만은 아닐 것이다.


내 이력에서 지우고 싶은 시간이 있다. 급하게 이직을 하려는 통에 마음만 앞섰다. 면접을 보기 전에 이 회사에 대한 몇 가지 소문을 들었다. 회사 대표인 Y 이사님은 이 바닥에서 잔뼈가 굵은 분이었고, 연세에 비해 정력이 넘쳐서 온갖 사사로운 일에 지나치게 신경 쓰며, 본인의 말(사진작가 또는 모델의 이름 등…)을 찰떡같이 알아듣지 못하는 직원은 하급으로 취급하여 괴롭힘을 가하고, 철저하게 무장된 사대주의로 인해 외국 유학 생활을 하지 않은 직원은 제대로 교육도 받지 못한 천민 취급을 대놓고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지랄을 버티고 남아나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런 루머는 (나에 대한 헛소리도 난무하기 때문에…) 믿지도 않았고, 나에게는 적용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6개월이 지난 지금 나 또한 천민이 되어 있었다. 신분 하락은 차치하고, 나의 몸이 만신창이가 되어있었다. 위산은 역류하고, 인후에 생긴 염증으로 목, 코는 물론이고 귀까지 염증이 퍼졌다. 머리카락은 50원짜리 동전 만 한 크기의 면적으로 여러 군데 빠져버렸다. 그 지경이 되자 팀장으로서 챙겨야 하는 팀원의 안위는 둘째치고 나라도 살아야겠다는 생각만이 들었다. 


나 : 죄송합니다. 이사님. 제가 이 회사에 맞지 않는 거 같습니다. 퇴사하고 싶습니다.

Y : 무슨 소리야, 이 팀장. 난 자기가 잘 적응하고 있다고 알고 있어. 그리고 아직 나에게 본인의 실력을 다 보여주지 않았다고 생각해…. 나에게 그것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

나 : 아닙니다. 제가 이사님의 기대에 못 미치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당신 때문에 퇴사하고 싶다는 말을 최대한 완곡히 표현한다. 

Y : 아니야. 아니야. 그렇지 않아. 왜 그러는 거야? 다른 이유가 있는 거지? 

다른 이유가 있는 게 분명해. 말해봐. 뭐야! 최 부장 때문에 그러는 거야?.

나 : 네? 최 부장이요?

그녀는 나를 오히려 밀정으로 만들려는 속셈인 듯 보였다.


최 부장은 그 회사에 장기간 근무한 디자인 팀 수장이었다. ‘최재원’ 그의 이름이다. 우리는 그가 없는 대화 자리에서는 그를 ‘미스터 초이’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직함은 부장이었지만 직함으로 불리기엔 너무 친근한 사람이었다. 그는 나와 같은 해에 태어났지만, 학교를 일찍 갔기 때문에 나보다 오빠인척 하기를 좋아하는 호리호리한 몸매에 하얀 피부를 가진 웬만한 남자 연예인보다 수려한 외모를 뽐내는 미남이었다. 패션에 대한 타고난 관심으로 언제나 트렌드 세터였으며,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것이 빠짐없이 아름답게 가꾸어져 있는, 화수분 같은 그였다. 

“회사를 계속 다니고 싶다면, 명품을 사야 해! 그래야 카드 값에 치어 어쩔 수 없이 회사에 온다고!” 

화려한 소비 벽이 퇴사를 막는다는 웃기는 논리를 펼치는 그였다. 그는 언제나 대화의 중심에 있었지만, 굳게 다문 입은 진지한 얘기 따위는 절대 하지 않았다. 절로 고민을 털어놓게 하지만 그 고민이 새어 나갈까 걱정하게 되는 그런 가벼운 사람이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의 낭비벽 말고는 가벼워 보이는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었다. 이 바닥에서는 보기 힘든 신비한 종자였다. 연세 많은 아버지가 딸 넷에 늦둥이로 얻은 막내아들이라고 했다. 딸 넷에 아들 생산에 실패한 우리 집과 견주어 보면, 그가 얼마나 금지옥엽으로 자랐을지 짐작이 간다. 


Y : 그렇지? 최 부장 때문이지? 그럴 줄 알았어. 저번 팀장도 최 부장 때문에 관뒀잖아.

   최 부장이 괴롭혀서 관두는 거야? 그런 거야?

나 : 아닙니다. 최 부장 때문이라니요…. 아니에요.

Y : 최 부장 때문에 관둔다니 어쩔 수 없네. 그를 자를 수 없어. 여기 너무 오래 다녔거든..

나 : 네??? 아닌데….


나는 최 부장 때문이 아니라는 말을 계속했지만, 그녀는 도돌이표처럼 같은 얘기를 반복한다. 그녀는 밀정을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본인이 듣고 싶은 말만 듣는 사람이었다. 자신 때문에 누군가 회사를 관둔다는 일은 있을 수도 없고, 앞으로도 있지도 않을 일인 것이다. 그녀의 확신에 난 결국 항복했다.


나 : 네네. 최 부장 때문입니다.


다음날 나의 사표는 수리되었다. 그리고 최 부장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나 : 최 부장님을 팔았어요. 안 그러면 설득이 안 되는 상황이었어요. 정말 미안해요. 

미스터 초이 : 괜찮아, 뭐 맨날 저러는데…. 한두 번이 아니야.

쿨내 진동하는 미스터 초이다.


그 회사에 내가 머문 기간은 고작 6개월이었지만, 그 당시같이 일한 동료들은 10년 이상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 최 부장만 빼고, 그는 2017년 1월에 세상을 떠났다. 자살로 알고 있지만, 구체적인 정황은 아무도 모른다. 사망 소식을 듣고 1주일 후, 그를 알던 모두와 함께 그의 납골 묘를 찾았다. 환하게 웃고 있는 그 잘생긴 영정 사진을 본 것이 그와의 마지막이었다. 

“원래 예쁜 사람들은 명이 짧아…, 우리는 그래서 오래 살 거야.” 

한참을 울다가 헛소리나 지껄여본다. 최 부장은 몇 해전 오랜 세월 투병 중이셨던 아버지를 여의고, 다른 회사로 직장을 옮긴 뒤, 심각한 공황장애와 우울증에 빠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인간의 본성은 한계가 있다. 슬픔과 고통을 어느 정도 견디다가 한계를 넘어서게 만드는 그 한 방울이 파멸하게 만든다. 

강해서 버티는 것도 아니고 약해서 파멸하는 것도 아니다. 넘치는 그 천성이 출구를 못 찾으면 죽을 도리밖에 없는 것이다. 아버지의 죽음, 혼자라는 외로움, 불안정한 미래, 이유 없는 학대, 그 자신에 대한 방치….

이 모든 것이 마구 뒤얽히고 서로 밀치고 그래서 결국엔 그 힘에 밀려 사라져 버리고 싶은 마음뿐인 것이었으리라 짐작한다. 길을 잃은 그를 그렇게 놔둔 것은 자살을 도와준 것과 같다. 그를 아꼈던 모두의 마음이 괴롭다. 


미스터 초이 정말 미안해요…. 

아무리 그래도 우리 엄마와 같은 날에 죽는 건 진짜 아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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