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C 6000, 첫번째 한웅, 거불단 한웅과 동지팥죽

한민족의 시작

by 한임


동지는 원래 아느에서 부터 해오던 것이었다. 당시에는 한해를 마무리 하는 그냥 축제였다. 일년은 365일로써 30일을 기준으로 12번 운영된 후, 5일간 동지축제가 벌어졌던 것이다. 당시에는 단오와 동지가 가장 큰 축제였다. 지금과 달리 동지는 한해의 끝자락에 있는 게 아니라 동지가 한해의 끝이었던 것이다.




그 흔적이 남았던 게 조선시대 머슴들도 동지팥죽을 먹으면 퇴근했던 것이다. 달력과 다르게 동지를 한 해의 마지막 날로 인식했다는 것이다.




아느가 무너진 초기 한인 때는 저항을 했으나 저항 자체도 수천 년간 이어지며 피로가 쌓였고, 동시에 역사적 유물도 많이 사라졌었다. 이후 한웅 때부터 동지 때의 대학살을 기념하기 위해 먹기 시작한 게 팥죽이다.

아느 이후 살아남은 사람들이 강이나 호수 인근에 땅을 이루고 살았다. 특히나 온천이 있는 곳에 자리 잡았는데 문제는 곰팡이였다. 곰팡이로 인한 독성을 피하는데 선택된 것이 팥이였다. 근래에 쑥을 만병통치약으로 사용했던 것과 같이 몸속의 독을 없애는 만병통치약으로 팥이 선택된 것이었다. 초기엔 조나 수수, 기장을 사용했는데 농경이 본격화 되면서 몸속 독성을 없애는 데 팥이 주로 사용된 것이다. 한웅 때 부터이다.




동지팥죽.jpg 동지팥죽




최초의 한웅이었던 거불단한웅이 계셨다. 단군왕검이 최초의 단군이었던 것과 같이 거불단한웅이 자신의 세력을 이끌고 아사달에 도착하여 ‘우리는 하나다’란 의미로 해먹은 음식이 동지팥죽이다. 여기서 새알은 아느에서 살아남은 자들을 의미했고 당시엔 쌀알이 아니었으나 지금의 쌀알에 해당하는 낱알들은 일반적인 루 백성을 의미했다. 그리고 팥은 몸속의 독성 해독 역할을 했다. 처음 이주한 후 가장 강력하게 순혈주의와 루가 대치되었던 터였다. 순혈에게 있어 루와 함께 무언가 일을 도모한다는 것은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이에 새알과 동시 지금 쌀알보다 훨씬 작은 밥알을 함께 먹으며 순혈과 루가 함께 해야 한다는 개념이기도 했다.




과거 궁궐이나 집을 지을 때 팥죽을 엄청 쑤어서 바닥에 발랐다. 아느계 혈통에게 동지와 단오가 가장 큰 축제였다. 당일에는 제를 지냈다. 이는 제사가 아니다. 우리는 기억하고 있고 아직도 당신의 혈통입니다. 이를 증거하는 증표로서 제를 지냈던 것이다. 그것과 같은 흐름에서 나타나는 것이 설날 때 쓰는 붉은 주사, 이스라엘이나 유대에서 사용하는 양의 피가 있다.




그럼 어린 양의 피와 같이 제물을 바치는 것의 의미는 ‘첫 번째 나의 소중한 것을 바친다’ 라는 식으로 와전된 것일 뿐이다. 기본적으로 아느계 사람들은 식물성을 쓴다. 그 사람들 중에서 주술의식을 하는 사람들이 광물성을 쓰고 보복과 복수를 다짐하는 경우에 동물의 피를 사용하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서쪽에선 팥에 대한 기억이 사라졌다. 유목을 했던 터라 팥 농사를 계승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최초의 한웅이었던 거불단한웅은 여행가였다. 마지막 한인의 아들 중 하나인데 그는 한에 대해 큰 미련이 없이 여행을 다녔다. 세상에 대한 궁금증이 많았던 거불단은 15, 16세부터 여행을 시작해 서쪽 아느 땅부터 시작하여 삼성태 문화, 파르, 마한 땅까지 엄청난 영역을 걸어서 여행 다녔다.




그래서 아사달의 위치를 점 찍은 것도 거불단이었다. 굉장히 넓은 대지를 여행 다니며 마음을 다녔던 것이다. 더 이상 그냥 숨어 있지는 않겠다. 아사달에 자리를 잡고 마한과 한웅, 아느의 사람들을 지키며 시키들을 물리쳐야 겠다가 바로 거불단의 결심이었던 것이다. 더욱이 마한 사람들을 보호하고 그들로부터 식량을 공급 받을 수 있었기에 바이칼에 머무는 것과는 또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었다. 동시에 마한의 왕과 약속을 하기도 했던 것이다.




당시 마한은 야만족에게 꽤나 자주 공격을 받았다. 거대한 협곡을 뛰어넘을 수 있는 늑대를 타고 다녔기 때문이다. 당시의 늑대는 지금의 진돗개에 비해 6배 크기였으며 드물지만 대단히 큰 녀석들은 스무배가 넘었다. 한편 지금의 호랑이는 당시 곰치의 먹이였다. 지금은 멸종한 곰치는 기다란 송곳니를 가진 호랑이 훨씬 커다란 고양잇과 포유류였다. 거대한 늑대를 탄 야만족들은 지금의 연해주와 몽고 일대에 걸쳐 살고 있었고 겨울이 되면 늑대를 타고 약탈을 왔었다. 넓은 평야였던 지금의 서해안 일대를 밀고 오는 야만족을 막기 위해 마한의 도시들은 3중, 4중, 6중을 너머 9중 장벽을 세우곤 했었다. 문의 위치도 제각각이라 일직선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하지만 일반 백성이 사는 성 밖의 상황은 달랐다. 갑자기 달려와서 농작물을 빼앗아 가고 사람들을 노예로 끌고 가곤 했다. 이에 성에서 바로 대피할 수 있는 주변만 개발할 수 있었다. 더구나 도시와 도시 간 소통이 힘든 문제가 있었다. 그런 상황 마한 영역 주변에 아사한이 와서 이들 야만족을 막아주겠다고 하니 당연히 우리가 식량 공급해 주겠소 가 되는 것이다.




촌락이자 군사기지로서의 아사달과 수도로서의 아사달은 달랐다. 군사동맹으로서의 아사달은 기원전 6천년경이었다. 그리고 군사동맹으로서의 아사달이 시작될 때 먹었던 게 팥죽인 것이다. 너와나 우리가 함께 라는 의미였다. 그리고 동지 때 마다 다시 만나자. 거불단 한웅 쪽에서는 칡, 고구마 같은 뿌리 식물을 갈아서 전분을 만들어 새알을 만들어 왔고, 마한에서는 식량을 들고 왔다. 이를 커다란 돌솥에 넣어 죽을 만든 게 팥죽의 시작이다.




고대의 기억이 남아 있는 것은 팥죽, 단오, 가위바위보, 윷놀이가 있다.


한편 우리말에 사자후란 것이 있다. 천지가 울릴 듯한 함성으로 상대방 또는 동물들을 움츠리게 하는 기술이다. 그런데 동북아시아에 사자가 살았던 적은 없다. 어찌된 것인가? 별 거 없다. 과거 우리는 호랑이를 사자라 불렀던 것이고, 지금 우리는 사자를 사자라 부르고 호랑이를 호랑이라 부르는 것 뿐이다.


한편 '호랑이'는 훈련받은 범 부대를 일컫는 복수형이다. 단수형은 그냥 '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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